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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Aug 06. 2024

무조건 버티면 안 되는 이유

존버하면 오히려 불행해진다

재테크, 직장생활, 인간관계 문제, 심신의 건강 등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진리가 있다. 현대사회에서 알 사람만 아는 절대불변의 진리다. 바로 무엇이든 '꾸역꾸역 버티면 X된다'는 것이다.

‘존버’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외수작가가 가장 먼저 쓴 단어가 이렇게 퍼져 화자 된 걸로 아는데, 이 말은 현대사회에 사실 적용 불가능한 표현이다. 아, 정확히 말하면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말은 유효했을지 모르나 개인의 다양성과 행복이 우선가치인 우리 세대와는 전혀 딴 얘기다.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쓴  작가 김난도 교수도 만약 그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본인의 평판에 아마 더 이로웠을 것이다. 아프면 그냥 환자다. 병원 가야 한다.  

어제 코스피가 4년 만에 서킷브레이커를 발동했다. 미국주식이나 한국주식이나 폭락에 폭락을 거듭해 위와 같이 우스갯스러운 짤이 주변에 돌아다닌다. 일 년 연봉만큼의 돈을 잃은 사람만 내 주변에 수십 명 된다.

자, 현재 난 주식을 하지 않는다. 근데 예를 들어 내가 산 주식이 나락 가서 -20%라 해보자. 멘탈이 나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근데 내일 다시 보는데 -40%,그다음 날은 -50%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는 대개 억장이 무너져 일상이 무너져버린다. 이럴 때에는 하루라도 빠를 때 인생 경험을 했다고 치고 손절매를 하는 것이 맞다. 어, 근데 나는 손절매를 했는데 주식이 다시오르네? 그럼 그냥 내 것이 아닌 것이다. 참다가 전재산 다 잃고 내 인생도 잃는다. 근데 딱 예외가 있다.

-99%가 돼도 멘탈하나 흔들리지 않는 사람. 순간의 등락에 단 1%의 타격도 없이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주식이 오를 때까지 기다리며 그냥 또 사면된다. 진짜 주식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자, 여기서 뭘 느꼈는가?

멘탈이 강한 사람은 하락장에 버티는 멘탈이 강해 대단하다고 칭찬받는 게 아니다. 이 사람은 본인 스스로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다.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잃지 않는다.


인간관계를 보자. 마음에 안 드는 상사가 있다고 해보자. 나와 안 맞는 친구가 있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힘든데 그 사람 좋으라고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틴다. 그러면 내 노력이 가상해서 상대가 나를 그때서야 인정해 줄까? 절대 아니다. 혼자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다고한들 손도 두 손이 맞아야 박수가 나듯, 관계는 혼자만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싫어한다. 직원을 얼마나 잘 다룰 줄 아냐의 그 상사의 숙련도나, 직원의 성격에서 변수가 있겠으나 한번 미운 건 계속 그냥 밉다. 아마 나댄다고 더 극도로 싫어할 것이다. 관계에도 관성이 존재해서 한번 눈에 밟히면 끝까지 눈에 밟힌다. 그 이미지를 돌려놓기 위해서는 솔직히 본인에게 금전적인 이득이나, 그에 준하는 걸 해주지 않는 이상 그 관계는 이미 죽은 것이다. 인내 하나 가지고 갈 문제가 아니다. 이걸 아는 다른 누군가는 본인을 싫어하는걸 눈치채자마자 그냥 본인도 싫어해버린다. 그럼쌤쌤이잖아. 마음도 편하고.


너 나 싫어해? 그럼 나도 싫어할게.


결국 이런 식이다. 누가 위너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30년 전, 아버지 세대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심보로 좋아하면 결혼하고 했다. 정성스럽게 버티는 것이 그게 진심이라 여겼다. 실제로 30년 전에 우리 아빠는 같이 엄마와 등산을 하다가 정상에서 결혼 안 하면 뛰어내린다고 해서 결혼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났다. 믿기 힘들지만 진짜다. 지금 그렇게 하면? 바로 경찰서 간다. 그래서 재치 있는 남자들은 열 번의 도끼를 다른 열 명의 여자에게 각각 한 번씩 찍는다. 그러다 반응 오는 사람이랑 사귄다. 그러다 또 안되면? 다 잊고 또 다른 여자 알아본다.


자, 다음엔 건강이다. 미치도록 힘들 때가 있었다. 되는일도 안되고, 돈도 없고, 관계에서 힘들고, 스트레스를풀 곳이 없었다. 그땐 어느 순간 건강마저 나를 위협했다. 살이 5킬로는 기본이고, 피부가 푸석해지고, 불면증에, 온갖 피로에 시달렸다. 발을 헛디뎌 삐끗하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마음이 불편해서 오는 육체적 고통이실제론 2배, 3배 더 고통스러웠다. 근데 누군가는 이런 상황이 닥치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건강을 위협하는 외적변수를 찬찬히 제거해 나간다. 퇴사를 하거나, 헬스장을 가거나, 관계를 손절하거나, 아주 조용하고 슬기롭게 건강을 회복한다.

다음은 취업. 청년의 생애주기를 볼 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내가 공부를 못하는데 9급공무원 2년, 3년, 4년, 5년 계속 준비하다가 낙방하고, 준비하다가 낙방하고 이러면 어떻게 되나? 맞다. 시간만 그냥 흐르고 인생나락 가는 거다. 본인은 계속 버텼다 생각하겠지만 그건 사실 버틴 것도 아니다. 본인 수준을 명확하게 인지한 사람들은 일이 년 해보고 답이 안 나온다 싶으면 바로 다른 길 찾아 지금 돈도 잘 벌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내 삶에 밀접한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결국 하나의 공통점으로 귀결되는데, 바로 참는 건 병이라는 것이다. 참는다는 감정 자체가 애초에 바라지 않는 상황이 와서 내 의사를 밝히지 않고 그에 온전히 따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건데, 그럼 우린 그 상황 자체를 피할 수는 없는 걸까? 참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면되는 것 아닌가?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하다. 무수한 이해관계에 섞여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마음에 들어 할 상황만 맞닥뜨린다는 게 사실상 쉽지 않다. 그 누구와 섞이지 않고 365일 혼자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내가 싫어하는 상황은 언젠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 고작 4개의 예시만 들었는데 답이 나온다. 답은 뭘까?  참지 않기 위해서,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 자신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나는 대체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인가? 어떤 취향인가? 그걸 명확하게 해야 직업이나 관계나, 세상을 둘러싼 많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당위성이 생긴다. 어떤 선택에 있어 갈팡질팡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다면, 그 선택지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사람인지를 결국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뭘 하든 내가 행복하다면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이다. 제발 너 스스로를 속이지 마.

부와 명예를 뿌리치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 그림을 그리겠다. 글을 쓰겠다.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냥 그런 사람인 거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가 그렇다는데 그 누가 그걸 부정할 수 있나?

대신, 본인은 입에 내뱉을 만큼 당당하기 때문에 그 일을 무조건 달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부여된다. 본인의 취향에 맞는 그 그림 그리는 일을, 글 쓰는 일을 그냥 하면 된다. 그래야'만' 행복할 수 있다. 조건은 딱 하나다. 꼭 그래야만 한다. 주변의 시선에 못 이겨서, 경제적 궁핍에 못 이겨 다른 일을 한다면 그리고 그게 계속된다면 그 사람은 절대 죽어도 행복할 수 없다. 주변에는 본인이 무관심하고 싫어하는 사람만 모일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다양성과 취향이 이토록 존중받는 사회에서 남들이 하라는 대로, 그저 나와 맞지 않는 것을 꾸역꾸역 버티다 보면 건강이면 건강, 가족이면 가족, 연인이면 연인 내 모든 소중한 것들이 옆에 돌아보면 없어지는 안타까운 경험을 하게 된다.  왜 사회시스템 안에 자꾸 본인을 구겨 넣나? 똑바로 들어가면 상관없는데 구겨지면 몸도 마음도 아프잖아. 나랑 안 맞아서.

그걸 알면서 왜 거기에 들어가냐는 거다. 10년 전,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난 더 그 마인드에 경각심을 느끼고 있다. 그때는 심지어 참으면 어느 정도 본인도 납득할만한 보상이 주어졌지만 지금은 참는다고 해서 그런것도 없다. 그냥 참으면 X 되는 사회고, 앞으로 이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힘들게 전문직 시험에 합격했는데 그만두고 여행유튜버를 하는 사람, 국내 탑 대기업 입사 후 그만두고 대기업 월급 반에 반도 안 되는 곳에 들어가는 사람, 취업하고 결혼할 나이 한참 지났는데 본인이 좋아서 얼마 안 되는 돈 받으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 내 주변만 봐도 많다. 40대 배 나온 아저씨들은 안타깝다고 비난한다. 그래야만 본인의 현재 선택과 지금의 자리가 정당화되니까. 그냥 본인만 생각하는 좁디좁은 시야 속에 살아가는 더 불쌍한 사람들이다. 본인만의 선택을 한 그 대단한 사람들은 칭찬받고자 하는 욕심도 없고, 그냥 이 아저씨가 더러워서 피한 것뿐이다.


이제 참는다는 표현은 헬스 웨이트를 할 때 더 큰 무게를 드는 본인의 고통스러운 순간을 묘사할 때나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루고 싶은 명확한 목표 앞에 지금을 희생할 수밖에 없을 때나 쓰는 것이다.

어차피 세상만사는 계속 변한다. 관계나, 돈이나, 자산이나, 친구나, 직장이나, 건강이나 나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들. 나 빼고 전부 다 변하는데 나 혼자 똑같은 스탠스로 똑같은 자리를 고수하는 건 그건 인내가 아니고 아집일 뿐이다. 그 고집을 제거하는 법이 바로 '나'를 파악하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기 때문에 성공한 거지, 성공해서 본인을 안게 절대 아님을 기억하자.


장담컨대 사람으로 태어난 전 세계 60억 인구 모두 각자 잘하는 게 못해도 하나씩은 있다. 왜 나를 알아야 하나, 나를 안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 시간에 돈이나 더 벌지,라고 묻는 사람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이젠 그 잘하는 걸 알아야 돈이 된다. 다른 거 다 안 하고 그거 하나만 찾아도 무조건 성공하는 아주 단순한 게임에 우리는 현재 살아가고 있다. 이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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