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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Jul 03. 2024

서울 시청역 참변에 대하여

희망을 안고 좋은 사람이 돼야

어젯밤 아홉 시 사십 분,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너 어디야?”

“당연히 집이지! 청첩장 모임 잘 끝났어? 몇 시쯤 와?“

방금 나 바로 앞에서 10명 넘게 죽었어

심장이 덜컥한다. 그리고 5분 뒤, 네이버 뉴스에는 속보로 시청 앞 횡단보도에 사람이 치여 1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뉴스가 뜬다. 내가 놀랠걸 알고 본인은 괜찮다고 미리 전화를 한 것이다. 원인은 급발진 혹은 역주행.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차는 제네시스. 하. 현대차 급발진이라. 할말이 많지만 지금 하지 않겠다.



9명이 눈 깜짝할 사이 사망했다. 이들 중 4명은 승진 축하파티를 하고 귀가 중이었다. 매형이 신한은행에 다니는데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경조사 게시판에 본인상이 4명이 연달아 떴단다. 그곳은 침울하고 어수선한분위기를 넘어 아예 나라 잃은 분위기란다. 유가족의 심정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참혹함, 허망함,분노, 탄식을 넘어 삶의 희망 자체를 잃었을 것이다.

이 사고는 어느 아무도 모르는 외딴섬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내가 일주일에 2번 정도 가는 시청, 그리고 아내의 근무지 바로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내도 함께 그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고, 만약에 피의자가 역주행이 아닌 정주행으로 액셀을 밟았다면 희생자는 내아내가 됐을 것이다.  당장 그게 아내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턱 막힌다. 신한은행에 다니는 그 4명의 희생자는 심지어 매형과 같은 회사에 다닌다. 결론적으로 이 사고가 모두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건 일상 속에서 그냥 일어난 일이다. 그 누구의 계획도, 예상도 없이 진짜 우발적으로 갑자기 ‘그냥’발생한 일이다. 처연하고, 무기력하고, 슬프고, 충격적이고 분노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 평생을 가까이 두고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 그 아픔은 마치 송곳으로 가슴을 후벼 파는 느낌과 흡사하다.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존재해 왔던 그 어떤 체벌보다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정확히 그 느낌을 받았다. 물리적으로 가슴이 아픈 느낌. 특히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그 일이 벌어진다면 아픔은 정확히 두 배가 된다. 오죽했으면 일 년이 넘도록 트라우마가 생겨 외출을 하는 엄마한테

“밖에 나가지 마,엄마 오늘 죽을 거 같아”

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해댔을 정도다. 주위 사람들이 죽음으로 떠나갈까 봐 노심초사하며 밤을 지셌다.

소중한 사람이 죽는 아픔은 마치 흙탕물에서 흙을 발라내는 것과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려 해도 변함이 없다. 방법은 딱 한 가지. 계속 새 물을 부어 희석시켜야만이 이 아픔이 사라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시간만이 약이라고, 시간이 모든 아픔을 씻어내 준다는 원론적인 해답이면에는 조건이 있다. 그 약을 아주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 그거뿐이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아내가 집에 도착한다. 사고에 관한 사태 파악을 하다 현관으로 뛰쳐나간다. 왜 이렇게 늦었냐며 태연하게 잔소리를 한다.

하, 나는 여전히 구제불능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뉴스를 본 대다수는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매일 아침 출근해서 금요일까지 X 나게 일해봤자 결국 이런 황망한 죽음뿐이구나. 삶은 그냥 허탈하고 허망한 것이라고. 우리 모두 어차피 죽을 거,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답은 하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매 순간이 행복해야 한다. 다투고, 꼴 보기 싫고, 멀어지고, 오해가 생긴 그 순간마저 결국 행복이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럼 지금 남아있는 시간이 더 소중해지고 간절해진다. 아껴야 한다. 철저히 아껴야 한다.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을 봐도, 존경할만한 사람을 만나도 그건 100% 후천적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나 그저 얕고 일천하고 가파른 존재라 믿는다.

얕은 존재라 인간은 늘 망각한다. 특히 본인에게 오는 온갖 유희와 재미, 쾌락, 안정 이 모든 긍정의 의미를 내포한 감정이 영원할 거라는 큰 착각에 빠져 산다. 이 감정이 누군가와 함께라면 그 행복은 2배가 되고, 그 사람과도 영원할 것만 같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건 찰나의 순간일 뿐이고,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가 떠나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동시에 땡! 하고 약속이나 한 듯 죽고 싶겠지만 대개 이런 경우는 불의의 사고일 확률이 99%다. 안락사 아니면 사고겠지. 이 둘 빼고는예시로 찾기 힘들다. 결국 어떻게든 한 명을 먼저 보내야 하는 순간이 올 텐데 그때서야 우리는 후회와 동시에 큰 깨달음을 얻는다. 지난 모든 순간이 결국은 다 행복이었음을. 살았다 아니, 현재를 살아나가는 관성은 실로 이렇게나 대단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서로를 응원해야만 한다. 지금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보듬어야 한다. 그것만이 대자연의 이치 속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희망은 힘이 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좁쌀크기 밖에 남지 않은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버텨야 한다.


근데 매사고 마다 이렇게 탄탄한 희망을 다짐하지만 이 희망은 얼마 안 가 곱절의 절망과 분노로 바뀐다.

어김없이 지금도 남성혐오 사이트에는 잘 죽었다는 식의 폭언과 조롱이 쏟아진다. 한 번에 다 죽었다고 볼링장이냐고 묻는다. 자연현상이냔다. 스트라이크란다. 사람이 지금 죽었는데, 주저앉은 유가족을 앞에 두고 뚫린 입이라고 저런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낸다. 주체할 수 없는 증오에 매몰된다. 글쓴이가 진정 사람인지가 의심스럽다. 실제로 내가 만약 글쓴이를 만난다면 과연 어떤 표정으로 만날지 궁금하다.

이거 하나만 보더라도 인간에게 희망을 걸기에는 현대사회는 참 비관적인 세상이다. 혐오, 자살, 가난, 불평등, 온갖 불행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환멸의 깊이 속에서 소소한 행복에 목숨 거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상대가 똑같이 나로 하여금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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