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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16. 2021

가이드북을 믿지 마세요

낯선 설렘: 필리핀

#동남아 #아세안 #필리핀 #마닐라 #산안드레스마켓 #가이드북


수많은 여행 경험담이 넘쳐난다. 

유튜브, 블로그, 가이드북, 여행 에세이. 

간접 경험의 재미도 있고, 필요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조언을 꼭 하게 된다. 

가이드북을 믿지 말라는.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명소도, 나에게는 실망스러울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장소도, 나에게는 평생 기억에 남을 명소가 되기도 한다. 


그곳은 

정말 훌륭한 유적지일 수도 있고, 

럭셔리한 관광지이거나 건축물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평범한 길거리일 수도 있다. 




‘산 안드레스 마켓’은 실망이었다. 

생각했던 것에 비해서 너무나도 초라하고 작아서 도무지 잘 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청결하지 않았다. 

필리핀에 온 뒤로는 어느 정도 청결은 포기하고 지내는 편인데도, 이곳은 생각보다 좀 심했다. 

물론, 상인들은 나름대로 청결에 힘쓰고 있었지만, 내 성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빠르게 달려가는 쥐까지 봤으니, 

과일을 파는 곳이 산 안드레스 마켓만은 아니었는데 왜 이곳을 선택했는지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왜요? 뭐 봤어요?"

"응? 아, 아니야. 아무것도."

차마 엘리사에게 쥐를 봤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곳은 내가 오자고 했던 곳이었다.  

세상의 과일이 모두 모여있는 곳이라는 가이드북(여행할 때 가지고 갔던 그 가이드북이다)의 말만 믿고,

소 과일을 좋아하는 엘리사에게 좋은 볼거리가 되겠다 싶어 오자고 한 건데, 괜히 미안했다.

수식어만 그럴싸하게 붙이지만 않았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놈들.... ㅡ..ㅡ


“파인애플 먹을래?”

엘리사는 파인애플을 사기 위해 돈을 꺼내고 있었다. 

미안해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엘리사는 고맙게도 스스로가 즐거운 시간을 만들고 있는 듯했다. 


인애플 장수는 솜씨 좋게 파인애플 하나를 통째로 깎아서 우리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너무 커서 먹기 힘들었다. 

좀 작게 잘라 달라며, 손으로 반을 자르는 시늉을 했더니, 

반만 산다는 말인 줄 알았는지 손을 내저으며 무조건 안된다고 했다.

 

“됐어. 그냥 먹을게요.”

“내가 한 입 베어서 뱉어 줄까?”

“죽는다!”

결국 입이 작은 엘리사는 파인애플을 오물거리며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이번엔 수박 앞에 섰다.


"수박 당기지 않아?"

다행히도 수박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 있었다. 

(수박도 파인애플처럼 통째로 깎아 팔면 어떨까?) 

미지근해 맛이 없었지만 엘리사는 제법 만족해하는 표정이었다.

 

“깔라만시도 있다.”

깔라만시. 

이제 어디서든 깔라만시만 보면 내가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사막여우와 어린 왕자처럼, 깔라만시를 통해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는 건 아닐까?

 

“망고다! 망고!”

마닐라에 있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먹었던 과일 중 하나가 망고다. 

한국에선 쉽게 볼 수도 없고 가격도 비싸지만 마닐라에선 흔히 볼 수 있고 

무엇보다 가격도 싸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원 없이 먹었다.


"토마토다! 토마토!"

윤기가 나는 토마토는 한 입....


"스타푸르트! 진짜 별 모양이다!"

모양도 모양이지만, 자른 단면이 별 모양이라고 붙은 스타푸....


"당근이다! 당근!"

당근은 토끼가 좋아하는.... 


"아렘이다! 아렘!"

ㅡ..ㅡ 

뭐냐? 


우리는 크지도 않은 산 안드레스 마켓에서 한참을 더 머물렀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엘리사의 노력 때문이었다. 

재미있지도, 그렇다고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은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엘리사는 소소한 것들에 무척 즐거워했다.

 

“재미있어?”

“솔직히 그렇진 않아요.”

“그러면서 왜 그렇게 즐거워하는데?”

“시간이 아깝잖아요. 마닐라에 있을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뭐라도 좋으니 즐겁게 지내고 싶어.”


맞네.

그러네.


난 가끔 사람의 수명이 일 년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일 년 동안 무엇을 할까? 

하루하루를 정말 알차게 보내겠지?


여행을 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빨리 지나가고,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은,

모든 여행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니까.


지금, 엘리사가 그랬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랬다. 


낱개로는 팔지 않겠다는 과일 장수에게 

겨우겨우 부탁해서 구입한 갖가지 과일들을 손에 들고 길거리에 털썩 앉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트라이시클의 매연 속에서, 

우리는 한참 동안 마닐라의 솔직한 모습을 가슴에 담아 갔다.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결국엔 좋은 기억만 남게 될 거야. 

그래서 그리워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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