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암시의 시작, 비우기
다들 휴지통 비우기를 눌러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현실 속의 휴지통과 컴퓨터의 휴지통의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가상의 휴지통은 굳이 비우지 않아도 된다. 눈에 보이지도 않기도 하고, 용량만 조금 차지할 뿐이다. 쓸데없는 파일이나 더 이상 가지고 있기 싫은 파일을 휴지통에 그냥 옮겨놓고만 있어도 된다.
글을 쓰는 것은 곧 이 가상의 휴지통 비우기를 누르는 작업과 같다. 내가 글 쓰는 것이 너무 좋아 글쓰기를 매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게 실타래 처럼 얽혀 삶이 괴로울 때 이걸 빨리 풀고 싶은데 어서 풀어 정리를 하고 싶은데 장소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글쓰기밖에 없어서다.
자기 암시는 단순히 현 상황에서의 불만족에 기반해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바라는 꿈이 있다. 그 꿈은 현재의 삶을 지켜내고 꾸준히 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준다. 꿈이 없는 사람은 삶에 모든 게 충족되어 있어도 매 순간 마음 한편이 공허하다. 밥을 먹어도 공허하고, 사랑을 하고 있어도 공허하고, 무언가에 100% 집중하지 못한다. 말 그대로 산만하다. 결국은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목표에 향해가는데 그 목표를 향해 몰입하는 과정에서 자기 암시가 필요한 것이고, 비우기는 자기 암시를 할 때에 주변의 너저분한 것들을 모두 버리고 본질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는 그 비우기를 글쓰기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 글쓰기는 곧 비우는 것이고, 비우는 것은 곧 자기 암시를 만들고, 자기 암시는 곧 꿈을 이루는 논리다.
사람들이 자기 암시에 대해 가장 오해하는 것이, 무언가 계속 말이나 글로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10년 안에 백만장자가 될 것이다‘
‘나는 2년 뒤, 원하는 시험에 합격할 것이다’
‘나는 자신감 넘치고, 행복하게 오늘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이런 말이나 글들로 내 삶에 계속 인풋을 넣어 채워야 한다고 여긴다. 근데 결국 자기 암시는 본질만 남기고 다 비워내는 작업이다.
우리가 요가나 명상을 하는 이유가 뭘까? 왜 숨을 깊게들이쉬면서 숨소리에 집중하는 걸까? 산속에 절에 가면 목탁 두드리는 소리만 가득하고, 5성급 고급 호텔에 가면 클래식 음악이 나온다. 아무 생각 없이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그 상태를 온전히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그걸 휴식이라고 한다. 유튜브에 수면유도음악을 검색해 봐라. 빗소리, 장작 타는 소리, 백색소음만 가득하다. 가사 있는 음악은 찾아볼 수 없다. 왜? 가사 있는 음악을 들으면 머릿속에 그 가사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을 하게 되거든. 그럼 잠이 안 온다. 생각을 비우는 작업, 긍정확언으로 이어지는 그 길이 바로 '비우기'다.
오랜만에 본가에 와 어릴 적 썼던 일기장 묶음을 꺼내본다. 20년 전에도 일기장 표지는 톰과 제리였구나. 이때는 한 학년에 45명이나 있었구나. 어떤 날은 일주일이나 일기를 미뤄 하루에 7일치를 쓴 날도 있네. 그때는 쓰면서 방학이라 선생님이 눈치를 못 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썼던 글이었는데 지금 보니 신기하게도 다보인다. 그렇게 꾸역꾸역 억지로라도 썼기에 지금 일상의 궤도를 조금씩 잡아가는 게 아닐까. 이렇게 어릴 적 우리는 하루에 있었던 일을 일기장에 채우기 위해서 일기를 썼다면, 지금 성인이 되어 쓰는 글쓰기는 비우기 위해서 쓴다. 검사하는 선생님도 없다. 심지어 그때의 그 하늘 같았던 선생님이 지금의 나보다도 어리다. 오로지 내 내면과의 싸움을 하기 위해 글을 쓰고 빈종이를 채워나간다. 비우기 위해 채우는 역설의 미학.
고작 삼십몇 년 밖에 살지 않은 인생이지만 지난 인생을 돌이켜보면 행복은 참 짧았던 것 같다. 간헐적 행복 속에서 고통스럽고 잘 풀리지 않는 날들만 가득했다. 글을 쓰는 건 어쩌면 그 없는 행복을 손톱만큼이라도 연장하고자 내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몸부림 아닐까. 그 몸부림 덕에 과거의 내가 희미하게나마 원했던 길을 향해 징검다리를 건너고, 산을 넘고, 언덕을 넘고, 온갖 장애물을 넘어 그나마 그때 원했던 싱크로율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글쓰기를 시작하거나 오래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의 글쓰기 목적은 쓰면서 모두 분출하는 것이다. 마음의 응어리와 근심, 걱정, 스트레스, 삶에 대한 반성과, 후회, 미련을 모두 글에 담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울적한 날에는 일기를 쓰고 수첩을 꺼내 끄적인다. 이는 생각정리를 넘어 쓰면서 비우는 데 초점을 둔다. 그래서 글을 써본 사람과 써보지 않은 사람은 이 경험이 있냐 없냐 차이로 나뉜다. 쓰면 모든 게 비워져 다시 휴지통에 무언가 담을 수 있는 용량이 내면에 생기는 것만 같다. 실제로 쓰고 나서 그 <휴지통 비우기>를 실현하면 그 근심과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쓰게 되고, 오히려 안 쓰는 날에 더 몸이 찌뿌둥하다. 헬스를 좋아하는 헬창이 이런 마음이겠지. 쓰지 않으면 마음의 응어리 하루치가 배출되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있는 느낌. 매일 글을 쓰면서 내 스트레스도 배출하고, 글쓰기 실력도 늘고, 책도 쓰고, 멋진 선순환이다.
모든 삶의 부분들이 본인의 추억이고, 소중한 순간들이라 비우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멋진 20~30대로 기억하고 싶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살았다 해도, 40대가 되고, 50대, 60대가 되면 매듭지어야 하는 순간이 분명 온다. 인정하기 싫지만 언젠가 다 비워야 하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어떻게 정리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