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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빗헌터 Oct 06. 2020

히말라야에서의 달리기 시합과 끝없는 하산길

트레킹 5일차 ABC ~ 시누와(2,340m)

1일차 마큐 ~ 지누단다(1,740m)

2일차 지누단다 ~ 도반(2,500m)

3일차 도반 ~ 데우랄리(3,200m)

4일차 데우랄리 ~ ABC(4,130m)

(하산) 5일차 ABC ~ 시누와(2,340m)

(하산) 6일차 시누와 ~ 포카라(850m)



안나푸르나의 일출을 감상한 우리는 후다닥 아침을 먹고, 하산을 위해 출발했다. 오늘은 이틀 하고도 반나절 동안 올라왔던 길을 하루 만에 내려가야 하는 일정이다. 신기하게도 올라올 때 그렇게 힘들었던 길인데, 발걸음이 너무 가벼웠다. 하루 만에 4,000m대 고도에 적응한 것인지, 아니면 내리막길이라 훨씬 수월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올 때보다 2배는 빠르게 내려가도 그렇게 오르막길만큼 숨이 차지 않았다.


애틋하게 헤어지는 연인처럼, 안나푸르나를 자꾸 뒤돌아보았다.
 

이 곳을 내가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는 어제와 오늘 아침까지의 황홀했던 순간을 여행 출발 반년 전부터 기다렸다. 얼마나 많은 영상을 보고, 책과 글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기대하고 그렸던 곳인데 이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져야 하다니 많이 아쉬웠다.


안녕, 안나푸르나


뭐 어쩌겠는가... 열심히 걸어내려 갔다. 다리는 별로 아프지 않았지만,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나는 올라올 때 도반에서 샤워를 한 이후로 60시간이 넘도록 샤워를 못했다. 가장 근질근질한 곳은 머리였다. ABC에서는 방한을 위해 모자까지 쓰고 있었기에 정말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산길, 데우랄리에서 3일 만에 머리를 감다


어제 묵었던 숙소인 데우랄리까지 단숨에 내려간 우리는 이 곳에서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목적지인 안나푸르나를 즐겼으니 이제 트레킹 여행이 끝났다는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우리는 현지식 대신 신라면과 시원한 콜라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나는 우리가 앉아있던 야외테이블 옆에서 세면대를 발견했다. 샤워장이 아니라, 아주 자그마한 세면대였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외투를 벗고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세면대에 머리를 박았다. 양치컵도 겨우 들어갈만한 곳에 머리를 욱여넣고 차디찬 히말라야의 냉수에 뒤통수를 맡겼다. 3일 전 저녁에 샤워를 한 게 마지막이었으니, 머리를 감은지 60시간도 더 지난 것이었다. 배고픔도 잊은 채 미친 듯이 샴푸질을 두 번이나 하며 상쾌함을 온 머리통으로 만끽했다. 찐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대충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나니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상쾌한 머리로 콜라와 라면을 흡입하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순식간에 기력 보충을 하고 다시 하산을 위해 일어섰다. 보통 점심을 먹고 충분히 쉬었는데, 오늘은 최대한 빨리 목적지인 시누와에 도착해서 넉넉하게 쉴 예정이라 데우랄리에서 긴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디펜드라는 하늘을 보면서 더 늦어지면 비가 올 것 같다고도 하여, 걸음을 재촉했다.


코카콜라가 절대 망할 수 없는 이유


올라올 때 그렇게 길게 느껴졌던 길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발걸음은 너무 가벼웠지만 점점 더 ABC와 멀어져 갔고 풍경은 지리산에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내려갈수록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목적지를 들른 후 내려가는 길은 올라오는 길처럼 그렇게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지루한 시간들이 많았다. 그래도 간간히 보이는 동물들과 여전히 이쁜 풍경, 그리고 한별이와 디펜드라, 비스누까지 함께 걸었기에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중간에 나타난 오르막길에서는 다 같이 정상까지 달리기 시합을 하기도 했다. 무슨 정신으로 뛰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미친 듯이 웃으면서 달려본 적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르막길을 한창 뛰고 나니, 숨을 고르는데 족히 20분은 걸린 것 같았다. 더 나이 들어서 왔다면, 이렇게 뛰지는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저 계단을 다시 올라가게 된다면 이 날을 생각하며 숨 닿는 데까지 다시 열심히 뛰어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우리 넷은 예정보다 훨씬 더 빠르게 시누와에 도착했다.



약속과 평화의 땅 시누와에 도착했다


3일 전 점심을 먹었던 같은 숙소에 왔고 숙소의 아이들은 여전히 밝은 미소로 우리를 반겼다. 바깥 뷰가 아름다운 테라스 쪽 방을 받아, 저녁을 먹기 전 샤워를 했다. 만 3일 만에 하는 샤워... 너무 행복했다.


약속의 땅, 시누와에 도착했다


샤워를 하고 주방으로 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어제 묵었던 ABC에서 같은 롯지에서 지낸 한국인 무리들이었다. 남자 3명과 여자 1명으로 총 4명의 일행이었는데 이들은 알고 보니 신혼부부 한 쌍과, 남자 2명도 서로 몰랐던, 각각 혼자 트레킹 했던 사람들이었다. 걷다 보니 일정이 겹쳐 4명이서 다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혼부부는 현직 육군 장교 커플이었는데, 신혼여행까지 이렇게 등산을 오다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저렇게 만나 같이 여행하는게 좋아보였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4명이서 식사를 시키다 보니 비용을 2:1:1로 나누어 정산해야 하는 점이 불편해 보였다. ABC에서 식사가 끝난후에도 한창 돈 계산을 하시는 것 같았는데, 시누와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정산을 할 때에도 계속 돈이 안 맞는 것 같았다. 누구는 맥주를, 누구는 콜라를 마셨으니 돈을 다르게 분배해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현지화폐로 하다 보니 더 골치 아파 보였다. 그리고 시누와에 도착할 때에도 두 명이 뒤쳐지는 바람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어떤 롯지에 묵을지, 저녁은 언제 먹을지 정하지 못하고 마냥 기다리는 것 같았다. 기왕이면 마음 맞는 친구와 오거나, 혼자 오기로 마음먹었다면 꼭 필요한 일정 외에는 가급적 혼자 주도적으로 일정을 짜고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혼자 다니는 것이 조금은 외롭고 심심하더라도, 가장 스트레스를 덜 받는 트레킹 여행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닭백숙과 김치찌개 만찬 너머로 한국인 일행 4명이 보인다


오늘 저녁은 닭백속에 김치찌개, 그리고 네팔 로컬 맥주를 주문했다. ABC에 도착하기 전까지 디펜드라는 엄격하게 술을 먹지 말라고 했다. 학창 시절 때부터 선생님 말은 잘 들었기에, 술 없이 건전한 트레킹을 해왔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디펜드라가 무려 먼저 'Beer'를 마시겠냐고 물어봤다. 디펜드라는 우리의 마음을 어찌 이렇게 잘 아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ABC도 봤겠다 고산병의 위험도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네팔의 로컬 캔맥주를 주문했다.


김치찌개와 닭백숙, 그리고 강렬한 네팔 맥주를 마시고 메뉴판을 조금 더 구경하다 보니, 네팔식 '소주'도 있었다. 언제 또 마셔보겠나?라는 생각에 주문했다. 사케와 고량주 사이 어딘가의 강한 맛. 안 그래도 맥주의 도수가 높았는데 네팔식 소주까지 마셔버리니 점점 더 취기와 흥이 올랐다. 시누와의 아름다운 풍경과 ABC에서의 황홀했던 추억들을 나누며 마시다 보니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이 난 나와 한별이는 디펜드라와 비스누에게 우리의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솔직히 매력이라기보단, 그냥 노래를 틀어놓고 춤추고 놀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스피커와 휴대폰을 가지고, 단체 손님용으로 활용하는 듯한 비어있는 안쪽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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