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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Nov 01. 2021

패키지도 여행이다_여행마저도 지쳐있던 날들

낯선 설렘: 터키

자신의 꿈을 위해 회사 생활을 한다면, 그보다 축복받은 삶이 또 있을까 싶다. 

꿈까지는 아니더라도 전공을 살려 들어간 회사라면, 그 정도도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아니, 회사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고 해야 하겠지. 


하지만.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엄마는 아무런 말은 안 하더라도, 아침저녁으로 걱정된 눈으로 날 바라보겠지만, 

그렇지만.


회사 생활은 점점 지쳐갔다.


성적에 맞춰 뭔지도 모르고 정했던 전공은, 

10대 시절 내내 익혔던 '시험만 잘 보면 되는' 내공의 연장선으로, 

A, 못해도 B를 수두룩 받았지만, (대학 시험은 다를 줄 알았지만) 단순 암기로 치른 탓에, 

졸업식 날, 내가 왜 대학을 다녔던 걸까 싶은 회의만 들었고, 

그래도 좋은 성적에 전공을 살릴 수 있었던 회사에서의 일은, 


차츰, 돈이나 벌자, 돈이나 모으자 로 귀결됐다.


그러니,

일은 금방 지쳤고, 

별다른 취미도 없고, 연애도 안 하던 난, 

주말에 리플레쉬도 못하고, 

그렇게 수년을 지내다 보니, 


회사에는 일은 무척 잘하지만 (요령이 쌓인)

딱히 빛을 내지는 않고, 낼 생각도 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물론 결코 그렇게 살려고 했던 건 아니다.

지나고 돌아보니, 그런 회사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여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다들 여름휴가를 다녀왔고, 

그 휴가 때 추억으로 하루하루 또 버텨가는 활력소가 되었는데, 

난 여름휴가도 가지 않은 채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딱히 휴가를 내고 갈 곳도 없었고, 

휴가를 낼만큼 번아웃이 된 것도 아니었고, 

돈이나 모으자는 생각이라 돈을 쓰고 싶지도 않았던 난.


아, 이러다가는 정말 망가지겠구나 싶었다. 

육체는 건강하더라도 (마침 담배를 끊었던 터라 더욱) 

내적인 무언가가 단단히 고장나버리겠구나 싶었다. 


외근을 다녀오는 길.

시간이 애매했다. 

택시를 타고 회사에 들어가도 18시 정도.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퇴근이니, 그냥 걷기로 했다. 

걷다가 18시가 되면, 그때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면 땡땡이는 아니니까. 


강남 한복판을 걷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간판이 있었다. 

아니, 눈에 띄는 간판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라면 다른 화려하고 큰 간판들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조그만 여행사 간판이었다. 


"저기...."

여행사 문을 열어고 들어갔다. 

그리고 상담을 받았다. 


"어디를 가시려고 하나요?"

"그러니까....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어요."

"없다고요?"

"아니..... 그러니까.... 어디가 좋나요?"

".... 추천을 해달라는 말씀이시군요."

"네...."

"그럼, 언제 가실 예정이신가요?"

"그러니까.... 음.... 가장 빠른.... 일정....이라고 말씀드리면 될까요?"


여행사 직원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눌러대며, 날 위해서 (?) 무언가 열심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화면을 내가 볼 수는 없었기에, 정말로 무엇을 찾아보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추석 연휴에 맞출 수 있으세요?"

"네?"

추석 연후에 가지 않았던 여름휴가를 붙일 수는 있다. 

회사에서 엄청 눈치를 주겠지만. 

지금 내 기분으로는.... 그 정도 눈치는 받아넘길 수 있다.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것 같은데, 지금. 


"그렇다면.... 터키 어떠세요? 마침.... 자리도 났고...."

"자리요?"
"네, 패키지여행은 자리가 금방금방 차요. 조금만 망설이면 자리가 없어요."

"아.... 패키지요...."


지금까지, 

해외여행은 모두 직접 비행기표를 끊고, 호텔을 예약하고 했다.

여행은 자유인데, 패키지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패키지는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행과 관광의 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하라고 하면 할 수도 없으면서, 

패키지는 관광이지, 여행은 아니라고 늘 말해왔다. 


지친 하루, 무작정 눈에 들어온 탓에  

여행사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패키지 상품을 파는 곳이구나.


"어떻게 하시겠어요?"

여행사 직원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와, 벽에 걸린 시계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 이 사람도 직장인일 뿐이지.

곧 18시.... 퇴근해야겠구나. 


결국,

계약금을 냈다. 

비용이 생각보다 비쌌다. 

난 그렇게 여행사 직원의 호구가 되어서, 

다른 패키지 상품보다 100만 원가량 비싸게 터키 여행을 떠나게 됐다. 


물론, 추석 연휴인 탓이겠지만.... 

그 시기 더 알아봤다면 훨씬 저렴한 상품이 많았다.

아니, 평소처럼 내가 직접 알아봤다면 더 저렴하게도 갔다 올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러기엔....

난.... 


너무 지쳐있었다. 





PS.


아.... 

휴가....


그래, 가야지.


아....

추석 연휴랑 붙여서....


그러면 10일이 넘는데?


아....

다녀와서 열심히 하겠다고?


아....

그래.... 잘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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