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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 Feb 28. 2024

별처럼 빛나는 눈송이가 누군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팀 버튼의 '가위손', 그리고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일에 대하여

주황빛 가로등 불빛에 흩날리는 눈을 보며 가위손으로 얼음을 조각하는 에드워드가 떠올랐다. 겨울 밤 가로등 아래. 사다리에 올라간 에드워드가 얼음으로 자기보다 몸집이 큰 투명한 천사를 조각하는 동안 그 아래서 눈송이를 맞으며 흰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킴. 팀 버튼의 영화 ‘가위손’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이다. 하지만 그 날, 그러니까 어떤 강좌를 듣기 위해 신촌 거리를 걸으며 그 마법 같은 장면을 떠올리면서도 마음 한 편이 불편했던 건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지영(가명)씨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로등에 반사돼 별처럼 빛나는 눈송이가 누군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겠다고 느껴져 문득 마음이 복잡했다.

 ‘눈이 더 내리면 오기 힘들 텐데...’


 20년도 훌쩍 지나 신촌의 어떤 강의실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지영 씨는 소위 뇌병변장애인이다. 이는 보통의 사람처럼 쉽게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신체를 통제하는 게 어렵다는 의미다. 지영 씨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카카오톡을 빨리 확인하기 어렵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들어 어떤 메시지를 확인하는 그 평범한 동작에 지영 씨가 어느 만큼의 시간과 힘을 그러모아야 하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낮에 보낸 메시지에 일과를 끝낸 밤에야 답신하는 그녀를 보며 내겐 너무 단순한 그 행위를 위해 그녀가 얼마나 ‘애’를 써야하는지 가늠만 해볼 뿐이다. 강의 후 그간 몰랐던 서로의 소식을 업데이트 하며 지하철에서 수다를 떠는 중에도 ‘말하기’ 위한 지영 씨의 ‘큰 애씀’은 듣기 위한 나의 ‘작은 애씀’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동과 말하기 자체가 ‘고역’인 삶의 무게. 40년 이상 그 무게를 지고 산 지영 씨의 마음 이면에 자리한 슬픔이 유독 크게 느껴진 건, 노화로 인한 ‘장애’를 일상에서 체감하는 내가 이제야 그녀의 슬픔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서일까.


 “나이가 들수록 슬픔이란 감정이 유난히 커지는 것 같아요. 자꾸 슬퍼.”

 “맞아요, 맞아요. 요즘 자꾸 눈물이 나요. 미치겠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러. 사소한 거에 감동하고.”

 “이것도 노화증센가...”

 눈 내리던 풍경과 장애가 있는 지영 씨와의 대화를 계속 생각하다 1991년에 개봉한 ‘가위손’을 다시 봤다. 자신을 만든 박사의 죽음으로 평범한 두 손을 갖지 못한 에드워드. 그가 가위손으로 마을 정원과 여자들의 머리를 아무리 멋지게 매만져도, 그의 내면이 아무리 순수하고 아름다워도 그는 결국 다시 외톨이가 된다. 

 “조이스를 겁탈하려고 했대요. 도망친 게 기적이라더군요.”

 에드워드를 좋아하던 조이스가 퍼뜨린 거짓 소문을 사람들이 그리 쉽게 믿지만 않았다면, 뭣보다 다른 사람과 달라 느끼는 소외감과 슬픔에 조금만 공감할 수 있었다면 에드워드를 향한 오해와 폭력이 설 자리가 없었을 텐데. 아쉬웠다. 낯선 존재의 슬픔을 볼 수 있는 눈. 거의 30년 만에 다시 본 영화 가위손은 낯선 타인과 공존하는 ‘좋은 삶’에는 그런 눈이 필요하다는 걸 내게 분명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며 나 자신이 슬픔을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산 날보다 살날이 짧아진 엄마의 굽어가는 등을 보는 일, 한 걸음 떼기가 어려워진 시아버지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서 평생을 성실하게 일만 하던 그의 지난한 삶을 헤아려 보는 일, 먼저 간 남편을 추억하는 친구와 대화를 하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우리의 노화를 마주하는 일은 슬프고 때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허전한 맘을 달래려 아무리 책을 읽어도 삶은 쓸쓸하기만 하고 가족과 친구가 있어도 슬픔을 나눌 이 없어 외롭다는 생각이 종종 들던 참에 지영 씨를 다시 만났다. 그래서 그런가. 지금의 나는 타인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에드워드의 다름에도 그를 가족으로 끌어안고자 했던 킴의 엄마 펙 같은 사람들 말이다. 집에 가다 지하철 틈새에 낀 지영 씨를 보자마자 300kg에 육박하는 휠체어 뒷바퀴를 기꺼이 같이 들어주던 사람들. 자신의 전동휠체어가 들어가지 못하는 걸 알고 자기는 안가도 되니 가서 뒤풀이를 하라고 말하던 지영 씨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다른 장소를 물색해보자고 따뜻하게 말해주는 사람들. 장애인을 그저 ‘장애인’으로 대상화하며 ‘외형적 다름’에 무게를 두기보다 자신의 손을 기꺼이 내어주며 다른 존재와 공생하려는 이들은 적어도 타인의 슬픔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으며 ‘덜 외로운 좋은 삶’을 살고 있으리라.


 얼마 전 지영 씨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지영 씨가 다른 사람보다 더 안간힘을 쓰며 찾아간 어떤 글쓰기 강좌 강사가 첫 시간이면 의례 하는 자기소개 타임에 지영 씨 차례가 되자 한 말이다. 

“이따 따로 자기소개 한 글 적어서 내 책상에 올려놔요. 근데 한글은 알아요?”

신형철은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위 강사는 지영 씨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며 그를 포용하는 일은 때로 불편할 수 있다. 에드워드 곁에 머물면 본의 아니게 그의 가위손에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지영 씨와 밥을 먹으려면 전동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아봐야 하며 지영 씨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식당에서 파는 메뉴만 먹을 수 있는 지영 씨, 힘들게 말하고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해 같은 말을 다시 힘들여 반복해야 하는 지영 씨가 느끼는 불편의 크기 앞에서 내가 느끼는 불편을 이야기 하는 건 어쩐지 머쓱하다. 게다 단편적인 정보로 타인을 판가름하며 내뱉는 글쓰기 강사의 무례한 말은 폭력을 넘어 ‘좋은 삶’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결국 나의 슬픔이 타인의 슬픔을 곁눈질 하게 한 꼴이지만, 20년 전 지영 씨의 슬픔에 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눈이 있었다면 지금 내 주변엔 슬플 때 손 내밀 다정한 지인이 더 많지 않았을까. 혹은 적어도 낯선 타인이 만든 아름다운 삶의 흔적을 보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지 않았을까. 마을 사람들이 에드워드와 함께 했으면 계속 즐길 수도 있었을 아름답게 가꾼 정원, 투명한 얼음을 조각하며 흩뿌리는 빛나는 눈송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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