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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출근을 하니 저번에 사이비에 빠져 도망갔던 환자가 돌아왔다고 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마음 둘 곳 하나 없이 혼자 살던 할아버지는 사이비 신도들에게서 그동안 느끼지 못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없는 믿음도 만들어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도 잠깐. 할아버지가 혼자 살고 있고 털어 먹을게 없음을 알게된 신도들은 그를 냉대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만큼의 차별대우를 하고 그만큼의 봉사를 해야 한다느니 어쩌니 하며 궃은 일을 노쇠한 노인들에게도 가차 없이 시키는 쓰레기 같은 사이비였다. 할아버지는 자기 또래의 노인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말년을 이렇게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 그곳을 또 한 번 탈출(?) 했다.(그 연세에 어떻게 그렇게 치밀하고 재빠르게 탈출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엄마도 한 때 사이비에 빠진 적이 있었다. 외롭게 홀로 나를 힘들게 키우던 엄마는 자신의 얘기에 귀기울여 들어주는 그들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그곳은 정확히 기독교 ‘이단’이었다. 처음에는 기독교와 똑같이 출발한다. 끝에 가서야 제일 중요한 믿음의 대상이 다르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이단은 교회 목사님을 믿어야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몇 년을 있었던 엄마는 결국 돈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벌이가 들쑥날쑥이었는데 몸이 아파서 장사를 쉬는 날이 점점 많아졌고 결국에는 생활비만 겨우 유지했기에 헌금을 많이 할 수가 없었다. 아까 그 할아버지처럼 똑같이 차별대우가 생기고 점점 심해졌다. 엄마는 그런 것에 예민했기에 신도들에게 성경책을 들이밀며 따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모른체 했다.
더 이상 엄마의 말을 듣지 않거나 귓등으로 들었다. 또 다시 마음 둘 곳 없는 엄마는 혼자가 되었다. 여기 있을 이유가 없기에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들도 엄마를 찾아오거나 붙잡지 않았다. 돈이 없으니까 그럴 이유도 없는 것이다.
가난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난이 죄가 아니라는 말은 동의하지만 가난이 사람을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은 동의한다. 가난하면 아파서도 안 된다. 질병은 가난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촉진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힘겹게 벌어서 겨우 하루 먹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질병은 끔찍한 재앙이기도 하다. 가난한데 질병이 오래가거나 희귀한 병은 결국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 평생에 고통과 아픔을 마음에 각인 시킨다. 가난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죽게 만든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한 사람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온전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한 채 구멍난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처럼 살아가다 끝이 난다.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 건 아니지만 돈이 좀 더 많았다면 지금보다 덜 불행했을 것이다. 엄마의 죽음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좀 더 편안하게 마지막 여생을 보냈을 수도 있다. 돈을 미친 듯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돈이 없는 건 정말 죽을 만큼 싫다. 이 구질구질한 인생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 할아버지는 간호사와 간병사들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했다. 할아버지에게는 요양병원이 집이었다. 즉 다시 돌아올 곳이 이곳밖에 없다는 얘기다.
나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무겁고 진지한 생각을 했더니 머리에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정문을 열고 나가 찬 바람을 쐬었다. 아무런 생각없이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으니 기분이 좋았다. 온전히 내 감각에 집중을 할 때 내 몸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잠깐의 여유가 나를 숨 쉴 수 있게 만든다. 오늘따라 내 머릿속에 나오는 문장들이 꽤 멋있게 느껴진다. 글을 이렇게 쓰면 얼마나 좋을까. 역시 인생은 뜻대로 되는 게 없다.
띠리링. 띠리링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 화면을 보니 고깃집 친구였다. 웬만해서는 선뜻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친구다. 그런데 이렇게 전화를 건걸 보니 무슨 일이 있는게 틀림없다. 목소리를 가다듬도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어쩐일이냐?”
“야···우리 고기집 망했다 씨발. 어떡하냐.”
친구는 고기를 더 많이 팔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다며 계획대로만 되면 여기저기서 투자를 받아 크게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했다. 그게 불과 한 달전이었던 거 같은데 이렇게 전화가 오다니. 역시 인생은 뜻대로 되는 게 없다.
퇴근 날이 마침 주말이라 고깃집 친구와 불알친구를 불러 저번에 갔던 하이볼 술집에 갔다. 우리는 한동안 말 없이 술만 들이켰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술기운을 빌려야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술기운이 올라온 걸까? 고깃집 친구가 말문을 열었다.
“씨발······나 좆 됐다. 좆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