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진실
집 앞 투썸플레이스에 왔다. 스타벅스는 오래 있지 말라고 의자를 이상하게 만들어놔 한 시간만 있어도 불편해서 일어나게 된다. 일이란 걸 할 수가 없다.
아메리카노를 2/3쯤 마셨을 때, 드디어 자소서 하나를 완성했다. 처음에는 자소서에 내가 왜 해외에 갔고, 이 산업에 발을 들여놓고 싶고, 나는 이 회사에 대해 어떻게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꽤나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감성적이게 접근했다면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스스로성장했음을 느낀다. 확실한 건 먹는 거든, 운동이든, 공부든, 독서든 뭐든 많이 해봐야만 는다. 처음엔 누구나 서툴다.
회사는 회사다. 아무리 내가 감성적으로 적은들 회사는 뽑아주지 않는다. '너 우리 회사 되게 좋아해? 그래 한번 기회 줄게'가 아니라, '너를 왜 뽑아야 해?' 대한 답을 해야 한다. 아, 물론 산업은 가리지 않고 넣는다. 어차피 내 경험은 똑같으니까 적절히 기업조사 해주면서 그에 맞게 회사 이름만 Ctrl+F로 찾아 바꿔주면 그만이다. 이 작업이 귀찮더라도, 꼭 세심하게 봐야 하는 이유는 만약 서류전형에서 심사자가 이를 보지 못하고합격했을 시, 면접 가서 시간낭비만 하고 오는 꼴이기 때문이다. 내 지인은 하나은행을 신한은행으로 잘못 기재해 하나은행 면접에서 개 털리고 왔다고 한다. 그래도,
'기존의 경험에서 예상치 못한 역경에 봉착했거나, 어려움에 직면한 경우 어떻게 해결했고 거기서 느낀 점은 무엇인지 서술하시오'
하던가,
'이 회사에 입사한 이유는 무엇이며, 본인의 역량을 어떻게 발휘할 것인지 서술하시오'
이런 문항은 대기업 입사서류를 통과한 나로서는 이제식은 죽먹기라는 것^^. 왜냐. 이 김형규는 이미 어디서든 복사+붙여 넣기 할 수 있는 마법의 키워드가 있기 때문이지 암. 어디서든 쓸 수 있는 경험 몇 개 다른 파일에 깔아놓는 건 필수다. 이제 자기소개서는 감이 좀 온다.
처음에는 저기에 고난과 넣는데 감성적으로 접근했다.진짜 말 그래도 내 인생의 큰 역경. 해외에서 집이 안 구해져 당장 오늘 집이 없어 방황하던 날, 대학시절 선배들에게 과생활 참여 안 한다고 따돌림당한 날, 인턴 떨어져 질질 짠 날 등등. 이런 걸 적으면 X 된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한 적이 없어도 뭔가 그럴싸한 00 프로젝트나, 00 업무경험에서 나오는 힘듦을 적어야 하는 거였다. 아. 세상살이, 밥 벌어먹고 살기 너무 힘들어. 그냥 별거 없어도 그럴싸하게 적으면 그만이야. 인생은 기세야. 기세. 그냥 가는 거야.
자, 생각해 보자. 대학교 4학년 때 국제통상론에서 조별 프로젝트를 하는데 외국인 교환학생 프리라이더가 있었어. 그럼 당연히 내가 화가 나 안나. 싸우지. 참여 좀 하라고. 그래서 억지로 참여시켜서 내가 다하기 싫으니까 역할을 하나 줬어. 어떻게든 해오게 계속 쪼아. 받았는데 개판이라서 그냥 우리가 했어. 그래서 어찌어찌 A+받았던 수업이 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하냐.
'외국인과의 소통이 힘들어 조별 과제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조장으로써 리더십을 발휘해 우리 조의 문제점을 파악했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가진 이들과의 협업이 부족했다는 문제점을 인지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해당과제의 동기부여의 부재를 발견했습니다. 조장으로써 각자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사전에 체크해 ~~역할분담을 이끌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적어보는 거야. 허허. 소설 한 편이 따로 없다. 나이스. 원래 속고 속이는 게 인생 아닌가.
단, 이 회사에 입사한 이유를 밝히려면 이 회사가 뭐 하는 회사인지는 대충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걸 조사하는 데에 한 시간가량 소요된다.
그래도 이젠 최소 2시간 반~ 세 시간이면 하나를 완성하고 제출하는 데 어느 정도 도가 텄다.
아. 그런데 아뿔싸. AI역량검사도 해야 되네 여기는? 대기업도 아닌데, 요즘 참 별거 다 시킨다. 그러면 카페에서 못하잖아. 최소한 반팔티는 말고 셔츠라도 입고해야 하는데.
주위를 둘러본다. 이 카페는 비즈니스룸이 있긴 한데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단다. 하. 어쩔 수 없이 다시 집으로 향한다. 집만큼 편하게 면접 볼 조용한 공간이 없다.
요즘 이 AI역량검사는 거의 모든 회사에서 실시한다. 자소서를 쓸 때 같이 제출해야 하는 곳도 있고, 다음 전형으로 반영하는 곳도 있다. 확실히 AI가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다. AI에게 날 평가받는 시대가 오다니. 나 같은 인간은 갈수록 설 자리가 없어짐에 서글퍼진다.
나스닥 필라델피아 반도체 ETF ‘SOXL'이라도 풀매수 갈겨야 하나. 아. 나 돈 없지. 그래도 필기시험보단 나으니 해야지 뭐. 하. 전형이 진짜 길고 험하다. 먼저 자기소개 1분.
위에는 정장을 풀로 세팅한다. 그리고 바지는 팬티를 입는다. 괜찮다. 어차피 이 AI가
"잠시 일어나 보시겠어요?"
라는 돌발질문은 하지 않을 테니. 내 지난 면접 때처럼, 반팔셔츤데 정장을 벗어보라는 말은 절대 AI가 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이 AI가 내 약점을 들쑤실 정도로 뛰어나지 않을 거라 장담한다.
카운트 다운을 한다. 5,4,3,2,1.
이 회사에 입사동기를 20초 내로 말하란다. 아, 대충 얼버무리니 칼같이 자른다. 이 회사에 지원하기 위해 역량개발한 걸 30초에 안에 말하란다. 아, 또 얼버무리니 칼같이 자른다. 또 시답잖은 거 몇 개 물으니 끝남.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셔츠를 풀어헤칠까 생각이 잠깐 생각이 들었지만 벗지 않는다. 왜냐. 이 AI 녀석이 면접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런다고 감점을 줄지 누가 아나. 내 눈빛의 총명함의 정도라던가, 단정한 복장, 욕을 하는지 안 하는지, 이런 거도 다 데이터를 이 녀석에게 입력시켜 감점시킬지 모른다. 아. 너무 무서운 세상이다. 속으로 생각한다. 아. 언젠가는 인간 대신 이 녀석이 일을 할 날도 오겠구나. 그럼 지금보다 그때가 더 취업하기 힘들겠지?
다음은 AI랑 게임을 한다. 엥? 갑자기 게임이라고? 이게 무슨 소린가. 이 게임은 소문으로만 익히 들었는데 시작부터 괴랄하다. 길 만들기 게임이라고 규칙을 정해 울타리를 만나면 방향을 전환하고, 교통수단을 정해 손님에게 보여주는 게임도 하고, 도형 굴리기 게임도 하고, N-back 게임이라고 n번째 전의 사각형의 모양과 일치여부를 파악하는 게임도 있다. 아 스트레스받아. 이걸 어떻게 풀어 아무 대비 없이. 아니, 대비를 해도 못 푼다. 이건 아이큐 게임이다. 그냥 한마디로 머리 좋은 사람 뽑겠다는 건가.
마지막은 인성검사. 몇십 문항에 대한 답변을 하는데, 잘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해서도 안되고, 또 너무 안 좋게 답변해서도 안된다. 그 중간의 선을 교묘히 잘 지켜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 부분은 숨겨야 하고, 이 부분은 잘 드러내야 하고, 그래야 합격이다. 모회사는 이 데이터를 실제 면접점수와 동일하게 준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야 빵구야. 진짜 회사에서 일하기 너무 힘든 것 같다.
자소서와 이 AI역량검사 하고 나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다. 하. 오늘 뭐 했지? 죄책감이 든다. 아. 그래도 뭔가 하나 더 오늘 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다 '00공사 청년인턴 모집공고'가 눈에 띈다. 흠. 부동산 관련 공사구나. 흠. 과거 뉴스에서 비리 관련으로 좀 많이 들어봤는데. 여기도 전국으로 청년인턴을 뽑는구나. 그만큼 전국에 부동산이 많으니 민원관리나 이런 게 많을 거다. AI역량검사도 없다. 온라인면접대체? 헐. 꿀일 것 같다. 어? 부산권 37명이나 뽑네? 37명. 요즘 같은 취업난에 경이로운 숫자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벌써 감이 온다. 당. 연. 히 정부에서 취업 안된다고 하도 청년들 난리를 치니까 용돈이라도 좀 쥐어주자는 차원에서 인턴들 이렇게 뽑는 건 아닌지 합리적 의심이 든다. 이것도 붙으면 취업률에 반영이 되거든. 이 개 같은 정부. 개 같은 대한민국.
자, 어디 보자. 도전정신과 입사의지, 직업윤리를 본단다. 직업윤리? 직업윤리를 보는 회사가 그렇게 큰 부동산 비리를 저질렀다고? 어허.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건지, 아니면 모든 입사지원자들이 과거에 지금의 나처럼 가면을 쓰고 이 회사만을 위해 몇 년을 기다렸다는 거짓 충성심을 보여준 건가. 실제 인성은 개차반일수도. 이 세상은 참 많은 면에서 왜곡되고 꼬여있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뭐 나는 지금 가릴 처지가 아니다. 어제 그래도 꼴에 자기 관리는 해야 하니 헬스 한다고 반스 슬립온 하나 샀더니, 지갑에는 이제 90만 원이 남았다. 용돈벌이라도 해야 집에서 인간취급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180만 원 최저시급이라도 벌어야 취업이 아니라도 이 ‘취준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내일은 심지어 은행에 가야 한다. 돈도 없는 놈이 은행 가서 뭐 할 거냐고? 내일은 화요일이다. 우리 동네 은행은 화요일 오전에만 동전교환을 할 수 있거든^^ 동전교환 전문가이기 때문에 미리 동전을 분류도 해놓는다. 이 저금통을 깨면 그래도 7-8만 원은 나오겠지. 작은 돈이지만 마음 한편엔 큰 안정감이 갑자기 자리하기 시작한다.
아까 썼던 자소서를 복붙 해서 이름만 바꿔 20분 만에 지원하고 컴퓨터를 끄고 산책을 나간다.
"엄마, 나 잠시 나갔다 올게~ 저녁은 안 먹어"
"저녁 안 먹어도 되겠어? 또 어딜 나가니, 백수가. 술은 마시지 마라"
"그냥 산책 가는 거야!!"
하루 중 산책하는 이 순간이 너무 좋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그래도 스스로 인생에 대한 성찰과 고뇌, 여러 상념이 오간다. 이렇게 성찰을 하고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하루하루 발전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한다.
카톡을 보니 사진을 업데이트 한 친구를 친절하게도 알려준다. 어제 엄마가 말했던 정현이의 카톡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이 걸려있다. 얘가 이렇게 말랐었나? 아까 본 AI면접도 그렇고 현대의학의 발전은 가히 놀라운 수준이다. 경섭이도 또 프사 업데이트를 했다. 셔츠를 멀끔히 차려입고 화장실에서 찍은 셀카다. 대충 보니 회사 화장실처럼 보인다. 이 녀석은 이제 대기업 화장실까지 자랑하고 다니네. 하. 열받게.
고등학교 친구들은 애 사진이 이제 하나 둘 올라온다. 와. 얘도 애를 낳았구나. 정말 알고 싶었던 전 여자 친구의 프사는 찾아보니 기본 프로필이다. 흠. 몇 달째 그대로다. 그렇게 꾸미는 걸 좋아하는 애가 기본프로필이라고? 자세히 다시 본다. 송금 버튼이 사라져 있다. 아. 나 차단당했구나. 가슴이 미어진다. 차단이라니.
인생 밑바닥을 찍긴 찍었구나, 새삼 느낀다. 내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돌아서놓고 이렇게 차단까지 한다고? 내가 무슨 바람을 핀 것도 아니고, 스토커처럼 매달린 것도 아니고, 성매매를 한 것도 아닌데.
괜찮다. 주식으로 몇천을 잃어도, 여자친구가 없어도, 결혼을 못해도, 취업을 못해도, 돈이 없는데 자녀가 있어도, 그냥 다 괜찮고 남이랑 비교만 안 하면 어떻게든 살아진다고 믿는다. 그게 내 인생 철칙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 잘하고 있어.
어느덧 벌써 여름이 갔는지, 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미치도록 덥고 괴로운 날에도 이런 서늘한 바람이 언젠가 찾아오듯 내 인생에도 언젠가 꽃피는 날, 아니 꽃 안 피어도 된다. 꽃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날 한 번쯤은 오지 않을까 스스로 되뇐다. 그렇게 슬리퍼로 질질 끌고 집으로 복귀한다.
-7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