트레킹 5일차 아침
안나푸르나의 진정한 풍경은 바로 일출 때 볼 수 있다
안나푸르나의 진정한 풍경은 바로 일출이었다. ABC를 기준으로 안나푸르나 봉들은 서쪽에 위치해있다. 그래서 일출 시간에 맞춰 이 베이스캠프에 서서 봉우리들을 바라보면, 동쪽인 등 뒤에서 태양이 떠오른다. 그 태양빛을 가장 높은 안나푸르나의 봉우리부터 받아서 황금빛 블라인드가 내려오듯이 안나푸르나 산맥 전체가 붉게 물드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새벽 일찍 눈을 떴다. 몇 시인지도 모른 채 미리 짐을 쌌다. 일출을 본 후 아침을 먹고 바로 하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짐을 다 싸고 눈을 비비고 문을 여니, 아직 밖은 새카맣게 어두웠다. 배터리가 완충된 고프로를 챙겨서 숙소 밖 이 롯지의 뷰포인트로 갔다. 안나푸르나, 마차푸차레 둘 다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저 멀리, ABC까지 오는 길에 어제는 없던 가로등 불빛 같은 것들이 보였다. '어제 별 볼 때도 없었던 불빛인데...' 가로등도, 롯지도 없는 그냥 길인데 왜 저기에 불빛이 있는지 의아해하면서, 여명을 기다렸다. 한 이십 분쯤 지났을까, 아까 봤던 그 불빛이 더 커진 느낌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저 불빛은 ABC에서 일출을 보고자 더 아래의 롯지에서 미리 출발한 트레커들이라는 것을... 일출을 보기 위해 저 힘든 길을 이 새벽에 라이트를 킨 채로 걸어오고 있던 것이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리는 그래도 어제 미리 올라온 덕분에 더 편하게 ABC를 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동쪽의 마차푸차레의 공제선이 선명해졌다. 시커멓던 하늘은 짙은 남색으로, 청량한 하늘색으로 조금씩 더 밝아왔다. 핵폭발이 주변의 공기를 밀어내듯이, 태양이 떠오르면서 하늘을 수놓던 별들을 지구 밖 어딘가로 내쫓는듯했다. 하늘이 색은 완전히 바뀌고, 마차푸차레는 후광을 가득 담은 채 신비로운 자태를 뽐냈다.
마치 잠에서 깬 거대한 백호처럼 모습을 드러내다
ABC로 걸어오던 불빛들이 거의 다 가까워져서 발소리와 말소리가 들릴 때쯤, 안나푸르나는 마치 잠에서 깬 거대한 백호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내 눈에 태양은 눈곱도 보이지 않았지만, 서쪽 저 멀리 8,000m급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은 이미 태양이 내뿜는 빛을 받아 시뻘겋게 불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붉은빛을 띨 수 있는지 정말 신기했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 건물 사이로 비치는 태양광이 줄어들면서 좀비 개들이 주인공을 덮치려고 하는 장면에서 나는 태양의 움직임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비슷한 느낌이었다. 정말 불이 번지듯 안나푸르나의 붉은 모습은 점점 더 아래와 옆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은, 태양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환상적인 자연의 향연이었다.
미리 타임랩스로 설정해둔 고프로가 부디 이 광경을 잘 담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식사도 잊은 채 1시간을 멍하니 감상했다. 사람의 손이 전혀 닫지 않은 것들로만 이루어진 자연의 아름다움, 자연의 숭고함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대도시의 야경, 싱가포르의 가든스 바이 더 베이처럼 인간이 만든 자연의 경치도 물론 훌륭하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자연은 '이 곳에 전망대를 만들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겠지.' 라거나 '인공 정원의 조명은 이렇게 배치하고 이 불빛 때에는 이 노래를 틀어야 감동이 가장 클 거야.' 등의 인간의 의도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반면에 인간의 개입이 없는 자연은 아무런 의도 없이 그냥 그렇게 있을 뿐이다. VIP가 왔다고 해서 좋은 날씨를 내주지도 않고, 감동적인 노래를 틀어주지도, 환상적인 불빛을 내뿜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 그대로의 산과 태양, 눈과 구름이 만들어내는 고요하면서도 장엄한 이 날의 풍경은 그 어떤 경치보다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있을 것 같다.
죽기 전, 안나푸르나의 일출 한 번쯤은 눈에 담아보자. 적당한 체력과 8~9일 정도의 휴가, 여행경비 150만 원이면 넉넉하게 세상의 지붕 '히말라야 산맥'의 산 중 하나인 '안나푸르나'를 즐길 수 있다. 전 세계 트레커들이 해외 트레킹 여행에 목말라 있을 것 같다. 코로나가 종식된다면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은 만큼 더 아름다워졌을 안나푸르나 트레킹 여행을 꼭 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