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선택한 재수생활
보통 11월까지 가을인데 올 가을은 이미 끝나버린 것 같다. 작년엔 11월에 아직도 덥더니 이상기후가 본격화되는 건지, 가끔 기후 관련 유튜브 영상들을 보면 괜스레 초조해진다. 올해는 시린 손끝을 낯설게 느낄 겨를조차 없이 성큼 겨울이 찾아온 것 같다. 이대로라면 올 수능은 "수능한파"의 명성에 걸맞게 유난히 추울 것 같은데, 부디 그날 하루만은 조금은 덜 추웠으면 좋겠다.
내가 수능을 보던 그날, 그 시절도 조금이나마 따스했으면 좋았을 것을, 돌이켜보면 시리고 어둡기만 하다. 우리나라 학생이라면 지나게 되는 길고 긴 12년의 학창 시절, 그 매듭을 짓는 고3 수험생 시절에 나는 책상 앞에 있긴커녕 부산에서 유명하다는 척추병원을 전전했다. 절망적 이게도 의사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엄살'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 아팠고 보이지 않는 희망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허벅지 뒤를 타고 내려오는 통증은 발가락까지 저릿하게 만들었고, 엎드릴 수도, 오래 걸을 수도 없었다. 당시 고등학교 보충수업까지 끝나면 오후 4시 정도 되었는데,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병원으로 향했다. 통증이 심해 입맛이 사라져서 살도 많이 빠졌다. 뼈만 남아 가는 내 모습에 등을 쓰다듬으며 미세하게 떨리던 아버지의 손을 기억한다.
지금껏 살면서 특별히 잘못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불쑥 다가온 아픔은 나를 자꾸 우울의 늪으로 끌어당겼다. 아버지는 태연한 얼굴로 매번 몇십 만원씩 들어가는 시술비를 지불했다. 외벌이로 빠듯한 생활비에 아들 병원비까지, 나는 이미 굽은 가장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대망의 수능이 있는 11월이 밝았지만, 나는 그날도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다. 내 순서를 기다리면서 모의고사 책을 펼치는 데 지금까지의 인생이 참 허망하단 생각이 들었다. 딱히 친구들과 놀러 다니지도, 흔한 게임 한 판도 해본 적 없이 성실하게 학교와 학원만 다녔는데 이 중요한 순간에 병원에 있어야 한다니. 무엇보다 억울했던 건 의사 선생님들이 나에게 엄살이라고 했던 "말"이었다. 내가 만났던 의사 선생님들은 내 아픔에 공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있지도 않은 병과 이다지도 힘든 싸움을 한다는 건 정말 억울한 일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블로그나 대학병원 홈페이지 같은 곳을 뒤져서 어느 의사 선생님의 메일로 연락을 했다. 서울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선생님은 정말 감사하게도 처음으로 내 말에 공감해 주셨고, 부산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를 추천해 주셨다. 대학병원급이라면 굳이 서울까지 오지 않아도 도움이 될 거라는 말에 상담을 예약하고 부산대병원으로 향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성함 석자를 또렷이 기억하는 교수님의 진료실에서 무려 두 시간 반을 상담했다. 이 교수님은 정말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비록 몸이 낫지는 않았지만 따스한 위로의 말씀에 비로소 응어리진 실타래가 풀리는 것 같았다. 현재로선 병명이 명확하지 않고, 수술이나 시술을 당장 해줄 수는 있지만 1~2년만 스스로 재활운동을 해보라고 하셨다.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니 교수님은 잘 낫길 바란다면서 웃으셨다.
이제 명확해진 문제를 마주하니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았던 과거의 내가 한없이 애처로웠다. 단전에서 오기 같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물밀듯이 솟구쳤다. 그 순간 그대로 병원 문을 박차고 나와 부산에서 재수학원이 밀집한 서면으로 향했다. 서울의 유명한 스타강사들이 운영하는 재수학원(얼마 가지 않아 폐업했다.) 프런트로 가서 다짜고짜 등록했다. 내 10대의 마지막은 수능이 끝난 지 일주일 만에, 그 해 12월 15일에 개강하는 재수선행반에 등록하는 순간으로 마무리되었다. 재수란 단어가 우울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재수를 결정한 것은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내 인생에 대해 결정한 중요한 순간이었다. 몸과 마음을 끝없이 끌어내리던 늪 안에서 힘겹지만 걸음을 옮긴 건 참 대단한 결정이었다.
일출이 아직이라 땅거미진 어둠 속에서 시내버스 첫차를 타다 문득, 목도리에 얼굴을 숨기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