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서 발견한 보석

꿈을 찾아서(2)

by 김민제

대학생이 되니 늘 돈이 모자랐다. 이제 갓 성인이 된 호기로운 대학생은 스스로 한번 돈을 벌어보고자 편의점 주말 알바를 시작했다. 기세 좋게 시작한 알바지만 해외봉사단 선발과 시기가 겹쳐버려 결국 출근을 못하는 날이 생겼다. 대타를 구하느라 난처다시는 사장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알바를 그만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두 달 정도의 기간 동안 25만 원 정도를 벌었다. 당시 최저시급이 4,580원이었는데, 사장님이 "우리 집 시급은 4,320원"이라고 하셔서 그 금액이 그냥 당연한 줄 알았다. 간 알바를 하시는 분과 교대하고 자정이 지난 시간, 막차를 놓치고 덜터덜 걸으며 돈 벌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학식을 먹기에도 돈이 모자랐지만, 가슴 뛰는 일에 모든 걸 걸어보고 싶었다.


천 원은 아니었지만 우리 학교 학생식당의 1,900원짜리 학식 한 끼가 가벼운 주머니에 따스한 위로가 되었다.





지금도 여전한 것 같지만, 당시 대학생에게 '해외봉사'는 필수적인 덕목 같은 것이었다. 스펙이란 개념 자체가 낯설었던 신입생시절, 학교 해외봉사단에 선발된 사람 중 1학년은 나 포함 고작 두 명이었다. 나는 입학 전에 리코더로 음악봉사를 몇 번 다녔던 경험이 있어서 이번이 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 볼 기회라고 생각했다. 5명이 1조를 이루어야 했기에, 아직 새내기였던 나는 학교 커뮤니티를 통해 처음 보는 선배들과 한 조가 되었다. 국어, 일어를 전공했던 선배들과 만났지만 요상하게도 과학이 우리 팀의 주제가 되었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만큼, 간단한 실험과 만들기를 통해서 흥미를 돋우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교비를 지원받아 특별한 경험을 쌓는 스펙을 쟁취하기 위해, 구름 떼 같은 학생들이 몰렸다. 그랬기에 더 엄격한 선발 과정(무려 3차까지)이 이루어졌다. 선배들은 영어를 잘해서 소통이 잘 되는 데다 아이들에 대한 호기심 자극을 원했고, 나는 리코더로 봉사를 했던 경험이 있어 빨대피리를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에 도달했다. 처음 만났어도 진실되게 한 방향을 향해 달렸던 우리는 결국 면접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 없이는 그을리는 피부를 어쩌지 못했던 쨍한 여름, 우리는 캄보디아 씨엠립으로 향했다(예전에 두 번 갔던 곳과 대학교에서 가게 된 곳이 놀랍게도 모두 캄보디아 씨엠립이었다.).



캄보디아 국기에도 그려진 이 나라의 상징과도 같은 앙코르와트 전경. 봉사활동의 추억이 그리워 작년 겨울에 다시 한번 방문했다.






최근에 캄보디아 범죄단지 관련 이슈로 나라 이미지가 완전히 추락했지만, 2012년 당시 도합 세 번째 같은 나라를 방문한다는 것은 특별하고 두근대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 경험이 방아쇠가 되어 쏘아 올린 도전의 포환 힘차게 뻗어나가고, 그를 향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탄다는 건 무척이나 성대한 일이었다. 비행기에 오른 스물한 살의 심장은 요리조리 튀는 탱탱볼이 되었다.


현지 학교에 배정된 우리는 약 2주 간의 시간표대로 반을 돌아가면서 수업을 진행했다. 우리 팀에는 현지 대학생 A가 있었는데, 영어를 잘하고 똑똑했다. 나와 동갑이고 또래이다 보니 많은 얘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A의 집은 농사가 생업이고, 이번에 흉년이 들어서 힘들다고 했다. 우리 팀에 합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사실은 돈이었다. 캄보디아는 농업국가였지만, 소득이 많지 않아 대학생 정도의 나이가 되면 외화벌이를 나가서 월급을 집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A는 한국으로 일하러 가고 싶다고 했고, 불과 몇 달 후에 용인의 어느 농장주와 근로계약을 맺은 사진을 보내주기도 했다.


A와 일주일이 넘는 기간을 같이 보내며, 이때보다 더 지난 캄보디아 방문 때 장면들이 겹쳐 보였다. 리코더 활동을 함께했던 몇몇이 마음을 모아 캄보디아 씨엠립 오지마을에 음악 교육과 우물 기부를 했던 적이 있었다. 뜨거운 아지랑이가 눈에 보일 듯이 피어오르고, 닭들이 돌아다니는 자두색 흙바닥 위 나무로 만든 사다리로 올라갈 수 있는 집들이 듬성듬성 서 있던 마을이었다. 아이들에게 음악교육을 진행하고, 마을 분들을 위해 연주회를 열었다. 마치고 나오기 전 막대사탕 같은 자잘한 간식을 드렸다. 나보다 연배가 한참 높아 보이는 분들이 두 손을 합장하고 웃으면서 연신 감사의 표시를 해주셨다. 고작 막대사탕 하나인데. 그렇게나 고맙다고 표현하는 모습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더 큰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당장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걸 실감했을 때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좌석 오디오엔 유독 가수 김광석의 앨범들이 많이 있었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나의 노래>, <사랑했지만>은 원래 음량보다 훨씬 폭넓게 일렁이는 파동이 되어 몰아쳤다. 긴 비행시간이 언제 지나갔냐는 듯 감동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분명 조용한 노래들이었지만 심장 소리에 맞춰 쿵쿵대며 마음을 두들겼다. 급기야 눈물까지 쏟아냈다. 노래의 온도가 현지에서 살을 맞대고 나눈 온기와 비슷해서였을까. 부족하나마 무언가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토록 사무치게 서러웠던 적이 없었다.





김광석 2집 앨범커버. <사랑했지만>, <그날들> 등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