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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 Feb 29. 2024

오색찬란한 공감과 위로

-플립이 소환한 나의 나무에게.

 아름다운 영화라고 들었지만 그다지 끌리는 영화는 아니었다. 초록창을 검색해보니 평점 9.11. 줄거리를 대략 살펴보니 7살 줄리가 이사 온 브라이스를 좋아하다가 상황이 ‘뒤집힌’ 이야기. 영화 원제가 그래서 Flipped’였구나. 줄거리와 제목을 보니 이미 영화를 다 본 기분이다. 뻔한 성장영화라는 생각에 다른 영화를 볼까 잠시 망설였다. 촘촘한 시간 관리에 목숨 거는 나라는 인간은 지 버릇 개 못 주고 시간, 가성비 뭐 그딴 걸 계산하다가...관뒀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마침 스터디 모임도 취소된 터라 일찌감치 일어나 영화를 봤다. 

 엇. 나처럼 나무를 사랑한 소녀가 정말 나오는구나. 스쿨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에 올라 공기를 가르는 그 청량한 바람을 ‘알아버린’ 줄리가 나무 위에서 느끼는 그 초록의 행복감은 어릴 적 내가 사랑했던 느티나무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는 친구가 없었다. 당시 왕따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아마도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종일 한마디 말없이 앉아있다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던 길. 우연히 고개를 든 순간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였다. 그때 왜 그런 소리가 들렸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나무가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그저 솨-하며 나무가 불러주는 노래를 들었고, 그 나무가 마치 나를 안아주며 토닥여주는 것만 같았다. 존재와 존재가 빈틈없이 맞닿는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나무를 찾아가 나무껍질을 천천히 쓸며 대화라는 걸 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솔직한 이야기들. 

 그 행복한 시간이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 영화에서처럼 어느 날 어른들이 나무 근처에서 웅성거렸고 나무가 서 있던 땅의 주인이 그 자리에 뭔가를 짓는다며 나무를 없앤다고 들었다. 나무가 너무 커 한 번에 베지 않고 약을 써 고사시켜 없앤다고. 초록의 이파리가 누렇게 변색 되어 떨어졌다. 그 웅장하던 나무기둥과 줄기가 검게 변하며 시들었다. 그렇게 나무가 고사되는 과정을 매일 바라보며 당시의 나는 나무와 함께한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추억 위에 인간에 대한 실망과 경멸의 씨앗을 심어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아직도 과거의 그 시간 언저리를 맴돌며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어린 내가 이 영화의 한 장면으로 소환되어 위로를 받을 줄 몰랐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다. 줄리 아빠는 베인 나무에 실망하고 화가 난 줄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냥 나무가 아니었어. 네가 그 나무 위에서 느꼈던 감정을 절대 잊지 않길 바라.” 

특별한 말이 아니다, 소중한 걸 상실한 아이에게 공감해 주는 말. 나는 줄리 아빠의 그 말을 줄리와 함께 들었고, 줄리처럼 그 나무에게서 “나무 이상의 것을 보았고 그 나무 위에서 느꼈던 것이 진정 어떤 의미였는지” 되새기며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행복에 공감과 위로만큼 중요한 요소가 있을까. 같은 영화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부분을 건드리게 마련이다. 장애와 인연이 있다면 플립에 등장하는 줄리의 삼촌에게 집중할 것이고, 꿈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는 과정에서 비뚤어진 사람이라면 브라이언의 아빠에게 집중할 거다. 가난한 예술가라면 줄리의 쌍둥이 오빠가 애잔할 거다.  

 “밋밋한 사람도 있고 반짝이는 사람도 있고 빛나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가끔씩은 오색찬란한 사람을 만나. 그럴 땐 어떤 것과도 비교 못해.” 브라이언의 할아버지 말에 고이 간직한 보석 같은 연인을 소환하며 미소 짓는 사람도 있을 거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성장영화로 보일 수 있는 영화 플립이 높은 평점을 얻으며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이유는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결핍감’에 공감하며 위로의 말을 건네기 때문이 아닐까. 

 

러닝타임 고작 90분. 영화로 다시 만난 그 오색찬란했던 느티나무.


고마웠어. 내가 사랑하던 나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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