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을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서 보냈다. 두 분은 내게 엄마, 아빠 같은 존재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보다 더 큰 존재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이고,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데 이미 이 세상에 없을 때라고 한다. 그 말의 의미를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후에야 온전히 깨달았다.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게 후회스럽다. 그래서 남아 계신 할머니께만큼은 최대한 많은 사랑을 드리고 싶다.
어느새 할머니는 다시 아이가 되어 가신다. 손끝에 잡히던 기억들은 모래처럼 손에서 빠져나가고, 세상을 처음 만나는 아이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다고 하신다. 방금 전에 밥을 드셨는데도 언제 먹었냐며 다시 상을 차리시고, 손에 꼭 쥐어 주셨던 용돈을 언제 줬었냐며 또 내미신다.
여든이 넘으셨지만 여전히 곱고 단정한 우리 할머니. 거리가 멀어 자주 뵙진 못하지만 한 달에 한 번은 꼭 찾아뵈려 한다. 그런데도 내가 다녀갔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신다. 어쩌면 너무 자주 보고 싶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집을 나설 때면 언제 또 오냐고 묻고, 빈손으로 보내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이미 촉촉해진 눈으로 현관 앞에 서서 한참을 배웅하시다, 내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창문에 기대어 손을 흔드신다. 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아릿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 끝에서 어린 소녀 같은 할머니가 나를 다시 부를 것만 같아 뒷걸음질로 창문을 올려다 본 게 한두번이 아니다. 언젠가 창문 너머에서 더 이상 손을 흔들지 않는 날이 올까봐,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시려온다.
그래서 나는 간절히 바란다. 할머니가 오래오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기를. 왔다는 인사에 환히 웃어 주시고, 집을 나서는 나를 한참 동안 배웅해 주시기를. 그 창문 너머에서, 늘 그 자리에 계셔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