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산책과 스틸라이프

by 지희

퇴근 후 부랴부랴 된장찌개를 끓이고 가지를 무쳤다. 딸은 집밥을 제외한 피자, 떡볶이, 불닭면으로 연명하는 아이라 남편 저녁만 준비하는 데 비 쏟아지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쏴-. 이상하게도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 퍼부어대는 빗속을 갑자기 걷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요즘 정서 상태가 그렇다. 불안정하고 가끔 화가 솟구치다 냉정을 되찾기. 대략 그런 상태가 반복되는 것 같다.

고무 밑창이 제법 두터운 슬리퍼를 신고 딸 방 창에 걸린 투명 비닐우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무작정 빗속을 헤집고 나서고야 말았다. 9시 넘어 출발할 거란 남편 문자를 받고 이참에 그간 못하던 산책이나 실컷 하자 싶었다. 무섭게 쏟아지는 빗속을 걷는데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우산으로 피해질 비가 아니라 몸 여기저기가 푹 젖는데, 어차피 피하지 못할 비, 될 대로 되라지 싶었다. 그렇게 걷는데 영화 스틸라이프가 떠올랐다.

요즘 명리공부를 한다. 나한테 왜 이런 일들이 생기지? 정말 팔자라는 게 있나?... 몇 년째 그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답답한 마음에 점을 보면 애한테 귀신이 붙어서 학교도 안 가고 자살하려고 한다고 했고, 철학관에 가면 엄마인 내가 문제라고 했다. 어떤 점술가는 남편 집안에 억울하게 죽은 여자가 있다고도 했다. 대학도 나오고 책도 적잖이 읽으며 어느덧 중년에 이른 나이인데, 남편이 말 같지 않은 소리 한다고 화를 그렇게 내는데, 그래도 미신에서 비롯된 몇 가지 처방을 실행했다. 집 안에서 쑥을 태우고 몇 가지 음식을 부적과 함께 차려 뒀다 길가에 뿌리기도 했다. 대략 5년? 어떻게 지나갔는지 세세히 기억나지도 않는 그 시간들은 남편과 나, 그리고 딸아이의 가슴속 어딘가에 상처가 되었을 거다.

그런저런 사정으로 나는 직접 명리 공부를 시작했다. 철학관마다 같은 팔자를 두고 해석이 다른 이유가 궁금해 책 몇 권 읽어보니 공부를 깊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공부하는 시간과 비례에 들쑥날쑥한 마음의 진폭이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하니, 내겐 도움이 되는 공부다. 아무튼 명리 강좌 과제 중 하나가 스틸라이프 영화 감상. 한국어로 ‘존 메이씨와 함께 하는 특별한 장례식’이라는 부제가 붙은 영화다. 빗속을 걷는 데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는 제목처럼 정지된 듯한 장면이 연속되었다. 오밤중에 침대에 누워 반쯤 감긴 눈으로 영화를 보다 눈물이 폭우처럼 흘렀다. 왜 그랬을까.

느릿느릿 전개되는 영화는 아주 적막하고 쓸쓸한 풍경화를 오래도록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고독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고독하게 처리해 주는 구청 공무원 메이. 필경사 바틀비나 멘체스터 바이더 씨의 ‘리’와 닮았다. 존재 자체가 슬픔과 고독인 사람들. 명리 공부를 해서 그런가. 저런 인물들은 왜 그리 저린 삶을 살까 궁금하고 야속했다. 몇 줄 평으로 요약할 수 없는 메이의 표정과 몸동작, 배우의 연기와 작가의 사유가 만들어낸 역작.

사람들은 살아가며 뭔가 잘못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때론 그 상처의 깊이가 너무 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채 홀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상처를 주고야 만 속사정은 끝내 표현되지 못한 채. 고인이 남긴 단서로 고인의 지인을 찾아 조문을 권유하고 고인의 생을 반영한 추도사를 손수 정성스레 마련하여 장례를 치러주던 메이.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긴 그는 참 보기 드문 사람이다.

인생은 참 무정하고 야속하다. 홀로, 묵묵히 고인에게 정성껏 장례를 마련해 주던 메이에게 좋은 친구가 생길 수도 있을 찰나, 메이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길바닥에 누워있는 메이의 시선과 표정을 보다 엉엉 울고 말았다. 신은 왜 이제 막 찾아올지 모를 생의 선물도 빼앗아 가는가. 흔한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 두렵고 때론 마음이 저린다. 우중산책을 하고야 말았던 이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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