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설악산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가까이서는 이 아름다운 설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만 볼 수 있지만, 멀리서 보면 설악산 전체 설경을 감상할 수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감동은 배가 되고, 모두는이 풍경에 압도된다.
등산을 하는 이유도 올라가면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근데 정상에 가서 보이는 풍경과 밑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천지차이다. 그래서 그 잠깐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 올라가는 고통과 내려가는 아쉬움을 감수하는 것이다.
내가 뉴욕에 있을 때도 그랬다. 뉴욕의 상징은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 빌딩에 올라가 야경을 보지 않는다. 왜?
내가 보는 야경은 이 빌딩이 안 나오거든. 모두 건너편 록펠러센터의 탑오브더락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보이는 야경을 즐긴다.
우리 삶도 이와 같다. 영국 전설의 배우 찰리채플린이 한 유명한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이 딱 맞다.
오늘 해야 할 To do list, 이번주, 이번달, 올해 해야 할 일과 목표 중에는 다음 해가 되어 바라보면 이룬 것도 있고, 이루지 못한 것도 있다. 하나하나는 당시 고통스럽고 힘든 순간일 수 있으나, 그 자체로 멀리서 볼 때는분명 무언가를 우리는 이루어가고 있다.
특히, 지금 생각하면 정말 별거 아닌 것 같은 어릴 적 일들이 그땐 세상을 다 잃은 느낌이 들었을 때와 일맥상통한다. 어릴 적 태권도 회비를 들고 가다 길에 떨어트려 6만 원을 잃어버렸을 때, 시험에서 나만 좋지 않은 점수를 받았을 때, 나만 숙제를 하지 않았을 때 세상에서 나는 그게 전분줄 알았다. 그걸로 내 인생이 무너졌다. 고등학교 3년은 수능시험이 또 내 인생의 전부였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는 몇 달간 그렇게 또 폐인처럼 살았다.
근데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고통의 범위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 결국은 그 과정들이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조금 더 넓고 큰 일을 할 수 있는 내공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회사에서의 사원의 역할, 팀장의 역할, 사장의 역할이 각자 다른 것처럼 말이다.
첫 책을 작업할 때의 두려움과 설렘은 어느덧 익숙해져 또 다른 주제의 기획을 끄적여 보고, 온몸이 떨리던 첫 면접의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다른 인턴 지원자를심사하는 면접관도 해봤다. 결국은 작은 과정들이 모이고 모여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근데 <인생은 가까이서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바로 내가 내삶을 바라볼 때는 비극이고, 타인의 시야로 볼 때는 희극이라는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1번의 의미로 해석을 많이 하는 반면, 주로 외국인들이 2번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내 외국인 친구들도 거의 모두 2번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내 삶이 비록 힘들고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처해있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이 삶도 부럽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
비교는 끝이 없다. 내게 백만 원이 있다면 천만 원을 가진 이를 부러워하고, 그는 또 일억을 가진 이를 부러워한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냐에 따라 이는 천차만별이다. 숫자로 매기는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세상만사가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린 사람을 부러워하고, 또 그 가정을 꾸린 이는 혼자 있는 솔로를 부러워한다. 인생에서 맞다, 틀리다는 시험문제에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다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각자 다를 뿐이다. 오로지 선택의 순간들에서 스스로 줏대를 가지고 더 합리적인 결정을 하며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 여긴다.
설악산은 그렇게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