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인지 100% 활용법
메타인지란 뭘까. 요즘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시되는 영역 중 하나다. 메타인지란, 정확히는 한 차원 높은 능력을 말한다. 그 한 차원 높은 능력이라 함은 현대사회에선 본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다.
한마디로 이 정의는 사업이나, 인간관계나, 공부나, 직장생활이나 나이를 먹으며 그야말로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중요한 코어 단계라 할 수 있다.
어떤 경험을 함에 있어서 그 경험을 말 그대로 '잘' 하기 위해서는 이 메타인지는 현대사회에서 무조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어릴 때부터 내게 필요한 경험만 선택적으로 접근하며 돈과 시간을 아끼는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십 년 전, 이십 년 전엔 이걸 일찍 몰라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앞선 글에서 잠깐 언급했던 린치핀처럼, 사회가 말하는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예를 들어 공부 잘하는 사람은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궂은일 도맡아 하면서 돈 벌어야 하고. 뭘 색다른 걸 좀 해보겠다고 나대는 순간 이미 그 인생은 망한 거였다. 머리도 못 기른 세대에서 태어난 본인의 운명을 탓해야 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 용 거의 안 났고 지금은 더 안 난다. 좀 깨어있다 하는 당시 대학생, 청년들도 누군가의 메타인지가 높으면 그저 박수쳐주고조금 늦어도 시간이 흐르면서 남들이 하는 거 따라 하면 먹고살 정도는 되니 아무도 그 중요성에 대해 언급도, 강조도 하지 않았다.
자, 근데 이제는 삶이 많이 바뀌었다. 평생 못 만져볼 돈을 버는 사람들이 이 메타인지의 공식을 완전히 바꿨다. 이젠 이 메타인지를 일찍 깨달을수록 삶의 척도 자체가 바뀐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말고, 성공하고 말고를 떠나 죽을 때까지 운명 전체가 여기서 갈린다는 것. 왜냐? 이제는 획일화 속에 진짜 혼자만의 뭔가를 가진 사람만 살아남을 테니까. 남 따라 묻혀가다가는 본인이 진짜 묻힌다. 그렇다면 이 메타인지를 어떻게 하면 높일 수 있을까.
당연히 경험에서 온다. 근데 어떤 경험? 바로 ‘결핍의 경험’이다. 자. 생각해 보자. 흔히 현대인들이 말하는 자기 객관화란, 건방지거나 본인의 수준보다 높은 걸 바랄 때 겸손하라고, 더 나대지 말라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본인이 어느 정도 현실자각이 이루어져야이 각박한 현실에서 그나마 낫다는 거다.
‘인생은 실전이다’라는 말처럼. 방구석에서 아무 경험 없이 이상만 좇는 삶은 언제 어디서든 삐걱대기 마련이다.
근데 반전 하나 말해주겠다. 남 눈치만 보는 민족 한국인. 우리가 늘 불편하다고 피했던 자기 객관화의 또 다른 요소는 역설적으로 본인이 잘하는 것을 일찍 아는 데에 있다. 이게 진짜 메타인지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 이것도 역시 결핍. 왜냐하면 이 결핍은 본인이 관심 없으면 결핍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친구집에 놀러 가면 우리 집보다 책이 많으면 늘 질투를 하고 (읽지도 않을 거면서) 부모님께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글을 쓸 때에도 나는 이해가지 않는 문장인데 혹은 나는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도 파악이 안 되는 주제에 글을 쓰는 누군가가 있다면 질투가 났다. ‘아, 난 이 부분에 너무 부족하구나’.
어린 마음에 이런 결핍을 느꼈다. 그래서 글을 쓰는데 한자가 도움이 된다고 하면 나도 따라 학원을 다니면서 어떻게든 달달 외워 한자 2급을 땄고, 백일장에 누가 지원한다고 하면 나도 따라 지원해서 상을 타오곤 했다. 그 이후에도 계속 연구했다. 언어와 관련해서는 저 사람은 도대체 뭘 하길래 언어영역 문제를 푸는데 밑줄하나 안 긋는 걸까. 저 사람은 어떻게 공부를 하길래 영어단어를 저렇게 빨리 외울까. 미국, 멕시코에서는 한국인과의 연락을 아예 차단한 적도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잘하지? 대체 뭘 했지?
온통 이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안 가르쳐주면 훔쳐 읽고, 카피하고 그랬다.
성격은 또 어땠나. 반대로 말 많고 친화적인 성격이었다. 한 번은 반장이 아니라 부반장에 뽑힌 적이 있는데 의기소침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줄곧 레크레이션이나 MC를 도맡아 했고 조별과제에서도 늘 발표는 내가했다. 그러면서 최근 또 어렴풋이 그때 가졌던 그 생각에 또다시 사로잡혔다.
아무것도 없이 라이브방송으로 한 시간 떠드는 유튜버를 보고는,
어떻게 저렇게 잘하지? 대체 뭘 했지?
또 똑같이. 이처럼 내가 상대보다 부족하다는 생각이 반복될 땐 결핍이 맞다.
자, 근데 내 친구 중에는 축구를 굉장히 잘하는 친구가 둘 있다. 아직도 이들은 주말만 되면 축구를 한다. 30대가 넘었는데도 이렇게 축구열정이 있는데 학생 때는도저히 얼마나 잘했겠나. 근데 그걸 결핍이라고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축구를 잘 못하지만 그냥 못하는 대로 살았고, 절대 내 친구를 따라서 축구연습을 한다거나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별로 없었다. 누군 내게 왜 축구를 못하냐고 놀릴지언정 그게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것도 전부 마찬가지. 음반을 낸 지인, 작품 전시회를 하는 친구 모두 존경스럽고 부러웠으나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자체가 안 든다. 그게 바로 메타인지를 아는 출발점이다.
나는 어디에 결핍을 가지고 있나. 어떻게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잘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있는지, 그게 만약 있다면 하루빨리 그 경험을 되짚어보는 일이 메타인지를 키우는 데 가장 중요하다.
꼭 무언가를 잘하지 않아도, 그냥 관심사라도 사실 상관없다. 컴퓨터를 좋아한다고 하면 전자기기에 관련된걸 계속 수집한다거나, 콘텐츠를 올린다거나, 취업에 깊이 몰두해 봤다면 본인이 겪었던 취업정보나 남들은모르는 경험을 어디다 올려 불특정다수에게 알려줄 수도 있고, 먹는 것에 관심이 많다면 맛있는 걸 해 먹어야한다는 욕구를 참지 못했을 테니 본인만의 요리 레시피를 인스타그램에 매일 올려서 공유할 수도 있다. 그냥 그렇게 본인이 겪었던 혹은 하고 있는 작은 경험들이 메타인지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꾸준히 뭔가 하는 사소한 것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지극히 평범한 본인의 삶을 바꾸는 Key가 될 수 있다.
이게 본인이 결국 잘하는 것임을 얼마나 빨리 인지하고 행동하느냐. 결국 이게 답인데 중요한 건 이걸 절대 자기 계발서라던가, TV나 각종 미디어, 지인 혹은 부모님의 권유로 발견하면 안 된다. 그러면 출발부터가 애초에 잘못된 거다. 그 출발은 본인의 결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수학문제라고 예를 들어보자. 내가 푸는 문제집은 해답지가 따로 있다. 방금 말한 예시는 문제집과 해답지를 동시에 놓고, 푸는 순서를 해답지를 먼저 보고 나서따라 푸는 거랑 같다. 이미 정해진 답을 알고 있는데 당연히 잘 풀리겠지. 그리고는 여기서 최악의 상황은 해답지를 보고 외워 푼 건데 본인이 수학에 소질이 있다고 착각하는 데 있다. 어떻게든 무슨 방법을 써서 본인 힘으로 그 문제의 답을 찾아내야만 메타인지를 키울 수 있다. 그게 내가 아까 말한 경험이고 결핍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너무 쉽게 입에서 "아, 나도 00이나 해볼까?"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그게 만약 00일을 하고 있는 상대방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이면 더 모멸감과 혐오감을 느낀다. 이 말은 즉슨 상대가 하고 있는 일 자체를 무시함과 동시에, 메타인지 없이 본인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명백한 사실 하나는 이들은 대부분 그 일을 하고 나서 일주일 아니, 이틀도 안돼 그만둔다.
흔해빠진 평범한 직장인이,
아, 나도 유튜브나 해볼까?
하는 거랑 결국 똑같은 맥락이다. 당근에 아직도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게 2개 있는데 바로 골프채와 고프로다. 좀 해보고 얼마 안 가 금세 포기한다. 영상하나 만드는 데에도 본인의 메타인지를 알고,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장의 최상위 포식자만이 유튜브시장에서결국 살아남는다. 이들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존경받아야 한다. 왜냐고? 메타인지를 그렇게 말하는 본인보다 최소 5년은 빨리 알았으니까.
단, 순수한 마음으로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손가락질해서는 안된다. 메타인지를 늦게 알았으니 지금이라도 찾아가려고 최소한의 노력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현재 그 자리에 위치한 사람이 본인이 지나온 허들이 높다고 비아냥대거나, 본인만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과대망상에 빠지는것도 큰 패착이다. 굳이 시작도 전에 상대의 기를 죽이면서 까내릴 필요는 없다는 거다. 오히려 응원해줘야 한다.
‘F*ck you money’. 욕이라 미안하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경제학 용어다. 본인이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할 때이 단어를 외치며 그만둘 때 드는 비용을 말한다. 청년세대에서는 ‘시발비용’으로 통한다. 즉, 이 정도 돈이 있다면 얼마든지 스트레스 풀고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는 것. 가령, 직장상사가 욕을 하고 괴롭힐 때 ‘꺼져’를 외치고 그만둘 수 있는 비용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그게 없기 때문에 오늘 아침도 우린 출근길에 오르는 거다.
메타인지를 얻는 이 방법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우리는 이 ‘F*ck you money’를 언제 어디서든 외치며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본인을 놀려대고 괴롭히는 모두에게 시원하게 꺼지라고 외치고 원하는 만큼 돈을 뿌려대는 그날까지.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