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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Dec 09. 2020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단풍을 마주했다.

2020년 11월 스무하룻날의 단어들

단풍을 보러 베후쿄에 갔다. 세상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데 인터넷만 맹신한 나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단풍을 마주했다. 이미 진 단풍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아직 그 기력을 다해 나무에 매달려 있는 단풍과 사시사철 푸른 나무로 단풍놀이를 대신하며 산길을 걸었다. 아스팔트로 잘 닦인 산길을 벗어나 산속에  등산로를 걸어보려고 했는데, 등산로 입구에 사람 흔적은 없고 낙엽만 수북이 쌓여있어 그만 두기로 했다. 사실 낙엽보다도 등산로에 들어가려면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만든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계곡물이 바로 아래서 요동치고 있어서 선뜻 앞으로 나서질 못했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다리를 건넜는데, 사실 발을 헛디뎌 빠지더라도 바지만 젖고 말 정도의 계곡이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장난으로 다리를 건넜다가 다시 돌아올 때는 심장이 벌렁거리고 눈 앞이 아찔해서 애를 먹었다.


산 초입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른 등산로가 있어서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튼튼한 철제 다리가 놓여 있어서 계곡을 건너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낙엽이 져서 산길이 미끄러웠다. 그뿐만 아니라 과도로 사과를 돌려 깎은 것처럼 산을 에두르고 있는 산길은 비탈지고 폭이 좁아서 잘못 미끄러지면 그래도 하산할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얼마간 걷다가 R이 돌아가자고 해서 방향을 돌렸다. 미끄러운 산길은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갑절은 힘들고 어려웠다. R은 거의 기다시피 두 발뿐만 아니라 두 손까지 써가며 산을 내려갔고,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본 K는 폭소했다.


베후쿄까지 온 김에 베휴쿄 온천에 갔다. 탁 트인 노천탕을 기대했는데 여느 실내 목욕탕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다. 온천 탕에서 바깥을 볼 수 있게 만든 창은 오히려 너무 트여서 도대체 어디에 몸을 담가야 할지, 말 그대로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는 뜨거운 해와 뜨거운 시선을 피해 탕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이 너무 뜨거워서 오래 있지는 못하고 금방 나온다고 나왔는데 이미 탕 밖에서 M과 R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기간 한정 동남아시아풍 카레를 먹었다.


저녁에는 줌으로 동기들과 연락했다. 원래 오늘 저녁쯤이면 와카야마현 어디 숙소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있어야 했는데, 통역안내사 수업 일정이 태풍 때문에 바뀌는 바람에 여행은 못 가고 연락만 하게 됐다. 건배만 하고 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SM은 요즘 왜 블로그가 뜸하냐고 물었고, 이제는 브런치로 채널을 옮겼다고 알려줬다. 다만 블로그든 브런치든 자기만족으로 글을 쓰는 것은 똑같고, 글쟁이들만 있을 줄 알았던 브런치에도 자본주의에 손길이 뻗친 것 같아 아쉽다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기억에 남지 않은 이야기를 더 하고 다 같이 사진을 찍고 줌을 마무리했다.


紅葉(こうよう)、もみじ:단풍, 단풍놀이는 紅葉狩り(もみじがり)
爆笑(ばくしょう)、大笑い(おおわらい):폭소
乾杯(かんぱい):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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