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희 Mar 02. 2024

마돌 2

-엄마, 미안해요.

 아홉 식구. 한 지붕에 산 우리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 엄마의 희생을 발판으로 이어진 가족 공동체. 내가 서울에서 만난 아이들이 사는 아파트나 양옥과 달리 우리 집은 구태여 따지면 한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북촌에 있는 고풍스런 한옥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지금도 지방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게 되는 낡은 농가에 더 가깝던 집. 하지만 엄마의 바지런한 손길로 늘 정갈하게 윤이 나던 공간. 그 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곳은 집 뒷마당이었다. 꽃을 좋아하던 엄마가 가꾼 뒷마당엔 진분홍 작약, 빨간 장미가 진한 향을 내뿜었고 이름 모를 난초, 제비꽃, 민들레 사이를 나비가 날아다녔다. 엄마 손을 탄 장독항아리는 유난히 반질반질 했는데, 밤이면  항아리들 뒤 낮은 담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를 보며 도시생활을 동경하곤 했다. 화가 나거나 속상할 때 북적거리는 가족의 눈을 피해 가 있곤 하던 그 장소. 어둔 밤이면 까만 하늘을 가득 채운 총총한 별을 보고 노란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던 곳. 지금도 산책길에 꽃나무를 유심히 보며 그 아이들의 이름을 알려주는 엄마를 떠올리니 당시 고단한 엄마 맘을 어루만져주는 풀과 나무 덕에 엄마가 그 세월을 견딜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이 든다. 많이는 아니지만 뒤꼍에서 눈물을 훔치는 엄마의 뒷모습도 본 듯하다.


 딸로 태어난 장녀가 촌로에게 환영받지 못한 이야기가 널린 시절이다. 우리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지금은 여자로 태어난 나만 빼고 여섯 살 차이 나는 남동생에게만 요구르트를 주던 모습을 웃으며 회상한다. 하지만 당시 심기가 불편해 할아버지와 같이 밥을 먹지 않는 날이 종종 있었다. 찌개와 국이 없다고 엄마 앞에서 상을 뒤엎던 할아버지가 말년에 컥컥대며 뱉어놓은 분비물을 치우는 것도 엄마 몫. 할아버지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릴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나는 결국, 십 수 년 같이 산 손녀가 할아버지 영정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는 핀잔을 들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도 그리 따뜻하진 않다. 부모 없이 자라 탐탁치 못한 며느리에게 대식구 살림을 전적으로 양도한 할머니에 대한 살가운 기억보단 분주한 엄마와 선명히 대비된 모습, 그러니까 회색 스웨터를 입고 태연히 담배를 태우던 모습, 늘 가만 가만 먼 곳을 응시하던 모습, 생을 마치기 전 몇 년 정도 엄마가 대소변을 받아낼 만큼 기운 없는 몸이 계속 움츠러들다 곧 사그라질 듯 병색이 완연한 모습. 그게 다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게 요구르트를 건넨 적이 있다. 아들 손주만 주던 게 갑자기 미안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때 감사하다고 넙죽 받아 마시지 못한 게 지금까지 마음에 걸린다.


 사교적이지 못해 엄마한테도 속마음을 말하지 못한 나와 달리 동생은 우리 집 살림밑천 노릇을 톡톡히 했다. 봄이면 쑥이며 냉이를 한 소쿠리 캐와 엄마의 반찬 걱정을 덜어줬고 날이 더워지면 30분쯤 걸리는 도랑에 가 종일 진흙을 헤집으며 미꾸라지를 한가득 잡아와 식구들 몸보신을 시켰다. 하루는 개구리를 잔뜩 잡아와 앞마당에서 구워먹겠다고 열심히 개구리 다리를 잡아 뽑아 나를 경악케 하기도 했지만 엄마를 닮아 눈도 크고 예뻤던 동생은 모난 나와 달리 성격도 둥글어 동네 노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여아로 태어났음에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역시 동생을 좋아했다.


 얼마 전 동생이 할머니~부르며 달려가면 할머니가 환하게 웃었다는 얘기를 해줬다. 내게는 없는 기억이다. 같은 집에서 같은 사람들과 자랐어도 우리가 본 풍경은 이렇게나 사뭇 달랐다. 둘이 엉겨 싸우다가 엄마한테 매를 맞은 적도 많다. 엄마는 가끔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옛날엔 몸이 너무 고단해 사소한 일로도 너희들을 때려줬다고. 억울한 일이 아예 없진 않다. 매일 따라다니던 동생을 떼어놓았다고 몸에 멍이 들 정도로 맞은 적이 있다. 잠든 척 누워 있는데 엄마가 안티푸라민을 발라줬다. 엄마의 손길도 외면하며 억울하고 원통해서 동생도 엄마도 보기 싫다고 속으로 씩씩거렸지만 지금은 안다. 누군가 툭 던진 말에 참던 눈물이 터지듯 임계점에 닿은 엄마의 고단함이 하필 동생의 고자질로 터져버린 거라는 걸.


 첫째도 딸, 둘째도 딸. 부모 없이 자랐다는 괄시에 딸만 연달아 낳은 엄마의 면을 세워준 건 나랑 여섯 살 차이나 나는 남동생이었다. 없는 집 귀공자는 조부모가 누나들 모르게 챙겨준 알사탕과 요구르트를 받아먹으며 얼굴이 뽀얗게 피었다. 어느 날  장독대에 앉아 서쪽 하늘을 물들인 노을을 바라보며 “누나 노을이 너무 아름다워.”라고 말하던 남동생은 안방 한 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선데이 서울을 몰래보다 걸려 등짝을 얻어맞기도 했다. 늘 심각한 큰 누나와 깨 방정 작은 누나에게 구박도 많이 받았겠지만 아들 귀한 집에서 어른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덕에 동생도 착하게 자란 편이다.


 거의 일이 없던 아빠, 손 하나 까딱 않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각 자 일에 바빠  빨래거리, 설거지거리만 만들던 삼촌들에 고모까지 팍팍하기만 한 시집살이에도 엄마는 뒷마당을 예쁘게 가꿨고 고봉밥을 먹던 우리 삼남매가 엄마 눈치를 본 기억은 없다. 쉬는 날 하루 없이 일해도 떨어진 쌀을 사기 위해 동네 여기 저기 돈을 꾸러 다녀야 했던 엄마. 비워가는 쌀독에 비례해 느는 한숨과 걱정은 늘 엄마만의 전유물이었고, 장녀인  사춘기가 되며 엄마 삶의 무게를 점차 외면했다.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는 벼가 계절에 따라 색을 바꾸며 황금빛을 더해가도, 서린 내린 가을 아침 고상하게 핀 국화가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누렇게 익은 콩깍지를 보며 미소를 지으면서도 난 늘 도시를 꿈꿨고, 엄마에겐 미안했지만 가난한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엄마는 아빠 같은 사람이랑 대체 왜 결혼했냐는 물음에 내가 생겨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는 대답을 들은 이후였다. 나 때문에 엄마가 불행해진 거라는 죄책감이 든 건. 그 죄책감은 사춘기 내내 나를 따라다니며 내 정체성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곤 했다.


 부모 없이 못 배우며 자랐어도, 가난이 엄마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었어도 엄마에겐 ‘품위’가 느껴진다. 한 평생 자식을 위해 기도하며 주변을 정갈하게 만들며 산 사람에게 느껴지는 위엄 있는 품위.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들을 원망하기보다 다정하게 안아주는 엄마.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적정선을 벗어나지 않는 엄마의 참을성과 인내는 결핍이 한평생 엄마를 외롭고 힘들게 했을지언정 엄마의 아름다운 내면을 가난하게 만들진 못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엄마의 마음은 고상하고 기품 있는 꽃으로 채워진 느낌이다. 그 옛날 나를 품어주던 뒷마당처럼.


 그런 엄마이기에, 그런 엄마가 지켜준 나이기에 엄마는 ‘나 때문‘에 아빠와 결혼한 게 아니라 ’나를 지키기‘위해 아빠를 선택했다는 걸 지금은 안다. 그래서 미안하다. 이런 엄마 밑에서 자라며 마음이 가난했던 걸. 가난한 삶을 원망하며 엄마가 지켜준 삶을 더 환하게 빛내지 못한 걸.


 엄마, 미안해요. 전부.

작가의 이전글 J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