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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Aug 12. 2024

고졸 VS 지방대 대졸

한국에서 고졸로 살아남기

취업난에 허덕이는 방구석백수가 공식적으로 70만, 비공식적으로는 100만에 육박한다고 한다. 어느 때나 취업이 안 힘든 적은 없었다고 하나, 유독 사회 첫발을 내딛는 지금 청년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 문제는 세대 간, 성별 간 늘 갈등이 상존했고 서로 간 좁혀지지 않는 간극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현대사회에 타인의 삶은 가까이 있다. 본인 주변만 그런 게 아니라, 익명이라는 가면을 쓴 채 안면식도 없는 불특정 다수의 삶을 손쉽게 평가하고 까내릴 수 있다. 그게 비난의 화살이 됐든, 달콤한 칭찬이 됐든 타인의 인생을 글자 몇 개로도 간섭할 수 있는 세상이란 거다. 타인을 타산지석 삼아 본인 인생을 돌아보려는 의도인지, 타인을 평가절하함으로써 본인의 가치를 올리려는의도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매 순간 선택의 결과가 타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 와중에서도 주변의 시선과 평가에서 용기 있는 선택을 한 사람은 물론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다만 본인이 행복하다고 판단한 그 선택에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디듯 책임만 지면 된다. 그런 이들이 많을수록 개개인의 삶이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요즘 유독 이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용기 있는 선택들이 많은 이들에게 변질되어 극단적이고 자극적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마치 '인생 한방' 인 듯양, 부모와 보통 사람들이 해왔던 모든 절차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판단해 과감히 생략해 버린다거나, 맹목적으로 정반대의 극단적 길을 가려는 사람들에 대한 우려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사촌 동생이 대학을 가지 않고 그 돈으로 사업이나 내 꿈을 위해 달려가겠다고 해 온 집안에 충격을 준 사례 같은 것. 지방대 나와서 어차피 취업도 안되는데 왜 굳이 대학을 가냐는 거다. 그 시간에 진짜 세상에 직접 부딪히면서 성장하고 싶다고 한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결정들. 가령 입시, 취업, 결혼, 출산 등 이 퀘스트 속에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것은 거의 대다수가 입시다. 이 입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본인에게 있을 무수한 선택들이 자동적으로 결정된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많은 학부모들은 어릴때부터 영어유치원보내고, 유유학보내고, 학원보내고 하는거다. 이 입시에 가장 큰 무게를 싣는다.

이 문제에 대해 최근 ‘고졸 vs지방대대졸’이라는 짤도 돌아다닐 정도로 의견이 분분하다. 대학 가는 건 필요 없는 게 아닌가, 취업도 어치피 안되는데 그 돈으로 자기계발하면 훨씬 더 성공한다는 논리에 그걸 경험해보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남기고 있다. 내 생각은 이는 용기를 가장한 극단적인 모험에 불과하다.

그 말을 한 지 3년이 흘렀는데도 동생은 아직 본인만의명확한 꿈을 찾지 못했고, 사회에서 방황하고 있다. 고졸로 공무원시험을 준비해 합격하거나, 운동선수를 하거나, 본인만의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사업에 뛰어는 이들도 물론 있다. 어린 나이에 명확한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비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만 사실 이 선택이 인생에 득이 된다. 근데 남들이 그냥 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야만이 사회에서 차별화가 된다는막연한 모험을 꿈꾸는 이들은 필패할 수밖에 없다.

요즘 취업이 힘들어 대졸들도 다 빌빌대는 마당에 애초에 어린 나이에 그 돈으로 저축을 하거나 다른 길로 뛰어들겠다는 이도 본 적 있다. 이는 사실 동전의 한 면만 보고 있는 것이다. 대학교 4학년 학비가 3,000만 원이라고 하자. 만약에 안 갔다면 그 돈을 본인 계좌에 100% 저축할 수 있었을까? 장담컨대 절대 아니다. 그 돈으로 본인말처럼 3,000만 원의 가치가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었을까? 3,000만 원 이상의 경험을 대학대신 얻을 수 있었을까? 현실은 그 돈 다 까먹고 졸업장도 못 따고 빌빌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이는 커피값 논리랑 똑같다. 카페인을 끊기 위해 라떼 한잔을 하루에 5천 원 잡고 한 달 하면 15만 원, 일 년 하면 180만 원이다. 이 돈을 온전히 커피 안 마시고 180만 원 모은 사람이 있을까? 설령 커피를 안 마셨다 하더라도 다른 데 썼겠지. 담배도 똑같다. 정신건강으로 따지면 그 돈 아끼지 말고 차라리 담배 피우고 커피 마시는 게 인생의 유희적 측면에서는 훨씬 이롭다.

그렇다고 자영업을 할 건가? 본인만의 획기적인 아이템이라고 확신하고 시작해도 성공할 확률은 고작  5%다. 그 돈으로 주식을 한다 쳐도 돈을 딴다는 보장이 없다. 주변에는 늘 주식으로 성공했다는 이야기, 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분분하나 그건 일반적이지 않으니 알려진거다. 사실 주식은 잘하는 사람도 본전인 게임이다.

그 대학등록금 3,000만 원을 장학금을 받는 사람도 많고 대학에 가서 얼마든지 삶을 다시 바꿀 수 있는 길은 많다.


일단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왜 유리하냐고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기회의 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금만 해도 취업을 하거나 작게나마 어디서 일을 배워보고자해도 자격요건 자체가 ‘학사 이상’, ‘초대졸 이상’ 등이 허다하다. 못 믿겠으면 인터넷 조금만 쳐봐도 나온다. 안타깝지만 한국이 아직 이렇다. ‘도전해서 실패한 것’과 ‘도전을 할 수 있냐 없냐’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특히나 요즘 전 국민 오디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현대차 생산직만 봐도 원래는 고졸과 초대졸의 자리에 대졸도 다 지원하는 걸 보면 최소한의 안전망 없이는 고졸의 입장에서는 설자리를 자꾸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다. 이런 회사가 요즘 굉장히 많다.

농협은행도 5급 (일반적인 대졸전형이며 학력제한은 없으나 필기시험 난이도 극악으로 고졸이 현실상 합격하기어려움)은 워낙 경쟁이 치열해 일단 들어가고 보자고 6급 전형에 대졸들이 몰린다. 당연히 그 수준 자체는 상향평준화 될 수밖에 없다.

졸업장 따는 건 앞으로 맞닥뜨릴 무수한 퀘스트에서 가장 힘 안 들이고 경쟁사회 입장티켓을 받는 효율적인 게임이다.

‘그냥 대학 안 가고 그 돈으로 하고 싶은 것 하겠다‘ 는

’대학등록금=3,000만원‘ 이라고 금전적 가치로만 환산해 이에 따른 기회비용을 생애주기 고려 없이 결정한 것인데 이는 일차원적인 생각이다. 실제 한국은 대학을 졸업하면 천 가지, 만 가지의 인생의 무수한 선택을 다섯 가지 혹은 열 가지, 스무 가지로 보기를 압축시킬 수 있다.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늘 어떤 조건이 붙는데 대학만 졸업해도 사실상 대부분의 허들을 넘고 출발선에 당당히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배우는 강의가 삼천만 원의 가치를 실제로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대학에서 젊을 때 만나는 관계 사이에서 배우는 본인만의 철학, 다양한 경험, 자신감, 견문이 형성된다.특별히 본인이 내세울만한 무기나 믿는 구석이나 있지않는 한 단순히 본인이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극단적으로 리스키 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인생이 꼬여버린다. 99%의 어른들이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면 공부라도 열심히 하라고 하는 게 그냥 하는 잔소리가 아닌 것이다. 본인보다 몇십 년은 더 산 경험에서 나온 혜안이다.

결국 우리 인생에서 선택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안전망이라는 게 존재하는 합리적 결정이어야 한다. “20대 때 그냥 대학 가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도전해 봐“처럼 원론적이고 맹목적인 무모함은 누구나 말할 수 있다. 왜? 내 인생이 아니거든. 망해도 걔가 망하는 거고 나는 그냥 조언만 하는 거고 책임하나 안 지거든.

반대로, “야, 대학 무조건 좋은 데 가서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공부에만 집중해 좋은 직장 잡아“라는 정반대의 아주 보편적이고 한국스러운 정답도 쉽게 내놓을수 있다. 연애나 여행, 경험, 인간관계 하나 없이 세상물정 모르는 소시오패스 공부쟁이가 된다 한들, 사실 이 런 말들은 누구나 다 쉽게 할 수 있다는 거다. 다만 그 안에서 결국 우리는 무모함과 한국스러운 정답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나만의 우주를 형성하는 게 이 나라에서, 국가에서 그래도 밥은 먹고살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매 순간 균형 잡힌 안전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나중에 도전에 실패하더라도, 완전히 재기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어막이 되어준다. 회사에만 충성하면서 그 하나만 보고 사는 사람들은 집착이 생기고 여유가 없어 오히려 회사에서 더 일찍 팽당해 어쩔 줄 몰라한다. 하나의 주식에 전재산을 몰빵한 사람들은 주식이 폭락하면 더 투자할 돈이 없어 좌절한다. 늘 자기애와 겸손 사이에서의 자기 객관화가 있어야 한다. 그게 치명적이게 위험하지 않은 모험일 것이고, 내 인생의 작은 보험하나 들고 있을 수 있는 위험과 모험 그 어느 중간쯤의 선택이다.


결국 우리 삶은 실체가 없어서 어느 정도 틀이 있어야 한다. 그 틀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또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는 게 정글에 혼자 떨어져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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