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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Aug 08. 2024

내로남불에 왜 예민한가?

형평성에 죽고 못 사는 사람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이다. 사자성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은아니다. 현대사회에서 돈보다 더 어쩌면 자주 등장하는 사회이슈다. 보통 안타깝게도 누굴 가르쳐야 하는 직업 교사나, 교수, 선생님 혹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아랫사람을 상대할 때, 돈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서 흔히 발생한다. 돈처럼 본인의 이익과 직결되는 부분이기에 서로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지도.

”나는 되고 너는 안돼“ 이 논리는 결국,

“나는 이득 봐야 하는데, 너는 손실 봐야 해”로 들린다.

'피노키홍'이라며 조롱받고 있는 현 국가대표 축구감독 홍명보도 그렇다. 일본에서 임대로 온 선수가 있다. 울산 HD에 남을 것처럼 했던 선수는 일본으로 돌아가 다른 구단과 계약을 했다. 모든 언론을 빌려 홍명보는 그 선수 욕을 하고 언론과 네티즌은 홍명보의 말에 힘을 실었다. 근데 불현듯 그의 울산 HD를 떠나지 않겠다던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갑자기 국가대표감독 제의를 수락한다. 과연 그는 왕관을 쓸 자격이 있는 걸까. 자기 자신에게는 그토록 관대하고 남에게는 그토록 엄격한 그의 행실은 온 국민사이에서 내로남불이라고 조롱거리가 됐다. 이게 현실에서 보기 힘들어 뉴스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개개인의 일상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유명인이라 그냥 한 번에 터진 것뿐.

평소에 굉장히 존경하고, 행실이 발라 주변에서 미담밖에 안 나오는 전 직장의 한 과장님이 계셨다. 품행, 외모, 말투, 자기 관리 등 모난 데 하나 없는 그를 모두가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한번 그의 인스타그램을 보니 온갖 음란한 사진들로 도배된 계정들이 팔로잉되어 있었다. 그는 아마 그것이 타인에게 비치는 줄 몰랐을 것이다. 성적인 발언이나 희롱 관련 뉴스에 큰 소리로 비난을 쏟아붓더니, 결국 본인은 뒤에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게 주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줬다. 본인에게만 관대한 내로남불의 전형적인 예시다.


직장생활이라고 어떻게 다르겠나.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한국에 직장인만 2천만 명 넘으니까.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본인도 그렇게 해왔으면서 타인의 행동이나 성과에 삿대질하고, 고치라고 비난한다. 본인이 조금이라도 잘한 건 2배, 3배 포장해야 하고, 남이 한 건 2배, 3배 깎아내려야만 한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뒤에서 욕하며 타인을 비난해야만이 본인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 모든 힘을 보태거나 기도를 해서 남이 안 됐다 치자. 그렇다 해서 사실 내가 잘된 게 절대 아닌데 모두 비교에 찌든 우월감에 그렇게 취해 산다.  아닌 것 같다고? 일상 속 별로 친하지 않은 이들을 마주쳤다치자. 주식얘기를 한다. 한 몇억 잃어서 이젠 적금만 한다고 농담 삼아 얘기해 봐라. 겉으로는 “헐 어떡해”라며 위로해 주겠지만 그 자리는 모두의 보이지 않는 안도의 한숨으로 결국 분위기 떡상한다. 절대 아니라고? 내 주변엔 좋은 사람만 가득하다고? 오늘 한번 해봐라. 느끼는 게 많을 것이다.

참 안타깝다. 마치 작은 실수라도 걸리면 죽여버리겠다는 심보로 등에 칼을 숨기며 치고박는 전쟁터 같다. 이러니 사람들이 그렇게 자살하고, 스트레스받고 암 걸리고 하는 거다. 맨날천날 눈치 보면서 내 할 말 하나못하면서 365일 그렇게 산다. 눈치로 연결된 초연결사회에서 한 용기 있는 자의 소신발언은 곧 사냥감을 발견한 것과 같다. 그냥 바로 단체로 매장시켜 버린다.

즉, 직장이나 사회에서는 하나의 기준이라는 높고 높은 잣대를 정해두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튀어나오거나모가 난 사람들을 차별하고 힐난할 수 있는 근거를 탄탄히 만들어놓는다. 조직 내 경쟁을 붙여 내로남불이 자연스럽게 습득돼 안에서 곪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게 우리는 내로남불에 적응되어 간다. 그 하나의 기준이라는 것은 절대적일 수 없고, 상대적임에도 그 상향평준화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낙오자 취급을 한다. 그냥 그렇게 한국인에겐 서서히 자조 섞인 무력감만 자리한다. 모래시계처럼 아주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빨려간다.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나는 이 모든 원인이 내로남불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로남불은 즉, 이 정글 같은 사회에서 스스로에 부여되는 인정욕구를 남을 깎아내리면서 취하는 비정상적인 행동이다. 그게 한낱 실수든 고의든간에,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 사회에서는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이런 감정이 솟구칠 수밖에 없다. 나포함 누군가 내로남불을 한 번도 여태껏 하지 않았다면 그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결국 개인이 모여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들이 모여 한 사회를 만든다.

A> B> C. 결국 A 개인이 C 사회를 형성하는 것인데 개인의 이런 내면의식은 한 집단을 병들게 하고, 이는 소리소문 없이 사회 전체로 퍼져 다시 개인을 병들게 만드는 악순환의 굴레를 만든다. 그것도 가장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게 한국이다. 자원 하나 없이 사람을 갈아 경쟁으로 다져 성장한 국가니까. 자,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가 행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조직 안에 속한 한 명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사회라 생각해 보자. 내 안에 있는 우주 즉, 본인의 내면을 작은 사회로 바라봐야만이 우리는 내로남불에서 탈피할 수 있다. 결국 내가 인생의 위기가 왔을 때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 도움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사회를 만들려면 나부터 내로남불의식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곧 사회에서의 제거와 같다.

내로남불이 생긴 원인부터 돌아보자면 일관성과 형평성 이슈라 생각한다. 이게 어긋나면 관계에서의 혐오가 된다. 이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떤 이득을 취하기 위해 형평성에 빗댄 작은 불씨를 확대해석해 타인의 결점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괴롭힌다. 그 공격이나, 거기에 따른 방어기제 결국 양쪽 모두에서 혐오가 되고 곧 내로남불을 만든다.


현대사회에서 개개인은 세대 간 갈등, 남녀갈등, 경제적 갈등, 인종갈등, 온갖 다양한 갈등에 노출되어 있다.조직과 한 사회의 일관성과 형평성에 만족하지 못하는이들이 결국 관계에서의 혐오를 조장하고, 내로남불을무기 삼아 혼란을 야기한다.

각자의 예민함을 사회 탓으로 물론 돌릴 순 없다. 하나의 명제에도 모두가 다르게 해석하는 사회다. 다만 중요한 것은 유독 한국은 다양성보다 형평성이 더 중요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이해하기 쉽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공공연한 예시를 들어보겠다.


-청년을 위한 정책을 내놓으면 40대, 50대들이 난리를 친다.

-종부세나 금투세 중장년층을 위한 정책을 내놓으면 청년들이 들고 일어선다.

-외국인 차별 채용에 고개를 저으면서 본인은 백인이라 괜찮다고 안심한다.

-군 가산점에 여자들은 욕이란 욕은 다 한다. 그리고는 여자만 주는 생리휴가에는 침묵한다.

-광기 어린 부동산투자를 반대하고 본인이 투자한 곳은 투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본인은 인사 안 하고 남 배려 안 하면서 신입사원에게 왜 인사 안 하냐고 훈계를 한다.


다 이런 식이다. 거기에 모두가 치를 떨고 예민해한다. 실제로 내 곁에 있는 20대 청년들도 일관성과 형평성에 가장 큰 중점을 두고 있고,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 순간 관계에서의 혐오로 번진 사례를 많이 봤다.

예를 들어 대학생 10명이 있다. 시험을 보든, 시합을 하든, 그 어떤 것이든 1위부터 10위까지 줄을 세워야 한다 치자. 모두에게 기회는 공평하고, 주어진 권리는 동등해야 한다. 노력에 대한 보상은 공정해야 한다. 단 한 명이라도 출발선이 다르다면 이는 일관성과 형평성에 어긋나 청년들은 정의의 사도가 되어 발끈한다.

청년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 중 1위가 뭘까.

"나 때는 말이야. Latte is horse.
('라떼는 말이다'를 직역한 표현)

바뀐 현실에 순응하거나 변화하지 않고 1인칭의 시점에서 상대를 깎아내리는 일. 이것도 일관성과 형평성에 어긋나는 대표적인 예시다.


결국 이 현대인의 인간관계에서의 간극을 좁히는 일은내로남불을 줄이는 건데, 형평성과 일관성만 지켜진다면 이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본다.

근데 우리가 사는 사회 안에서 개인을 들여다보면 누군가가 그토록 싫어하는 또 다른 누군가는 세계평화를위해 일할 수도 있다. 끔찍이 싫어하는 또 다른 누군가는 정치적 합의를 이끄는 자리에 헌신하고 있을 수 있다. 국민들의 혐오를 받는 누군가는 ESG, 친환경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개개인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지만, 이처럼 인간은 어차피 누군가와 연대하면서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존재다. 개인의 발전시키려는 자기계발욕구가 있기에 더 나은 세상을 조금씩 만들어간다. 이 속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곧 내로남불을 줄인다. 결국 해석에서의 다름이 상호 간 이해의 출발점이고, 그 다름은 사회적 통념과 상식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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