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그리 Nov 01. 2024

한국 청년은 왜 우울한가

우울에 대하여

그동안 빤히 현실에 존재함에도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예 언급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일에 자극적으로 썼다. 한 명이라도 글을 읽고 바뀌었으면 하는 작은 희망의 일환이었다.

최근 은둔•고립 청년이 50만 명, 우울증은 100만 명에 달한다는 소식을 접하곤 먼저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보다 화가 났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어떤 해결책도 말할 엄두가 안 났다. 이건 뚜렷한 해결책이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설령 있다 하더라도 눈 가리고 아웅 식밖에 안될 걸 알기 때문이다. 생기면 일시적으로 덮어버리고, 또 생기면 덮고. 이래서 인간의 감정에 관한 문제에서는 대책강구에 초점을 두고 말하는 건 굉장히 편협한 시야를 자랑하는 꼴이다. 일은 터지고 수습해 봐야 또 터지기 마련.

우울이 마치 늘 왔다가는 감기처럼 가볍게 여겨지는 이 현대사회에서 진정어린 해결책은 바라지도 않는다.제일 중요한 건 그 원인을 알아야 한다. 청년들에게 우울감이 생기는 원초적인 이유 말이다.


'우울'이라는 건 근본적으로 옆에 아무도 없다는 고독함이나, 돈이 없어 궁핍한 자기 연민, 인생에서 종종 닥치는 불행한 이벤트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다. 있다가도 곁에 없는 게 사람이다. 미래를 견주어볼 때 고독함은 옆에 사람을 언젠가 만들면 되는 거고, 돈은 벌면 되는 거고, ‘인생사 새옹지마’라 하여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좋은 일도 생긴다. 근데 우울은 인생이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을 때 생긴다. 그만큼 취약성이 드러나지 않는 감정이나, 대신 한번 걸리면 헤어 나오기가 매우 힘들다. 그만큼 본인은 희망이 없을 거라는 것에 대해 그토록 오래 고민하고 참아왔던 반증이기에상처도 깊어 그만큼 치료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누구라도 알면 도와주는데, 아주 높은 확률로 우울증 환자들은 본인이 그렇다는 걸 어떻게든 감추려 하기에알기도 힘들다.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이나, 충동적인 어떤 위험한 행동이 발생하고 나서야 모든 히스토리가드러난다. 그래서 전문적인 도움을 꼭 받아야 하는 병이다.


우리보다 못 사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렇게 가난해도애 다섯 명, 여섯 명 낳고 잘 살고, 한 달에 돈 100만 원꼴 버는 옆나라 중국도 없으면 없는 대로, 거기에 맞게 행복하게 사는데 왜 이토록 부유한 나라에서 사람들은우울증에 걸려 자살까지 하면서 괴로워하는 걸까.

누구는 이 원인이 부동산에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이 안 되는 현대판 고용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누구는 어릴 때부터 옆사람을 친구로 보지 않고 경쟁상대로 가르치는 교육문제에 있다고 한다. 아니면 내 자산과 월급과 직업을 타인과 비교하는 한국인들의 종특 비교사회가 문제라 한다. 특히 비교문제에 대해 첨언하자면 가까운 내 주변인과의 비교가 아닌 인터넷상 익명의 불특정 누군가에게 느끼는자의식과잉과 열등감이 문제가 심각한 된다. 모두 맞는 말이다. 현대인의 우울의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 원인이 맞다.


근데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원인은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다. 우울증을 앓는 청년에게 이제 쉬지 말고 나와서 일하라고 강요하는 기성세대는 우울증을 겪지 않아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일하기 싫어 사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생겨 한없이 무서운 사회를 피해 숨은 것이다. 그 트라우마는 직장상사의 폭언, 연인의 배신, 가족, 친구와의 절연 등 그 어떤 하나의 실패에서 온 것이다. 피할 곳이라고는 내 방안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있는 것이다. 이 한국사회는 도전했다가 한번 삐끗하면 그냥 끝이다. 그대로 매장당한다. 20대든, 30대든, 40대든 세대를 막론하고 그냥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린다. 특히 나이가 있으면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기에 평생 노가다나 허드렛일 하며몇십 년을 고생해야 한다. 사업하다 망하면 본인이 모든 걸 책임져야 하고 막대한 빚, 사회적 시선, 타인의 질책 속에 한없이 무너져 내린다.

중국에 스타트업 붐이 일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실리콘 밸리는 어떻게 발전했나. 결국 다 스타트업이 커서 지금의 산업클러스터가 형성된 것이다. 태평양 건너 다른 선진국 얘기라고? 쿠팡, 토스뱅크, 배달의 민족, 오늘의 집 우리 삶 가장 가까이서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이 모든 기업도 2024년 기준 이제 10년 갓 지난 스타트업이었다. 우리가 익숙해서 잊었던 것뿐. 근데 이 사회는 그걸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라던가 최소한의 안전망이란 게 없다. 한없이 냉혹하다.


청년들은 똑똑하다. 이제 어떻게든 본인은 손해보지 않으려 하고, 이익을 취해야만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위험한 도전엔 소극적이게 된다. 그래서 모두가 안정적인 걸 선호하는데 그게 대기업, 공무원, 전문직 직종이다. 전문직도 사실 요즘은 꺼리는 추세인 게 2~3년 정도 시간투자를 해야 하고 그 투자대비 결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 모험을 하는 꼴이라 기피한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고, 인생은 불확실성의 연속이기 에 청년들은 삶이 고될수록 더 안정적인 것을 찾아 나선다.


직장인 앱 ‘블라인드’에 들어가면 이 실태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본인의 이름은 익명이나, 회사이름은 모두 공개되어 있다. 이게 영어 'Blind' 이름 그대로의 취지다. 회사 이름으로 본인을 소개한다. 본명은 숨긴 채,회사이름만 걸고 '셀소'를 하는 사람도 여럿 봤다. 셀소는 셀프소개팅의 준말이다.

“킹차갓무직(현대자동차 사무직), 대답이 됐으려나?”

요즘 가장 유행하는 말이다. 밈처럼 퍼진다. 블라인드 상에서 만난 둘이 대화를 나누는데 어디 다니길래 무시하냐는 가벼운 말다툼이 있었고, 이에 그중 한 분이 저렇게 대답했다. 상대방이

"그 분야는 잘 몰라서요"

라고 하자,

"그럼 그냥 가만히 있어"

라고 했단다. 기가 찬다. 권력과 지위, 본인이 속한 집단과 본인을 동일시하는 현대사회의 민낯이라 할 수 있다. 집단이 곧 이름이며, 본인이 속한 집단(회사)은 가장 든든한 신분보장체계이기에 이걸로 우월감을 과시하거나, 무시와 경멸을 하기도 한다. 현세대의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한마디다. 이 울타리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낙오되며, 다시 일어설 수 없다. 꼭 이 울타리에 들어간 사람만 행복하고 나머지는 불행하다는 것이 아니다. 이 울타리를 괴롭고 불행하다고 못 견뎌 나와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나온 사람도 많다. 이들에게 어떤 삶을 살게 해 줄 수 있는지,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 그것이 이 사회는 정답을 주기는커녕, 쉴 시간도 용납 안 하고 100%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문제다.


자, 그럼 이 소위 낙오됐다고 표현한 이들은 어떻게 스트레스 풀까. 물론 다시 일어서기 위해 하루 24시간을 쪼개어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겠다. 근데 대부분이 자포자기하며 중소기업에 들어가 퇴사를 밥 먹듯 하며 자리를 못 잡거나, 백수로 지내는 본인을 한탄하며 즉각적인 쾌락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빠져든다. 술, 여자(남자), 그리고 각종 유흥이나 도박.

어떤 이들은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유흥업소에 발을 들이기도 한다. 그 어떤 것에 유혹되지 않는다면 무기력증으로 인한 고립. 결과의 표본은 크게 다양하지 않다.


단순히 ‘청년’ 즉, 한창 20대, 30대인 생산가능인구가 일을 하지 않아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일 수 있다. 실제경제발전에 있어 젊은 인구층의 노동력은 막대한 영향을 차지한다. 매년 GDP 성장률이 5% 이상인 베트남은전국민 50% 이상이 20대, 30대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경제적 부분을 차치하고서도 개인의 우울은 사회간관계의 건조와 몰락을 부르는 치명적인 요인이 된다.  이런 인지편향은 더 불행하고 우울한 사람을 낳고,인간관계에서 불신과 혐오만 재생산될 뿐이다. 범죄와사기는 더 판을 칠 것이고, 악순환의 굴레에 빠진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상처받기 싫어 자기 방어 목적으로 관계에 선을 긋는다.  혼자는 그렇게 더 적극적으로 혼자가 된다.


우리는 이 우울한 청년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 어떤 위로도 그들에겐 위로가 안된다. 힘내? 잘될 거야? 힘이 없는데 어떻게 힘을 내나. 밖을 안 나가고, 사람도 안 만나 잘될 게 없는데 뭐가 잘 되나. 책임감 없는 위로는 그들에게 한번 더 돌을 던지는 격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쌓인 상처가 곪아 터지려는 것을 스스로 잡고 숨기고 있는 것. 누굴 만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만난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이미 한번 상처받은 상황에서 그들을 대할 땐 관조의 태도만 요구된다. 상처가 아물 시간을 주는 거다.


사람 인생사는 늘 좋은 일만 있을 수 없다. 안 좋은 일도 생기다가, 좋은 일도 생기다가, 인간은 그저 발생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미래를 예측할 수밖에 없다.

이 우울은 본인만의 대안을 찾는 과도기라 생각한다. 단, 본인만의 그 대안은 근데 꼭 사람들이 좋다고,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닌 진짜 본인이 좋다 생각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그 대안을 찾으려 죽어라 애쓸 필요도 없다. 무언가를 도전해보고 싶고, 우울을 떨쳐낼 시간이 분명히 각자에게 올 거라 본다. 밖에 바람을 쐬면서, 산책을 하면서, 지저귀는 새나 추운 날씨 죽지 않고 피어있는 꽃을 봐도 생각이 달라진다. 상처가 나면 약을 바른다 해서 바로 아물지 않듯, 일단 아물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낭떠러지 앞을 어떻게든 안 떨어지려 버티고 있는 심정이라 생각하면 된다. 본인이 이토록 힘든데 누군가가 손 내민다 해도, 도움을 준다 해도 그 순간 일시적이며 다시 낭떠러지 앞으로 가는 건 똑같다. 우리는 그저 곁에서 꾸준히 지켜봐 줄 뿐이다. 그 자체로 그들에겐 힘이 된다. 힘들거나 죽고 싶은 순간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혼자보단 둘이 낫고, 둘보다 셋이 낫다. 모두가 같이 영원할 수 없고 죽는다 생각하면 혼자 외롭게 그렇게 서서히 사람들에게잊힌다생각하는 게 얼마나 덧없고 억울한가. 살아있는건 더불어 사는데 그 의미가 있다.


어쩌면 통제할 수 없는 불행, 희망의 부재는 대개 모두가 작게나마 가지고 있다. 누가 더 깊이 느끼냐의 차이일 뿐. 그들은 느끼는 감정의 폭이 넓어 힘든 사람들이다. 일반인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일에도 그들에겐 더 큰 세계가 온다.

이제는 우울이 깊어 그 어떤 희망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곁에서 그 우울의 끝을 함께 바라봐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린 진짜 중요한 걸 너무 놓치며 산다.


이전 23화 한국인은 무엇 때문에 망할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