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2 딸이 느닷없이 반의 어떤 아이에 대해 말했다. 무슨 장애인지는 모르지만 틱 장애도 있어 이따금 머리를 흔든다고 했다. 그 아이는 장애가 있어서 모둠활동에서 배제된다고 했다. 드문드문 학교에 가는 딸이지만 본인은 그런 경험이 없는 아이는 장애가 있는 아이가 모둠에서 배제되는 것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럼 그 애는 모둠활동 시간에 뭐 해?”라고 물으니 무심히 모른다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나 역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전에는 그 아이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소외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벌써 15년도 넘은 일이지만 하루 지나도 까먹는 일이 비일비재한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지금도 생생한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아직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는 일들.
시간을 15년쯤 거슬러 목동의 어느 중학교에 뇌수종을 앓고 있는 진수(가명)가 입학했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진수는 체구가 작았는데, 뇌수종으로 작은 몸집에 비해 머리가 유난히 커 보였다. 당시만 해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대부분 장애인을 대놓고 무시했고 특히 외모가 남다르면 놀림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진수는 교사의 눈을 피해 호시탐탐 진수를 놀리는 남학생들의 희생양이 되었다. 반 남학생 거의가 1학기 내내 진수를 괴롭혔고 2학기 가을, 그 반 여학생의 밀고로 괴롭힘의 진상이 드러났다. 커튼으로 상체를 말고 겁먹은 아이를 둘러싸고 때리기, 화장실에서 바지 내리고 성희롱하기, 지나다니면서 발로 차고 손으로 가격하기 등. 이제 중1 남학생들의 집단 괴롭힘은 진수의 몸에 수시로 멍을 남겼고 학교에 대한 두려움을 새겼다.
영진(가명)이는 진수와 같이 입학한 자폐성 남학생이었다. 진수처럼 체구가 작고 말을 하려 입을 여는 게 너무 힘든 아이였다. 진수의 일을 조사하던 중, 그 영진이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들이 면피라도 하듯 비슷한 잘못을 저지른 같은 반 다른 친구, 다른 반 다른 친구들 이름을 줄줄이 대어 당황스럽고 괴로웠다. 같은 반 남학생이 수업 시간에 영진이의 손등 한가운데를 샤프 끝으로 꾹꾹 쑤셔놓고 자신이 한 짓이라고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는 사실에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자기 교실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진수와 영진이를 으르고 달래며 교실에 밀어 넣은 그간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서.
진수와 영진이를 괴롭힌 아이들이 적어도 학교의 규정대로 처벌을 받았다면 이 일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을 부유하며 가끔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진수와 영진이를 괴롭힌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학교의 관리자와 가해학생들의 부모는 아이들의 생기부에 아무런 흠결을 남기지 않기 위해 팀플레이를 하며 결속을 다졌다. 학교의 처벌규정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했는지 외고나 과고, 혹은 유학을 준비하는 아이들의 생기부에 약자를 괴롭혔다는 내용이 포함되면 불리할 수도 있을 거라는 우려와 장애가 있는 아이보다 소위 공부 잘하는 애의 존재가치가 훨씬 중요하다는 인식 앞에선, 무용했다.
무관심과 배제에 흔하게 노출되는 이런 사람들을 묶어 투명인간으로 묘사한 그림책이 있다.
Tom Percival의 <The Invisible>.
A family drove past in a shiny car, but they looked straight through Isabel,
as though she was even there.(한 가족이 빛나는 차를 타고 지나갔어. 하지만 그들은 이사벨을 못 본 척했지. 마치 이사벨이 거기 없는 것처럼 말이야.)
Isabel looked down and realized that she could barely see her own hands... or her feet. ( 이사벨은 아래를 보며 자기 손... 발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
Before long, Isabel was completely invisible. She drifted silently down the streets, as pale and thin as the wind. And nobody saw her at all.
(오래지 않아, 이사벨은 완전히 보이지 않았어. 이사벨은 조용히 거리를 떠돌았지. 바람처럼 창백하고 가냘팠어. 아무도 이사벨을 보지 못했어.)
분명 존재하되 가벼이 간과되는 사람들을 투명인간에 묘사한 작가의 통찰력은 슬프면서 적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일 년 담임을 했으면서 장애가 있는 아이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사람들, 단 한 번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학급 단체 활동, 모둠활동에 참여시킨 적이 없는 사람들, 장애가 있는 사람은 아예 다른 부류로 묶어 365일 낯설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 장애아들이 ‘보이지’ 않는 존재로 변해가는 걸 숱하게 봤다.
<The Invisible>의 작가는 책 말미에 기록된 작가 노트에서 세상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You don’t belong here(당신은 여기 속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데 맞서 Yes, you Do belong(당신은 분명 속해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가난했던 작가 눈엔 다른 사람들보다 소외된 사람들이 유독 눈에 띄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장애인에 대한 무시와 차별을 거의 매일 캐치하는 능력이 생겼다. 시간이 흘러도 공기처럼 존재하는 투명인간 취급. 가끔 궁금하다. 인간이 인간을 배제시키며 얻는 득이 뭐가 있을까. 어디서건 차별을 경험해 본 사람은 정상이란 개념이 얼마나 편파적이며 폭력적인지 단박에 알 것이다. 경험해 본 바, 인간은 서로 다르면서도 아주 비슷하다.
살면서 한 번도 투명인간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건 거의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투명인간이 되지 않게 늘 경계해야 한다고, <The Invisible>은 조금 슬프지만, 결국엔 나름의 희망을 찾으며 넌지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