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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무탈하시죠?

보통날에 대하여

by 홍그리

가족이나 친구가 갑자기 뜬금없이 전화가 올 때 뭔가 불안이 엄습할 때가 있다. 애인과 결별했다거나 사고가 났다거나 아프다거나 재테크로 돈을 많이 잃었다거나. 근데 반대로 대개 소식이 뜸한 지인의 안부를 건너들으면 비보보다 낭보가 더 많다. 결혼을 한다거나, 임신을 했다거나 먼저 상대에게 얘기하면 그것이 혹시 오해를 살 수도 있기 때문에 감춰왔을 수도. 가령, 난임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상대에게 본인의 임신소식을 전할 수 없고, 연애도 못하고 있는 상대에게 본인의 결혼소식을 밝게만은 알릴 수 없듯, 사기를 당했거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대에게 본인 회사의 성과급을 자랑한다거나,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걸 알릴 수 없듯 다 같은 논리다. 낭보와 비보사이 관계를 대하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섞여있는 와중 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현대사회에서 꽤나 확률상 높은 문장이다.

이처럼 아무리 가까운 가족 간에도 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그 관계를 더 애틋하게 만든다. 친구나 지인도 마찬가지. 가까이 붙잡고 안 놓을래야 그럴수가 없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먹고사는 직장문제, 가족문제, 자녀문제 등 신경 쓸 것이 자연스레 많아지기에 예전 간의 가까움은 자연스레 멀어질 수 밖에. 그리고 그 멀어짐은 연락이 뜸하다는 서운함보다 ‘잘 살고 있겠지,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겠지’라고 단정 짓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실제로도 그렇고. 오히려 갑자기 연락오면 불안하다.


결국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그런 보통의 날들이 지나고 나서 보면 실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지루하고 심심할 정도로 아무 일 없이, 일상을 시작하고 똑같은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책을 보고, 친한 지인과 연락을 주고받고 간혹 약속을 나가기도 하고. 올해가 한해남은 시점, 그런 보통의 일상이 많았다는 것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자신을 질책하기보다 무탈함에감사함으로 대신해본다.

지금 내가 가진 것, 내가 뭘 하든 내 옆에 계속 있어주는 사람들, 잘 지키고 있는 건강 이 모든 것이 오늘‘도’ 주어진 하루 속에 있다는 게 감사하다. 아마도 그 어떤 대단한 성취가 없더라도, 강력한 도파민에 젖어있지 않더라도, 남들보다 앞서가고 있지 않더라도 그저 오늘 하루 무탈히 잘 보낸 사실에 대해 만족하는 건 내 안의 복잡한 구조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일일테다.


느끼는 감정의 폭이 넓은 사람은 스스로 본인을 힘들게 한다. 그리고 그 감정의 폭이 극대화되는 순간은 대개 본인이 가진 결핍이 기반이 된다. 결핍이 많을수록 감정의 파고의 빈도는 더 잦아지고 깊어진다. 본인이 충만하고 삶에 100% 만족하는데 어떤 무언가에 상처받거나 좌절하거나 과하게 열등감을 느끼거나 과하게 외롭거나 하기 힘들거든. 감정의 폭이 넓다는 정의는 결국 보통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고 마음을 쓰는 일이다. 그 일은 본인이 주어진 상황에 과몰입한 거고, 어쨌거나 내면 자체가 충만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들은 누가 봐도 여유롭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어도 본인이 가지지 않은 어떤무언가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예를 들어, 생활에 필요한 돈이 있고, 직장이 있고, 몸이 건강한데 연인이 없는경우라면 결혼을 해 가정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꾸리고있는 이들에 유독 강한 열등감이 자리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상황의 불안을 잠재우고자 소개팅을 시켜달라고 조른다거나, 어플을 가입한다거나 안간힘을 쓴다. 지금 당장도 만족할 만큼 잘 살고 있는데도. 또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는 지인은 적지 않은 월급에, 자녀와 와이프, 3인가족이 너무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데도 대기업에 대한 열등감으로 어떻게든 이력서를 고치고, 중간중간에 연차를 쓰면서 면접을 보고 삶을 바꾸려 한다. 만약 그렇게 해서 대기업에 가서도 현재 본인의 삶보다 더 안 좋고 불안정할지도 모르는데도.


다 가져야 좋은 것도 아니고, 꿈은 꿈대로 놔둘 때가 더좋을 데도 있다. 결핍도 받아들이고 그냥 둘데가 더 나을데가 있다. 흐르는대로 지금 다른 대다수의 것들의무탈함에 집중하는거다. 당장 가지기보다 시간이 흘러자연스레 가지는 것이 훨씬 더 부드럽게 흘러갈 때도 있다. 삶의 이벤트에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하나하나 신경 쓰고 집착할수록 내 마음의 무게만 깊어지고, 나만 곪아갈 뿐이다.


그래서 연락이 오지 않고 무소식이 희소식인 친구가 있다면 이젠 서운해하지 않고 안도의 감정이 우선시된다. 실제로 그는 잘 살고 있을거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오늘 하루 아무 일 없이 건강하고, 특별히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그래서 더 좋은 날이라고 믿는다. 결핍이라는 것 자체를 느끼지않는 평온한 날들의 하루일 테니. 누군가에겐 무소식이겠지만.

무탈하다는 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값지고 소중해진다. 아무것도 아닌 보통의 것들이 이렇게 더 소중해지는 아이러니.


오무하. 오늘도 무탈히 하루를 보내자고 줄여말하는 친구의 인삿말에 든 생각들.


어쨌거나 오늘도 우리 다 잘 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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