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희진이의 할아버지는 허리가 많아 나아지셨다고 한다. 또 허리를 다칠까봐 공사판은 가지 않고 노인분들이 재취업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에 참가해 교육을 받고 계셨다. 이제 희진이의 집에 갈 이유가 없어졌다. 희진이는 일이 마치면 운동장에서 잠깐 보자고 했다.
“왜 보자고 했어 희진아?”
“쌤 혹시 달리기 잘하세요?”
“어? 갑자기 웬 달리기?”
희진이는 한 중학교에서 육상부로 스카웃을 받았다고 했다. 평소에 외롭거나 울적할 때마다 달렸던게 전부였는데 스카웃을 받아서 처음엔 얼떨떨 했지만 지금은 기분이 날라갈 것 같다고 그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띄었다. 희진이를 보고 있자니 〈달려라 하니〉가 떠올랐다. 어릴 적 수십 번 봤던 나의 최애 만화.
“희진아. 우리 달리기 시합 한 번 할까.”
“네.”
희진이가 빠른 걸까. 아니면 내가 살이 너무 찌고 운동을 안 해서 그런걸까. 달리기 시합에서 졌다. 아직 초딩은 이길 줄 알았는데. 만약 할머니가 이 광경을 봤더라면 밥은 왜 처먹냐고 한 소리 들었을 것이다.
“이제 나를 홍두깨 쌤이라 불러라 알겠지? 오호호홍.”
“쌤 이름 홍두깨에요?”
“아니, 너 만화 〈달려라 하니〉 모르니?”
“그게 뭐에요?”
“······.”
언제적 만화를 가지고 요즘 애들한테 물어보다니 나도 이제 옛날 사람에 합류구나.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희진이는 달리고 또 달렸다. 같이 달리고 싶었지만 더 뛰었다간 토할 것 같아서 참았다. 지칠 기미가 보이지 않던 희진이는 뛰다가 운동장 모래 바닥에 털썩 하고 누웠다.
“너 오랫동안 지치지도 않고 빨리 잘 뛰네······어?”
희진이는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희진이 옆에 같이 누웠다. 밤하늘에 별들이 선명하게 빛났다. 이렇게 밤하늘을 오랫동안 쳐다본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이렇게 운동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건 초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니까 20년도 더 되지 않을까. 나도 나이를 징그럽게도 많이 먹었구나 하고 생각이 들 때 희진이가 말했다.
“쌤.”
“그래, 희진아.”
“쌤······.”
“그래.”
“······쌤.”
“······그래.”
희진이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스카웃이 되어서 기쁘기도 하지만 앞으로 할아버지와 동생들도 돌봐야 하는 앞날이 걱정도 되고 불안도 할 것이다. 여러 감정들이 복잡하게 섞여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헝언 할 수 없는 이 순간을 나는 알 것 같았다.
“희진아 슬프거나 기쁜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우린 이제 친구니까.”
“정말요? 우와 친구 생겼다 히히히. 그럼 친구니까 말 놔도 되죠?”
“응, 아니야.”
“칫, 네에······.”
희진이와 나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하도 웃어서 방귀가 나올 뻔 한걸 겨우 참았다. 아마 이 날을 희진이와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가 된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