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 사회를 엿보다
한국 인적자원으로 컸고 인적자원으로 망한다. 정확히망한다는 표현보다 한국인 개개인의 삶은 분노와 우울속 황폐화된다. 이게 무슨 말일까. 난 오늘 교육과 학벌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망하는 시작은 교육이고 교육경쟁 끝엔 큰 부작용이 뒤따를 것이란 얘기다.
돈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돈이 셀 수 없을 만큼많아도 불행한 삶이 있다. 어떤 이상적 기준이 조직화되고 획일화된다는 건 그 안에서 곪아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분명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들의 일상적인 삶과 부작용의 간극은 한없이 벌어져 삶에 치명적인 지장을 준다. 그리고 포기를 부른다. 포기하는 인원이 많아질수록 이는 곧 사회문제가 된다. 이미 지금 현대사회에 나타나고 있다. 청년고독사며 자살이며.
조금 더 맛있는 거 먹고, 어제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했던 조상들의 지혜는 오로지 ‘공부’였고, 원론적이고 정답 같았던 여기서 모든 씻을 수 없는 부작용이 생긴다.
대치동에 2년 정도 거주한 적이 있다. 내 옆집뿐 아니라 주변 빌라촌엔 강남의 중학교, 고등학교에 자녀를 보내고자 위장전입을 서슴지 않는다. 월 60~70만 원씩 세를 주면서 빈집을 한 번도 들리지 않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녀를 강남 8학군 학교에 보낸다. 그게 마치 명문대학교를 보내기 위한 지름길인 양, 아니 이미 거의 보냈다고 부모들은 생각한다. 공부 잘하는 무리에 있으면 공부하는 척이라도 한다는 일차원 논리다. 그렇게 그 자녀는 죄 없이 피나는 경쟁 속에 소리소문 없이 스며든다.
수능을 앞둔 고3 자녀를 둔 학부모는 늘 이런 말을 한다.
“수능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앞으로 인생에 무수한 일들이 펼쳐질 거고, 어떤 결과를 얻든 그 자체로 너무 고생 많았고, 새로운 삶을 지금부터 다시 펼치면 돼”라고. 근데 그런 말을 하는 은연중에도 부모는 장담컨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노력한 만큼 결과가 잘 나와서 좋은 대학교에 갔으면 좋겠구나’
차마 이 말까지는 자녀에게 할 수 없다.
지위 외부효과(status externality)라는 말이 있다. 부모가 자녀의 인적자원 수준을 다른 아이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것을 말한다. 이 현상은 유독 한국, 중국 이 두나라만 전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어떻게든 내 옆 학부모 자녀보다 내 아들, 딸이 더 똑똑해야 하고무조건 좋은 대학교에 가야 한다. 중국도 꽤나 비슷한 점이 많은데 한국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다.
중국도 ‘가오카오’라 해서 한국의 수능처럼 이 날은 비행기도 안 뜨고 차 클락션도 안된다. 특히나 중국은 더 심한 것이 인구가 공식적으로만 14억 명이 넘는다. 전교 1등은 마다하고, 명문대는 한 성에서 10등 안에 들아야 갈 수 있을 만큼 입시전쟁이 치열하다. 성은 총 56개가 있고, 한 성이 Province개념으로 경기도, 충청도 같은 ‘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중국은 뭐 그렇다 치자. 한 성에 인구가 많은 곳은 1억이 넘고 북경대, 칭화대 같은 명문대는 입학정원이 정해져 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심지어 국가정책을 정책 자녀를 한 명만 낳도록 정해왔기에 몰빵 하는 개념으로 최근 20년간 교육열이 크게 상승했다. 근데 중국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 중국도 물론 좋은 대학 가면 성공길이 펼쳐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긴 하나, 한국처럼 학벌에 목매지 않는다. 그래서 창업문화가 발달돼 있다. 중국에 가보면 안다. 앞으로 이 나라가 세상을 주도할 거라는 확신이 선다. 알리바바의 성공신화를 필두로 중국에선 현재 7초마다 하나씩 스타트업이 생긴다. 어떤 학생이 낮은 지방대 학벌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에 목숨 걸게 아니라 창업을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한다. 학벌에 발목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인만의 가치를 구현하고 세상에 이로움을 주고자 하며 그중에서도본인이 재미있는 일을 한다. 정부지원도 잘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마인드셋부터 다르다. 이해하기 쉽게 한번 비교해 보자.
(한국인) 학벌이 안 좋은 대학생:
’아, 난 이미 인생의 출발선에서 진거야. 좋은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서는 이 학벌로는 한참 부족하니, 학벌을 안 보는 전문직에 아예 도전해봐야 하나? 아니면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야겠다. 영어나, 제2 외국어를 하면 명문대학생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 차별화는 될 거야. 꼭 돈을 많이 벌고,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00 기업 다닌다는 자랑스러운 자식으로 남고 싶다.
(중국인) 학벌이 안 좋은 대학생:
내가 비록 북경대, 칭화대, 복단대는 못 갔어도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다른 분야가 있으니 이 분야로 비즈니스를 한번 해봐야겠다. 굳이 꼭 돈을 처음에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어디 보자. 한 달에 내가 지금 먹고살려면
80-90만 원 정도면 충분하니, 이 정도만 벌어도 충분하니 일단 도전해 보자. 안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는 거야. 뭐 어때.
이렇다. 꼭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해야겠다가 아닌, 본인 삶의 가치구현을 먼저 따진다. 돈을 만약 많이 벌지 못한다? 그냥 많이 벌지 못하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산다. 연애하고 애 키우고 할 거 다 하면서.
학벌 좋으면 당연히 좋다.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여기서 느낀 명제하나는 십몇 년간 좋은 대학 가려 노력했던 보상의 간극 차이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학벌과 개인을 동일시하는 걸 넘어 과대포장과 신격화를 일삼는다. 학벌 수준으로 그 사람자체의 매력과 신뢰를 재단한다. 예를 들어보자.
아픈 곳이 있으면 우린 보통 병원에 간다. 근데 어떤 사람은 본인을 진료하는 원장의 학력을 본다. 그리고 명문대생이 아니면 그 병원에 가지 않고 다른 병원을 찾는다. 학벌이 신뢰의 척도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 의사는 실력이 어떻든 말든 학벌로 필터링당한 거다.
이 의사를 우리는 대개 ‘의사 선생님’이라고 표현한다. 자, 선생님이라니. 의대 나오고 인턴, 레지던트, 국시 합격하고 나면 의사면허가 나온다. 의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거다. 근데 우리는 이들을 의사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의학을 공부했고, 할 자격이 있는 졸업생일 뿐이다. 결국 이 선생님은 그 의학경험의 숙련도와 능숙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인데 우리는 ‘애초에 어디서 학사 공부를 했냐의 잣대’를 가장 먼저 들이댄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학벌 이후의 행보인데도 우리는 이를 망각한다.
능숙도와 숙련도로 개인을 판단하는 건 물론 나 스스로도 아직 대한민국 사회에선 시기상조라 느낀다. 주변에 명문대학생들마저 본인은 기득권이라 여기고, 당연히 대기업이나 전문직 직업은 당연히 가져야 한다고떠들어대고 있으니. 이 자체가 건방지다는 게 아니다. 그걸 가르치고 받아들인 이 문화 자체에 대한 애석함이다. 오죽하면 내가 어릴 적 누군가 꿈을 물으면 ‘의사선생님’이라고 답했을까. 의사가 어떻게 되는 거고, 어떤 걸 배우는 지도 모르는 그 나이에 꽤 근사하고 좋은 걸 말하고 싶었나 보다. 아쉽게도 무의식적으로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부모에게 습득된다.
사람은 왜 능숙도와 숙련도로 평가되어야 할까. 인생은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결정되고 치부될 것이 아니라 그냥 계속 쭉 가는 거라 그렇다. 만약 한 가지로선택될 거였다면 한국사회의 인생이 출생으로 잘못된 노비들,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근데 그게 아니지 않나. 만약 그게 맞다면 앞선 예시로 든 부모가 말한 ‘수능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이라는 충고는 사실상 그게 전부여야된다. 그날 긴장도 하지 말고 100% 본인의 모든 정신을 쏟아부어 최상의성과를 내야만 한다. 그 조그마한 19살의 아이들은.
회사에 어떤 명문대졸업생이 신입사원으로 들어왔다치자. 면접 땐 당차게 이 회사의 00 사업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고, 나중엔 매출을 극대화해 주인의식을 갖고 회사를 키워가고 싶다. 근데 처음 들어와 보면 알겠지만 청소나 제대로 하면 다행이다. 회사 보안 폴더, 회사 취급품목이나 제대로 외우면 다행이다. 복사기 사용법을 설명해 줘서 한 번만에 알아들으면 그 자체로 잘하는 거다. 결국은 이 명문대학생도 와서 차근차근 배우면서 본인만의 숙련도와 능숙도를 회사에서 쌓아간다.
유명 예능 PD가 있다. 서울대학교를 나온 PD 신입을 한 명 뽑고, 일반 대학을 졸업한 PD 총 두 명을 뽑았다 치자. 나중에 서울대 나온 사람만 더 키워줄까? 본인의역량과 비법을 다 전수해 줄까? 나머지 지방대 한 명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까? 절대 아니다.
예시는 수도 없이 많다. 일타 강사 한 달에 몇백억씩 버는 메가스터디 현우진 수학강사나, 정승제도 똑같다. 스탠퍼드 대학교 수학과 나온 사람 당연히 몇백 명씩 매년 나온다. 그들이 전부다 100억씩 벌까? 그럼 정승제는? 경희대 나왔는데 경희대 동문 중 취업 못한 사람도 부지기순데? 결국은 숙련도가 정답이란 거다. 그들이 그렇게 지금 잘 나가는 이유는 모두가 똑같은 수학문제를 풀 줄 아는데 어떻게 하면 더 잘 푸는지 본인만의 스킬과 요령을 숙련도 있게 더 잘 가르치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이다. 곧 컴백하는 연예인 중의 연예인 지드래곤도 마찬가지. 지금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어떻게 하면 무대퍼포먼스를 더 잘 낼 수 있는지, 노래와 랩을 잘할 수 있는지, 작사작곡을 할 수 있는지 등 수없이 긴 무명의 연습생끝에 본인만의 노하우가 쌓였기 때문이다.
흑백요리사 같은 예능도 둘이 흑과 백 계급을 붙여 경쟁을 시키는 우리나라다. 그걸 재밌다고 다 돌려보고 있다. 경쟁이 일상이 된 단면을 보여주는 가장 극렬한 예시다. 이런 사회는 결국 누가 만들었냐를 생각해 보면 가진 기득권세력들이 그 명성과 부를 잃지 않기 위해 물려 내려온 것이다. 숙련도를 가진 돌연변이들이 더 올라올 수 없게 더 강하게 짓밟으라고. 오죽하면 우스갯소리로 이들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도 그 죄가 덜한 느낌이다.
의사나, 변호사 이런 선망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프로필엔 왜 명문대학교 학사 졸업이라는 말이 젤 위에 올까를 생각해 보자. 그 든든한 학벌이라는 걸 내려놓고 자본주의에서 0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결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그렇다. 무기 하나 없이 다른 사람과 똑같이 전장에 나가는 게 두려워서 그렇다. 명문대라는 타이틀이 뒤에 있기 때문에 야생에서 그렇게 그 누구와도 맞짱을 떠도 든든한 것이다.
이 기득권의 막강한 힘을 한 개인이 바꾸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걸 알기 때문에 방법은 딱 하나뿐. 그 기득권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에게, 그 자녀는 커서 또 그 자녀에게, 계속 조리돌림을 한다. 공부하라고. 더 악착같이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가라고. 그래야 아주 높은 확률로 기득권자가 된다고.
이때까지 이 글을 적는 내가 현실 자체를 너무 나이브하게 받아들인 것도 있다. 부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말한 이상적인 사회에서도 단점은 물론 상존한다. 직업의 귀천이 없다면 근로자의 책임감 또한 결여될 테고, 양질의 결과물이 나오기 힘들 것이고, 기업과 사회의 질적인 성장을 이루기에 무리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타지에서 느낀 현대사회의 고찰의 일부일 뿐. 정답을 말해줄 수도 없고, 그럴 자격도 되지 않는다. 다만, 이 암묵적인 계급화는 만약 한국사회에 문제가 터졌을 때 분명 그 원인에 포함될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이 거대한 사회문제를 곪아 터지기 전에 해결하기 위해 적어도 나는 대체 먼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본다.
오늘보다 더 나은 모델과 더 나은 생각들이 자리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