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암시는 곧 ’건강한 의심‘
요즘 유튜브나 TV를 보면 온갖 흑백요리사 얘기다. 이미 우승자가 확정되고 종영한 지 한 달이 다되어 가는데도 끝없는 리뷰, 패러디가 쏟아져 나온다. 유행이긴 유행인가 보다. 이 유행을 따라 어제 나도 재밌는 경험을 했다. 요리게임을 했는데, 흑백요리사처럼 정해진 음식을 가지고 제한시간 안에 만드는 거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30분. 음식은 베이컨과 양파, 브로콜리, 그리고 계란 3개가 전부.
뭘 할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생각하다 베이컨말이를 했다. 사실 요리하기 전부터 겁부터 먹었다. 누군가에겐 어려운 요리가 아니겠지만 나 같은 초보에겐 어떤 모양으로 베이컨을 말아야 하는지, 양파는 어떤 식으로 썰고 볶아야 하는지, 소금과 설탕은 어느 정도 넣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라 긴장됐다. 아니, 이게 뭐라고 마치 면접장을 들어가는 면접자처럼. 특히 30분 제한시간이 있어서 더 초조하고 떨렸다. 근데 결국은 성공했다. 한 번도 요리를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내가 양파를 썰어 밥과 볶고, 베이컨을 말아 요리에 성공한 것이다. 이걸 맛본 모두가 '의외로' 맛있었다며 좋은 평을 했다.
이 재밌는 게임에서 느낀 것 하나. 본인이 만든 결과만이 남는다. 안성재 셰프나, 백종원선생님이나 방송이 나오고 모두가 '와, 대단하다', '진짜 멋있다'며 대단하다고 치켜세운다. 왜냐고? 업계 최고라서 그렇다. 백종원선생님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못 먹어 본 음식이 없고, 도전하지 않은 사업이 없다. 안성재 셰프 역시 마찬가지. 미슐렝 3스타를 받을 때까지, 본인이 생각하는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기까지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당연히 처음엔 나처럼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할지 알지도 못했을 터. 그냥 그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 '본인의 능력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 증명은 그 누구의 험담도, 끌어내리려는 질투와 시샘도 무력화시킨다. 누군가는 백종원이 심사위원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제기로 시비를 걸어도 결국 이 시비조차 무력화시킬 수 있는 건 결국 방송에 나오는 백종원의 날카로운 지적, 요리에 대한 지식, 본인만의 경험, 요리에 대한 진심 어린 행동들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말로 백날 떠들어봤자, 결국 본인이 증명하면 된다. 그게 글이 됐든, 요리가 됐든,그림이 됐든, 공부가 됐든, 운동이 됐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겉으로 떠들어봤자 기회는 꾸밈과 편법 없이 실속 있게 해 나가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걸 몸소 느꼈다.
생전 처음 하는 요리를 하면서 느낀 또 다른 단상이 있다. 처음 시도한 요리를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을 보며 느낀 건 '자기 암시'가 인생에서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
누구나 처음은 두렵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가슴설레고 기대가 동반되나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함께 몰고 온다. 결전의 날이 다가올수록 그 설렘과 기대는 두려움 속에 파묻혀 서서히 사라진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80%였던 기대가 70%,60%으로 줄어들고 그 자리를 두려움이 차지한다. 김연아도 처음 피겨스케이팅을 할 때, 혹은 본인이 해보지 못한 동작 가령 트리플액셀이라 치자. 긴장됐을 것이다. 실패하면 어쩌지, 넘어지면 어쩌지, 다치면 어쩌지. 그러고는 아마 몇백만 번이나 넘어져보니 ‘조금 더 하면 할 수 있겠다’하고 결전의 날 최고의 결과로 증명할 수 있었던 거겠지.
요리도 똑같았다.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막상 해보니 가장 먼저 느꼈던 감정은 성취감보다, '생각보다 별거 없네?'였다.
흑백요리사에 나오는 저 흑수저, 백수저들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비범한 능력으로 아예 쳐다보지도 못할 경지에 오른 사람. 그래서 셰프라는 분야에서 존경받아야 마땅한 사람.
물론 내가 지금 하던 모든 생계를 멈추고 셰프로 전향해 보겠다는 뜻이 아니다. 실력도 없고 자신도 없다. 적어도 한번 해보면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요리라는 것에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으며, 도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는 것이다. 당연히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조선시대 신분제처럼 사람 자체에 우열을 가릴 순 없다. 열등감 갖고 살아온 것도 아니다. 다만 무엇이든 열정을 갖고 도전하면 뭐라도 남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된 거라, 장난으로 했던 이 요리대결이 내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이다.
이 신선한 충격이 온 배경은 뭘까. 어떤 생각이 기반이 됐던 걸까를 생각해 보면 딱 하나다. '건강한 의심'.
예를 들어 보겠다. 의심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해로운 의심'과 ‘건강한 의심’
'왜 난 안되지? 진짜 난 무능력한 인간인 걸까? 왜 다른사람들은 다 잘하는 것만 같은데 난 못하지?'
라고 생각하는 A가 있다고 하자. A는 해로운 의심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미래에 더 위축될 것이고 미래에 본인이 이루는 무언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걸 인정하지 않거나, 의미 있는 결과라도 본인이 그걸 알아채지 못할 확률이 높다.
근데 건강한 의심을 가진 B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왜 안 되겠어?'
‘내가 안 되겠어’에 한 단어 '왜'만 붙인 것이다. 아니, 흑백요리사에 나오는 저 사람들도 하는데 왜 내가 못하겠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물론 저분들처럼 하기까진 엄청난 노력과 성과가 필요하겠지만, 결국은 본인 의지에 따라 모든 게 달린 것이다. 절대 맛있는 음식이란 걸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30분 만에한걸 보면 답은 나온다. 매사 모든 게 이 논리다. 그냥 해보면 된다. 시행착오는 선물과 같다. 그냥 그 선물을 받아들이면서 계속 고치고, 또 고치고. 이런 건강한 의심을 인풋에 넣어주면 매사에 못할 건 아무것도 없다.
자기 암시가 이토록 삶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 증명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소설가 한강이 한국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대중들이 외면했던 독서에 많은 관심을 갖는 요즘, 이런 나날들이 있게 해 준 소설가 한강이 책 읽고 글 쓰는 나로서는 고마우면서도 자랑스럽다. 더불어 출판업계도 매출이 잘 나오니 당연히 활황일 테고, 독서문화가 정착되어 가는 이 현상 자체가 매우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근데 이번 일로 주변 일부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한다.
"와, 나도 저 한강작가처럼 노벨문학상 받고 싶다."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까. 당연 대놓고는 못하겠지만 속으로 분명 욕할 것이다. 아니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것이다. 글로 돈을 버는 게 이토록 힘든 세상에서 '너 주제에' 어떻게 한강작가처럼 유명해지고 노벨문학상을 받겠어?라고 조롱할것이다. 아니면 실없는 농담으로 질투를 가릴 수도 있겠다. 이건 개인의 재능이나 노력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솔직히 제삼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다. 실현가능할지라도 아주 희박한 확률이겠지. 근데 우리는 이때 진지하게 이렇게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왜 안 되겠어? 해보지 뭐"
거짓말 같겠지만 진짜 이런 마음을 먹고 안 먹고는 천지차이다. 이런 마음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자가 기적을 만든다. 꿈은 클수록 그 꿈이 깨져도 깨진 파편이 크기에 결국 뭐라도 남는다. 즉, 이런 생각의 뼈대는 건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킨 자기 암시인 것이다.
누군가는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고, “넌 너무 갔어 정신차려“ 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생각은 사실 양날의 검이다. 객관화에 지나치게 몰입되어 본인에게 지독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에 스스로 상처받기 싫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참 많이 봤다.
가령, 자기 객관화를 해서 본인이 부족하다고 생각을 해. 그럼 그냥 난 못해. 난 몰라하고 그냥 안 해버리고, 본인이 할 수 없는 영역이라 치부하는 것이다. 애초에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보면 안 좋은 결과가 나올 걸 대비해 본인을 방어하기 위한 방패수단 삼는 거다. 그래야 본인의 마음이 편안하거든.
예시는 이 외에 수없이 많다. 아내가 곧 새 회사에 이직하는데 잘할 수 있을까를 걱정한다. 친구가 다니던 회사에서 다른 부서로 발령받았는데 전혀 안 해보던 업무라 걱정을 한다.
나는 항상 말한다. 당연히 잘 된다고.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이거든. 심지어 본인 돈을 써서 사업을 해서 매출을 두 배, 세배 일으키라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무조건 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든 적응하고 잘하게 되어있다. 적응을 만약 하지 못한다면 그건 본인이 자진해서 배울 의지가 없거나 본인과 맞지 않은 것 둘 중 하나다. 그땐 시행착오를 통해 다른 길로 다시 가면 그뿐이다. 사람은 각자 능력치가 모두 다르거든. 단 주의할 것이 있다. 본인에게 주어진 뭔가가 있을 때 본인이 그 일을 아직 잘 숙지하지 못했다 해보자. 당연히 움츠려든다. 스스로가 움츠려 들면 남들도 본인을 그렇게 본다. 그게 요점이다. 내가 잘할 수 있고 위에서 말했던 예시처럼 본인의 성취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왜 안되냐고 건강한 의심을 품으면 움츠려들지 않고 타인들도 본인을 그렇게 안 본다. 진짜 잘하는 것처럼 본다.이게 가장 중요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다. 원론적이고 상투적인 말인데, 현대사회에서 꼭 필요한 말이다.
결국 하면 다 된다. 진짜다.
누군 태어날 때부터 영어 잘했나, 누군 태어날 때부터 글을 잘 썼나. 하면 다 된다. 안 좋은 결과를 맞이한 사람에게 나는 딱 하나 묻고 싶다. 준비를 많이 했는지. 물론 실행에 있어서 난이도는 존재한다. 김연아의 트리플액셀보다 수학문제 하나 푸는 게 훨씬 쉽다. 그래서 부모들이 안정적인 길을 택하라고 하는 아유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닌 게 공부, 즉 정해진 커리큘럼에 정해진 것을 하기만 하면 되는 공부가 사회에서 중간 이상의 결과물을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벌이 평생 따라다니는 것이고 그걸 늦게 깨달은 사람은 학벌 콤플렉스나, 혹은 그걸 이겨내기 위해 더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근데 만약 본인이 전혀 공부에 흥미가 없다? 상관없다.본인이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거 찾아서 건강한 의심 품으면 그걸로 된다. 왜 모두가 공부를 잘해야 하나, 왜모두가 돈이 많아야 하나. 모두가 바라는 이상을 좇을 필요는 없다. 본인이 골프에 큰 관심이 없는데 남들 다 한다고 비싼 돈 주고 따라 할 필요 없다는 거다.
압구정현대아파트 사는 거보다 원룸, 투룸 살아도 본인이 만족하고 행복하면 그뿐이다. 모두가 강남 살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다. 돈이 부족한 사람이 강남에 마침내 갔다고 하자. 더 큰 고생이 따라온다. 애 학원 보내는데 몇백인데 낼 수 있을까? 못 내면 그 강남 안에서 왕따가 되고 어차피 또 자진해서 나갈 텐데? 아무리 본인이 뛰어나도 돈이 많아도 더 위에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있기 마련이다.
흑백요리사부터 시작된 이 예시들의 공통점이 뭐냐. 본인이 생각하는 걸 자기암시하면서 하면 어떻게든 그목표에 가까이 간다. 근데 그 목표는 결국 '본인'이 원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 자기 암시와 행동이 꾸준하다면 돌아보면 결국 이뤄져 있다. 김연아도 돌아서니 되어있었을 거고 수학을 어려워하는 학생도 노력해서 돌아보면 다른 학생에게 수학문제를 가르쳐주고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한참 경직됐다. 한번 도전해서 실패하면 온갖 조롱과 무시가 따라온다. 다시는 이런 도전조차 못하게 밟아버린다. 이 견고한 체계 자체를 스스로 깨야한다.
내가 왜 안 되겠냐는 이 건강한 의심은 오늘 내가 요리에 성공한 것처럼 작은 성공을 매일매일 취하는 삶을 만들게 해 준다. 매일 일어나는 아침에 '난 적어도 오늘3개의 행복한 순간이 있을 거야'라는 자기 암시부터 당장 시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