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화
일지를 다시 서랍에 넣고 의자에 앉자마자 환자 진한길씨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본인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뇌출혈이 오기 전까지의 위대하고 거창한 서사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수개월 째 변함없는 열정으로 얘기했다.
“반장님 안 웃깁니까? 다들 내 얘기 듣고 웃겨서 자빠지고 난리입니더.”
“네. 재밌어요.”
환자 진한길씨의 이야기가 더 길어지기 전에 여기서 대화를 끊어버려야 한다.
“아 그래요? 그러면 내 또 멈출 수가 없지. 우리 반장님이 재밌다는데. 헤헤헤.”
아이고, 미치겠다. 저번에는 재미없다 해서 얘기가 길어지길래 이번에는 순순히 재밌다고 인정한 거였는데. 뭘 해도 이미 결과는 똑같은 거였구나. 저 너구리 같은 아저씨를 어떻게 하면 병실로 빨리 올려 보낼 수 있을까? 나는 환자 진한길 씨의 얘기에 맞장구를 쳐주며 생각했다.
그때였다.
띵!
“아이참! 진한길 님! 또 여기 와 계셨네요?”
간호사 선생님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자 큰 소리로 말하며 환자 진한길 씨에게 뛰어오고는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반장님! 안녀어어어엉! 저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충성!”
나는 그의 인사를 거수경례로 받아치고는 제자리에 앉았다. 이제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되었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모니터를 열었다. 어젯 밤 감성에 취해 쓴 글을 다시 보니 오글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고치기는커녕 건질 만한게 하나도 없어서 다시 써야 했다. 이번에는 이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풀어가면서······.
“반장님 안녕하세요? 끄윽끄윽.”
아······. 또. 환자 박상길 씨다. 이 환자는 틈만 나면 웃음이 터져 나오는게 특징 중 하나인데 문제는 그 웃음이 언제 멈출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제 좀 글이 써질려고 하는데. 타이밍이 정말 예술이다. 나는 환자 진한길 씨와 환자 박상길 씨를 세트로 묶어 ‘끼리끼리 콤비’로 부른다. 두 환자가 돌아가면서 내가 글을 못 쓰게 하기 때문에 지은 별명이다.
“네. 안녕하세요. 박상길 님!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했다.
“저기요, 아저씨!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네?”
“······무슨 부탁요?”
“저기 편의점에 가면 삼각김밥이라는게 있다면서요? 나 그것 좀 사다줘요.”
저번에도 저저번에도 삼각김밥을 먹어놓고는 새삼스레 처음 알게 된 것처럼 부탁을 한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계속 부탁을 하기 위한 빌드업일까? 이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결과는 똑같은걸.
“이번이 진짜 마지막입니다. 이제는 부탁 못 들어드립니다.”
“응. 알았어요. 얼른 갖다와요! 빨리! 다리가 보이지 않게. 크크큭.”
터졌다. 웃음 폭탄! 환자 박상길 씨를 얼른 병실로 보내기 위해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들고는 재빨리 근처 편의점으로 뛰어가서 삼각김밥을 사왔다. 남은 김밥들이 종류별로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래야 한 동안 안 내려오거든.
“박상길 님! 여기 삼각김밥이랑 잔돈이요. 이제 얼른 올라가세요.”
“응. 고마워요. 젊은 총각! 이제보니 참 잘생겼네. 크크큭.”
아까는 아저씨라더니 지금은 젊은 총각? 이 할머니 사회생활 할 줄 아시네. 얼른 올려보내고 마저 글을 써야지. 안 그러면 잘 시간도 모자라다. 언제 비상상태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잠은 잘 수 있을 때 자두어야 한다. 여기 일하면서 잠이 왜 그렇게 중요한건지 알 수 있었다.
환자 박상길 씨를 무사히(?) 올려보내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 타자기를 두드린다. 오늘 제법 글이 잘 써진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주신 영감을 그대로 노트북에 옮겨 적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기분에 취해 나에게 취해(?) 쓴 글은 다음 날 아침 가차없이 백스페이스로 지워져나갔다. 언제 글을 써서 언제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손으로 입이 찢어질 듯 한 하품을 가리고는 노트북을 끄고 퇴근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