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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빗헌터 Sep 16. 2020

신들의 세계 속에서 맞이하는 밤

트레킹 4일차 밤

자연의 숭고함에 대하여 


회사에서 윗사람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잘난 사람과 비교가 되어서 나 자신이 작고 초라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굉장히 불쾌한 일이다. 하지만 웅장한 자연이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처럼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서, 관찰자인 나 자신이 작아진다는 느낌은 그리 나쁘지 않다. 대자연,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지구 반대편에서 온 여행자를 작디작은 존재로 만듦과 동시에, 그 작은 영혼에 유익함을 가져다준다. 이 유익함은, 그 관찰자가 숭고함과 거리가 먼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는다.


결국 찾아온 고산병 증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즐긴 시간들은 내게 '자연의 숭고함'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나와 한별이는 안나푸르나를 실컷 눈에 담고, 저녁을 먹으러 롯지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때부터 한별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항상 밝은 모습의 친구였는데 저녁을 먹는 게 영 입맛이 없어 보였고 기운이 푹 빠진 모습이었다. 물어보니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잘 안 쉬어진다고 했다. '아 이게 설마 고산병 증세인가' 생각이 들었다. 머리도 살짝 아프다고 했다. 고산병이 악화되면 하산하는 것 밖에 답이 없다고 했는데... 나는 설마 우리가 지금 당장 하산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디펜드라에게 이야기해보니 고산병 초기 증세가 맞았다. 아까 안나푸르나를 배경으로 점프샷을 찍고, 계속 밖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닌 탓일까... 한별이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아 걱정되었다. 4일 동안 열심히 고생해서 걸어왔는데 이 곳 ABC에서의 1박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다행히 디펜드라에게 고산병 증세를 완화시켜주는 약이 있어서 받았다. 디펜드라는 가능하면 약 복용 없이 이겨내는 게 좋지만 정말 필요하다면 한 알 먹는 것을 추천했고, 한별이는 고민 끝에 받은 약을 복용했다. 


트레커들로 가득한 ABC 롯지


ABC는 다른 아래 마을들보다 롯지가 적고 거의 모든 트레커들이 이 곳에 머무르기 때문에 사람이 정말 많았다. 그에 비해 부엌의 규모는 아담해서, 저녁이 되니 시장통이었다. 공기가 잘 순환되지 않는 실내에 많은 사람이 있다 보니 한별이가 답답함을 더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저녁을 먹은 한별이는 빨리 숙소로 들어가서 쉬었다. 내일 아침에는 제발 별 일 없길 바랐다. 저녁을 먹고 나는 숙소에서 조금 쉬다가, 별을 보러 나왔다.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를 배경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달이 너무 밝아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 덕분에 어두운 밤에도 새하얀 산봉우리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햇볕을 받은 산봉우리보다 훨씬 더 서늘하고 퍼런 느낌의 하얀색이었다.


안나푸르나와 별


마차푸차레와 별


준비한 옷을 모두 껴입었는데도, 해가 떨어지고 나니 바람에 얼음을 갈아 넣은 듯 정말 추웠다. 카메라로는 온전히 담지 못했지만, 살면서 바라본 하늘 중 가장 많은 별들이 떠있었다. 새하얀 산봉우리와 구름 없이 맑은 하늘과 밝은 달빛까지, 환상적인 분위기였다.


한 시간을 넘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숙소로 들어왔다. 더 늦기 전에 자야 했다. 내일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 파노라마뷰의 일출을 감상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는 아침을 먹고 단숨에 시누와 까지 걸어내려갈 예정이었다. 시누와에서 이 곳까지 오는데 2.5일이 걸렸는데 그 거리를 하루 만에 내려가는 것이다. 숙소에 들어오니 이미 한별이는 반쯤 곯아떨어져 있었다. 이 환상적인 밤하늘을 즐겼어야 했는데! 부디 내일 일출은 온전한 컨디션으로 누렸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쓴 '여행의 기술'에는 숭고함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일과 사람에 치여 나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꼭 곱씹어보면 좋겠다. 안나푸르나가 아니어도 좋으니, 이 문장을 가슴에 새기고 자연의 숭고함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길 바란다.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을 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


밝은 달만 아니었다면, 은하수도 충분히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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