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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 Mar 02. 2024

J에게

-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을 보고

귀경길. 고속도로 정체를 피하려 밤 11시 30분에 시댁에서 나와 밤길 운전하는 남편 옆에서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미리 고백하자면 자의로 영화를 본 건 아니에요. 올 초엔 유난히 묵은해, 아니 지난 내 삶을 돌아봐야 2024년을 힘차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충동적으로 어떤 강좌를 신청했는데, 영화 네 편 중 한 편을 보고 에세이를 쓰라는 과제가 주어졌어요. 명절엔 늘 그렇듯 쓸 데 없이 소모적이라 느껴지는 ‘며느리일’을 반복하면서도 무얼 봐야 감동적일까 계속 고민해봤는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당장 쉽게 볼 수 있는 영화의 재생버튼을 누르게 되었어요. 삶은 정말 한치 앞을 모른다더니. 졸지 않으려 진한 아메리카노를 두 잔이나 마시면서도 꾸벅 꾸벅 졸며 본 영화가 끝내 당신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쓰게 만들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내 기억 속에 당신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대략 20년 전에 보았던 당신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인지는 전혀 모르겠네요. 그래도 혹시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한번쯤 보길 권해요. 어쩐지 당신은 나와 달리 러닝타임 173분이나 되면서 잔잔하기만 한 이 영화를 맑은 정신으로 ‘품위’를 지키며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영화를 보면 다소 쓸쓸해 보이는 NJ가 그저 돈만 좇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오타 씨는 좋은 사람이야. 품위를 좀 지켜.”

당신 역시 오타 씨처럼 좋은 사람이었어요. 품위 있는 사람이었죠. 당시 내가 당신에게 그런 표현을 한 적은 없지만.


 당신도 알았지만 당신을 처음 만난 20년 전. 나는 이미 지금의 남편과 만나고 있었어요. 당시에 남편은 참 착한 사람이었죠. 연애한지 4, 5년 됐을 때 난소암 판정을 받은 적이 있어요. 의사는 검사 수치를 운운하며 자궁은 물론 전이된 장기를 다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며 종교를 가지라고 했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어요. 이런 저런 예후를 찾아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남자친구였던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런데 남자친구는 완치판정 받으면 그 때 다시 이야기 하라고 잘라 말하더군요. 다행히 오진이었고 유착이 심한 혹을 떼느라 난소 하나를 제거한 나는 남자친구와 만남을 이어가며 결혼은 ‘이 사람’과 한다는 결심을 굳혔어요. 좋은 친구 같은 사람이었죠. 그렇게 2년쯤 흘렀을까요? 직장에서 당신을 만났어요. 첫눈에 알아봤죠. 당신은 나와 영혼이 참 닮았다는 걸. 같은 색, 같은 하늘, 같은 작가를 좋아했고 무엇보다 당신과 있으면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설렜어요. 같이 있기만 해도 사람을 포근히 안아주는 느낌, 많은 사람과 함께 있어도 당신과 나만 있는 느낌. 그런 느낌에 하루하루가 따뜻했죠. 영화를 보면 NJ가 연인이었던 셰리에게 다 똑같은 교복을 입었는데 참 이상하게도 당신만 모든 면에서 특별해 보였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딱, 당신이 떠오르더군요. 둘 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고 더구나 이미 서로에게 오랜 연인이 있었던 터라 당신에게 당시 느낀 감정을 전하지는 못했어요. 회식이 끝나고 같이 택시를 기다려준다며 30센티미터쯤 떨어져 쭈뼛쭈뼛 발만 쳐다보던 당신 기억이 나네요. 몇 차례 마음을 전할 기회가 더 있었던 것 같아요. 끝내 둘 다 침묵했지만 말이에요.


 1년 반쯤 남편에 대한 의리와 당신에 대한 설렘을 저울질 했어요. 늘 의리 쪽 추가 기울었죠.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이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같이 가자고 하더군요.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이었죠. 아마 거절하는 목소리가 되게 차가웠을 거예요.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당신은 가고 나는 몇 년 후 결혼을 했어요. 생기지 않는 아이 문제로 시댁 눈치를 보며 당신 생각을 했어요. 당신이라면 자궁 혹 제거 수술을 한 적 있는 아내가 아이가 생기지 않아 불안한데 임신한 동서에게 한약을 지어주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열나는 아이를 안고 다급하게 병원에 갈 때마다 전화를 받지 않는 남편에게 욕을 퍼 부으며 당신을 생각했어요. 당신이라면 일보다 아이와 내가 우선이었을 텐데. 내가 전화하자마자 열 일 제치고 내 전화부터 받았을 텐데. 그 무엇보다 NJ처럼 언제고 “괜찮아, 내가 아니면 누가 당신을 이해하겠어.”라고 내가 힘들 때마다 위로해주었을 텐데. 영화 속 셰리가 NJ를 생각한 것처럼 매일 당신을 떠올리진 않았지만 남편에 대한 화가 복받칠 때면, 어김없이 추억 속 당신과 현실의 남편을 비교하며 당신을 따라가지 않은 나를 원망하곤 했어요. 그렇게 나는 당신을 이렇게나 오래 붙들어 두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에게 이제 그만 이별을 고하려고 해요. NJ가 결혼 전 사랑했던 셰리에게 다른 사람은 사랑한 적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보며 순간 멈칫, 했어요. 어쩌면 나는 당신과의 시간, 혹은 선택하지 못한 과거의 어느 순간에 머물며 여전히 백일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스멀거렸어요. 결코 손에 닿지 못할 무지개를 따라다니며 내가 딛고 사는 현실의 소소한 행복, 곁에 있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못 본 채 말이에요. NJ의 아내 민민이 떠났다 돌아와 “사실 여기서 지내는 거랑 별로 다르지 않더라.”라고 하니 NJ가 대답해요.

 “내가 깨달은 건 사는 게 별로 복잡하지 않다는 거야. 전엔 왜 그렇게 복잡해보였을까? 당신이 떠나있는 동안 내 청춘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어. 처음엔 이제부턴 모든 게 달라지겠구나 싶었지. 그런데 결국 똑같더군. 별로 다를 게 없었어. 불현 듯 깨달았지. 내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똑같을 거 같아.”

 나는 이제 정말 알 것 같아요. 여기나 거기나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당신을 선택했어도 내 삶은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걸. 다시 돌아가도 지금 내 남편, 내 삶을 선택했을 거라는 걸. 이 영화를 보다보면 유난히 자주 들어오는 한자가 있어요. 기쁠 희(喜)를 연이어 쓴 쌍 희(喜喜). 언제든 기쁜 날이면 중국에서 많이 쓰는 글자라고 해요. 당신에게 이별을 고하며 당신과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쌍 희 자를 봄바람에 실어 보냅니다. 영화 속 꼬맹이 양양은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사람들이 모르는 걸 알려주고 볼 수 없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하죠. 이제 내가 보지 못한 게 뭔지, 몰랐던 게 뭔지 알았으니 나와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갈 일상에도 쌍 희 자를 새긴 등이 두둥실 날아오르며 길을 밝혀 주리라 믿어요.

 당신도 나처럼 당신 삶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끌어안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H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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