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한다. 고려의 문신인 서희는 말로써 강동6주를 획득했고,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 1세대의 프레젠테이션으로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침략을 해온 로마 병사에게 자기 원을 밟지 말라는 말을 하다 죽임을 당했고, 용산에 살던 높으신 분은 지난 해 12월 3일 뜬금없는 담화 발표로 그 높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말 한마디에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다.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
영화 작업을 하면서도 말 한마디의 무게를 겪을 일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제작지원사업의 대면 심사 자리이다. 이 심사 자리에서 어떤 말과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지원 여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반기에 목표로 한 제작지원 사업 접수를 마친 뒤 내가 할 일은 시나리오를 고치는 한편, 혹시나 하게 될지도 모를 대면 심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이 시나리오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 이야기가 지금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인가.
그리고 지금, 많은 돈과 여러 인력을 들여 영화로 찍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가.
대면 심사 대상자 발표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나는 줄곧 이런 생각을 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는 일 자체가 나에게는 시나리오를 고쳐 쓰기 위한 나름의 준비 과정이었다. 그 과정이 내가 쓴 시나리오를 고쳐 쓰기에 필요한, 내 시나리오와 나 사이의 거리를 두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시나리오 수정 작업이라고는 했지만 아직은 한 글자도 고쳐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는 한편, 내 마음 한구석에는 혹시나 내가 지원한 제작지원 사업 가운데 단 한 군데에서도 대면심사 대상자로 선정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도 자리하고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 시나리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떡하긴 어떡해. 새 시나리오를 써야지.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내 스스로가 어쩌면 세상의 기준과 많이 동떨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오는 불안감이었다.
이번에 지원한 세 군데의 지원 사업 가운데 한 군데에서도 제작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올해도 지난해에 이어 단편영화 한 편 찍지 못하고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서의 연출 이력이 2년 연속 끊기게 될지도 모르는 이 상황. 말하자면 경력단절의 불안감.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천냥은 지금의 화폐 가치로 따지면 6,880만원이 된다.1) 나의 이번 단편영화를 위해 필요한 예산은 천냥 보다도 적다. 나에게 필요한 건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1) https://www.korea.kr/multi/visualNewsView.do?newsId=14886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