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13코스
2018년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제주 올레길을 걸었다. 16개 코스 220km 정도를 걸었는데 완주하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내가 걷고 싶은 올레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에 더 행복함을 느낀다. 어느 때고 난 이 길을 걷기 위해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추억(追憶)은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지난날을 회상하고 그리워한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도 얘기하지만 힘들었던 그때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는다.
지난 옛날 얘기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맨날 옛날 얘기만 한다고, 했던 얘기 또 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여행지에서는 사진 찍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는 말도 많이 한다. 요즘은 사진을 많이 찍긴 해도 인화를 했던 예전보다 더 안 보게 되는 듯하다. 옛날처럼 내가 소장하고 간직하는 사진이 아니라,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멋진 풍경이나 음식 사진을 올려 좋은 곳에 다녀왔다는 증거로 그 용도가 바뀐 듯 하다.
먼 미래에는(어쩌면 곧 오는 시기에) 내 뇌에 있는 기억을 재생해서 언제든 보고 싶을 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비슷한 내용의 영화도 본 듯하다. 그런 때가 오면 기꺼이 돈을 내고 과거의 추억을 영화처럼 보게 될까? 추억은 과거 경험에 대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미화'가 된다. 좋았던 것만 기억하고, 잊고 싶은 것은 애써 기억에서 지우기도 한다.
13코스 : 용수포구 - 저지예술정보화마을, 14.8km (4-5시간 소요)
13코스에는 특전사 숲길, 고사리 숲길이 있고 의자공원이 있는 아홉굿마을, 저지오름이 있는 코스다. 13코스의 출발점인 용수포구는 멋진 석양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한다.
13코스는 지난 9코스에 만났었던 분과 연락이 닿아 같이 걷게 되었다. 올레길에서 같이 걸을 수 있는 길동무가 있다는 것은 늘 즐겁다. 중간에 잠시 쉬면서 커피와 간식까지 얻어먹었다.
고사리 숲길을 지나 잠깐 도로를 지나고 낙천리 마을로 들어간다.
낙천의자공원이 있는 마을은 '아홉굿마을'이라고 불린다. '9개의 샘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데, 1,000여 개의 의자 조형물을 만들어 2007년 경 테마공원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칼릴 지브란의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란 시집에 좋아했던 시가 있다. 다시 보니 내가 왜 도시와 마을과 길들을 걸을 때 행복한 마음이 드는지 알 것 같다.
어느 거대한 낯선 도시에
들어서게 되면,
나는 낯선 방에서의 잠,
낯선 곳에서의 식사를
사랑합니다.
이름 모를 거리를
거닐며,
스쳐가는
모르는 이들을
바라보는 것을 사랑합니다.
나는
즐거이
외로운 나그네이고자 합니다.
도시의 낯선 것들과는 달리 올레길의 낯선 것들은 보자마자 익숙해지는 그 무엇이 있다.
이제 13코스의 막바지인 저지오름을 오른다.
13코스에서 동행했던 분과 헤어져서 다시 숙소가 있는 용수포구로 돌아와 저녁을 맞이했다. 올레길 걷기의 한 추억이 되어 주심에 고마운 마음을 느꼈다.
13코스의 시작점인 용수포구에는 멋진 석양을 볼 수 있는 펜션이 있다. '제주늘보의 오후'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곳이다. 제주의 바다를 온전히 바라보며 오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카페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최근 주인도 바뀌고, 펜션 전체를 새롭게 단장했다. 펜션의 시설, 소품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은 것이 느껴지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근처에는 식당이 없지만, 모슬포항이나 협재해수욕장이 적당한 거리에 있다.
추억(追憶)의 추(追)는 가볍게 밀려가는 것, 억(憶)은 머리 깊이 새겨진 일상의 일들을 분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리랑 역사와 한국어의 기원' 블로그 참고 https://blog.naver.com/hyyimmm) 추억은 일상의 기억들을 다시 꺼내어 흘려보내는 것이다. 기억을 떠올리고 이를 그리워하고 다시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이 추억의 행위이다.
여행에 대한 추억은 함께 했던 사람과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시간을 했다는 것에서 오는 기억의 감정이다. 2년 전 딸과 함께 했던 캐나다 퀘벡 여행에서의 진짜 추억은 함께 길을 걷고, 식사를 하며 나눴던 소소한 일상의 대화였던 것 같다. 그때 나눴던 대화가 정확하게 생각나진 않지만, 인생관이나 사상이나 철학, 정치 얘기일 리 없다. 그저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좋다고 얘기하고, 전에 가봤던 다른 곳 얘기를 하고, 앞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얘기하고 그랬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그저 소소한 얘기들을 나누며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추억이 된 것이다.
추억을 남기는 것에 사진만 한 것이 없고, 글로 남기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추억을 함께 나누는 것, 추억을 함께 얘기하는 것이다. 요즘은 부모님과 대화를 할 때 이런 질문을 자주 한다.
"옛날에요, 우리 남매들 어렸을 때 그때, 언제였죠? 00 했던 때인가요? 많이 힘드셨었겠어요."
"저 00살 때인가 00 갔었잖아요. 그때 00 먹었던 기억이 나요. 좋았었는데."
"옛날 살았던 집에 00이 있었잖아요. 가끔 생각이 나요."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함께 나눌 때 비로소 추억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만드는 추억이 아니라 나누는 추억의 나이가 된 듯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