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자기 객관화
경섭이와의 인생고민이 끝나고 경섭이 집에서 하루 잔다. 둘 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다. 이 오피스텔은 풀옵션에 한 달에 80만 원이란다. 쾌적하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아침 7시. 이제는 부산 집에 돌아가야 할 때다. 경섭이도 주말엔 여자친구를 만나서 놀 거라고 일찍부터 일어나 준비를 한다. 간단히 씻고 함께 집을 나온다.
"취준 잘하고, 힘들어도 그 시기는 언젠가 지나가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너도 직장 힘들어도 끝까지 버텨. 나오면 지옥이야. 파이팅 하고 인마! 좋은 소식 있으면 알려줄게"
그렇게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기차에서 마실 물을 하나 사서 기차를 기다린다. 조금 있으니 기차가 온다. 자리에 앉아 부산을 향해 가면서 생각한다.
'앞으로 난 면접 보러 몇 번을 더 서울에 와야 하고, 내가 일하게 될 곳은 과연 어딜까?'
이제 면접을 한번 봤다. 운 좋게 서류에 다 떨어지고 대기업 면접을 경험한 나로서는 오히려 경험이라 생각하고 덤덤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서류꼴랑 하나 붙었다고 자괴감에 빠지지도, 반대로 대기업 서류를 붙었다고 자만하지도 않는다. 그냥 운이라고 받아들이면 마음 편하다.
가만히 생각을 해본다. 지금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저 경섭이. 매일 대학에서 공부는 안 하고 학점경고받으면서 같이 술 마시던 애가 분명 맞다. 근데 그 친구가 분명 노력한 건 맞지만, 나보다 특출 나게 능력이 뛰어나서, 전문 자격증이 있어서 서울 광화문에서 자랑스러운 대기업 사원증을 매고 일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분명 적재적소에 운이 작용했다고 본다. 왜 운이냐고? 경섭이가 저 대기업에 서류를 넣었을 때 경섭이의 서류를 좋게 본 서류 담당자가 있었으니, 쟤를 통과시켰을 것이다. 면접에서 경섭이의 저 더러운 인상을 좋게 볼 수 있는 팀장이나 부장이 있었기에, 경섭이의 말 한마디에서 어떤 좋은 포인트가 있었기에 그를 붙였을 것이다. 단순히,
"방금 한 말 영어로 해보세요" 라든가, "어떻게 그럼 우리가 그 시장에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원론적인 질문에 대한 근사한 논리적인 답으로 경섭이를 뽑지는 않았을 테다. 왜냐. 어차피 신입사원 면접자들의 생각과 수준은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하기보다는 누가 더 참신하냐의 문제 아닐까. 결국, 이 운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가지를 많이 쳐놓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 인생 고민을 하는 사이 어느덧, 부산역에 도착한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숙취가 심하다. 면접을 봐서 긴장도 풀리고 피로가 극심해 택시를 타고 가고 싶지만 돈을 아껴야 한다. 통장엔 100만 원도 없다. 이 곳간이 조금씩 줄어드는 순간 불안하기만 하다. 고민도 않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솔직히 이 버스도 환승 없으면 진짜 부담스러운 돈이다. 얼른 돈을 벌어야 한다. 30만 원 밑으로 내려가면 쿠팡 알바를 알아봐야겠다 생각한다. 수입은 없는 상태에서 통장에 돈이 줄어드는 기분은 겪어본 사람만 안다. 경섭이는 절대 모르겠지? 힘들게 집에 버스를 타고 돌아오니 엄마가 찾는다.
"형규야, 면접은 어땠어? 진짜 고생 많았다. 우선 밥부터 먹어"
"엄마, 괜찮아 나 우선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한숨만 잘게"
"에이, 그래도 밥은 먹고 자야지"
날 챙겨주는 건 역시 엄마밖에 없다. 설령 나중에 대기업에 합격한들, 친구들에게 이 좋은 소식을 알린들 진정으로 나의 합격을 좋아해 줄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기업에 다니거나 지금 일하고 있는 애들은 얼마나 좋은 회사에 내가 들어갔는지 각을 재면서 연봉 비교나 하고 있겠지. 그리고 누가 더 우월한지 또 마음속으로 비교를 하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축하해 주는 척하면서. 엇, 잠시만. 취업준비기간엔 내가 작아지면서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 걸까? 지금 내 처지에 자조 섞인 웃음이 나온다. 하. 나도 그래도 고등학생 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지방대라도 대학도 나왔는데.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거지? 일단 한숨 자야겠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벌써 저녁이다.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고 내 방으로 들어가 취업사이트를 켠다. 자! 처음엔 연습이었다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준비해 보는거야!이제 내 취준생활 본격 시작이다.
요즘 유행하는 자X설닷컴에 들어가니 최근에 뜬 신입공고가 뜬다. 그중에는 처음 들어본 회사도 있고, 이름이 익숙한 회사도 있다. 채팅창에 보니, 기업별로 채팅창이 따로 있고, 전체 회원이 칠 수 있는 채팅도 있다. 한번 궁금해 들어가니, 확실히 취준생만 모인 느낌이 확연히 티가 난다. 대개 회사얘기, 연봉얘기가 주를 이룬다.
"솔직히 월 300 벌면 결혼 못하지 않냐?"
"초봉 5천이라는데 면접 가야 되나?"
이런 말에 헛웃음이 난다. 언제 이렇게 우리 현대사회가 상향평준화 되었을까. 월 300을 못 벌면 사람취급도 못 받고, 결혼도 못하고, 가정을 이루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할 거란다. 취미생활 하나 없이 빠듯하게 모두가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각자만의 작은 행복들은 분명 자리할 텐데. 돈으로도 그 행복을 살 수 있는 걸까? 여러 생각이 오간다. 아니, 뉴스에서는 실제로 연봉이 5천 이하가 50%가 넘는다는데 왜 내가 보는 글도 그렇고 내 주위엔 다 대기업 다니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다른 통계들은 도대체 어디서 어떤 기준으로 숫자를 매기고 그 표본집단은 누굴까. 그들은 실제로 어떤 살고 있는 걸까 궁금해진다. 이사이트에서 그중 가관인 건 여러 아이디로 누군가 악의적으로 도배하다시피 되어있는 하나의 문구였다.
"얘들아 첫 직장은 무조건 대기업이다.
다른 의견 제발 듣지 마. 나중에 이직할 때 전 직장의 네임벨류, 연봉이 앞으로 너의 인생을 좌우한다. 참고로 중소에서 대기업 간 비율 12%다. 간혹 사업이랑 전문직 얘기하는 애들 있는데 그런 애들이 취업하겠다고 여기 기웃거리지 않는다. 딴지 거는 애들은 죄다 너네 인생에 도움 안 되는 애들이니 무시해라"
아, 이 말을 들으니까 뭔가 편협한 시선으로 삶을 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어제 봤던 대기업 면접이 붙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해진다. 무언가 이 글쓴이가 마냥 생각이 짧다고 할 수가 없는 게 경험에서 우러난 말 같아서 혹시나 진짜 대기업에 가지 못하면 인생이 망했다는 생각이 급 엄습해 불길해진다. 그래서 공고 중에서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기업을 빼고 대기업 위주로 눈을 좀 더 돌려본다.
이 기분은 뭔가 익숙하다. 그래. 나 경험한 적이 있어. 뭔가 데쟈뷰야. 어디지? 그래. 고3 때다. 마치 입시 때의 삶이 다시 펼쳐지는 것 같다. 제2라운드랄까.
고1 때에는 모두가 SKY대학을 꿈꾼다. 조금만 노력하면 거기에 운이 좀 받쳐준다 하면 본인은 SKY대학은 그냥 갈 것 같다. 고2가 되면 SKY대학교는 본인이 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목표를 갑자기 바꾼다. 바로 '인서울 대학교'로.
고3이 되면 이 자기 객관화는 비로소 완성된다. 지방 국립대라도 가자가 된다. 이 마인드로 임하듯, 취업준비도 마치 똑같다. 처음에는 누구나 대기업을 꿈꾸지만, 그 밑으로 내려와 중견기업, 그리고 중소기업, 아예취업이 안되면 집 앞에 아무 데나 가거나 공장 가거나, 공무원이나 공기업 루트로 빠지는 거다. 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내가 넣을 수 있는 한국의 기업 형태를 먼저 보자. 어디서 또 본건 있다.
대기업: 보통 시가총액 10억 이상을 마지노선으로 잡고, 대표적인 S등급은 ‘삼슼현’이라 부른다. 삼성, SK, 현차 그리고 그 밑에 계열사들. 뉴스에서 성과급을 이천, 삼천만 원 받는다는 곳은 이 세 군데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음 탑티어는 정유사 그중에서도 에쓰오일. 구글 같은 외국계기업, 여의도 증권사, 은행 금융권. 그다음 시가총액 30위까지를 보통 대기업으로 잡는다.
중견기업: 중견기업도 사실 일본과 한국에만 있는 용어다. 말 그대로 대기업과 중소의 사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름을 들어본 편의점에 있는 생필품을 만드는 모든 회사, 철강, 화학, 통신, 원자재 한국기업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공개채용이 없고 필요할 때마다 인력을 채용한다. 뽑는 인원으로 보나, 내 스펙에 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나 여기가 확률이 제일 높다.
중소기업: 한국의 90%를 차지하는 거의 모든 회사. 체계가 없고, 입사하자마자 모든 업무를 동시에 처리해야 하며, 월급은 박봉이라 재테크는 현대사회에 살아남기 위한 필수라 할 수 있다. 모든 취업준비생이 최후의 보루 삼는다.
자, 내가 여기서 대기업을 갔다고 치자. 심지어 그것도 전례 없이 불안한 노동시장을 이겨낸 청년 중 한 명으로 긍정회로를 돌려 예를 든 거다.
현재 서른 살. 월 300과 성과급을 매년 1천만 원씩 받는다고 가정한다.
통장에 있는 돈은 현재 1백만 원. 2천만 원가량 모았었는데, 취업준비하랴, 술 마시랴, 여행 가랴, 다 탕진하고 이 정도 남았다. 주식으로 돈을 벌든, 그 어떤 재테크를 해도 사실 월수입이 끊기면 절대 돈은 모일 수 없다는 걸 몸소 실감한다. 역시 사람은 밑바닥을 경험해 봐야 느낀다.
미니멈 생활비 50만 원, 월세 60 잡고, 보험비, 통신비, 교통비 다 빼고 180만 원을 전부 적금 든다 생각해 보자. 이것도 많이 잡은 거다. 일 년에 2,160만 원. 3년에 6,500만 원. 성과급을 다 합쳐서 겨우 일억 남짓. 나랑 똑같이 일하는 사회초년생을 만나 X2를 했다 쳐도 지금으로부터 3년 뒤 2억도 안된다. 이것도 이상한 데 돈 안 쓰고 오로지 전부 모았을 때의 얘기다.
근데 결혼 준비비용은 5천이 넘고, 서울에 전세아파트라도 구할라치면 최소 4억, 5억이다. 아파트 매매는 이미 10억을 돌파한 지 오래다. 빨리 취업해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해야 하는데 진짜 미칠 노릇이다. 점점 더 조급해진다. 아니, 게다가 신입사원 초봉으로 월 300씩 주는 곳이 몇몇 대기업이 아니고서야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 결혼준비하는 경섭이는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거야.
어떻게든 무조건 진짜 못해도 대기업은 가야 비빌언덕이라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꽤나 조급해진다.
그때 핸드폰에 알람이 울린다. 면접결과안내다.
‘안녕하세요. 00 상사입니다. 귀한 시간 내셔서 당사에 지원해 주신 김형규 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당사의 제한된 인원으로 인해 김형규 님을 이번 25년도 상반기 채용에 모시지 못하게 된 점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김형규 님의 앞날에 더 좋은 기회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진짜 큰일이다. 귀뛰역의 시작이다. 귀뛰역이란 취업준비생들이 만든 용어로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를 줄인 신조어다. 실제로 이 귀뛰역을 맞아보니 기분을 알 것 같다. 월 300은 무슨. 난 200도 간당간당하다.
이제 내 인생은 지옥시작이다. 으악. 죽고 싶다.
-5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