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남, 다시 전역을 생각한다

해군장교 10년, 정말 전역이 답인가

by 김민제

문득 내가 쓰고 있는 이유를 다시금 생각했다. 물론 책의 초입에서 그 동기는 표현했지만, 끝까지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중간점검이 필요한 법이다. 벤치에 앉아 내가 걸어온 인생의 길을 돌아보고자 했다. 혹시나 오다가 넘어져서 못 일어나고 있면 덥썩 손을 붙잡아 일으켜 흙을 털고, 약을 발라주고, 신발끈을 고쳐 매 주고자, 다. 그러다 흠칫, 앳되고 파릇파릇한 얼굴을 만나면 불쑥, 눈물이 차오른다.


금껏 어진 이야기의 후반부, 다시 전역을 생각한다. 짧지 않은 10년이란 세월, 나는 어떤 장교였는가. 꼭 전역해야만 하는가. 이 두 가지를 집중탐구 해보고자 한다.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훈련소에서 목표는 단 한 가지, 중간만 가자는 거였다. 이왕 장교로 복무하면서 뒤처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놀랍게도 내 임관성적은 242명 중 121등, 첫 번째 목표를 달성했다. 무릎이 안 좋아졌고, 해병대 공수훈련 때문에 등에 원인 모를 통증이 격해졌지만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꽤 시달리고 있지만.


다음 목표는 살아남기였다. 지난 지면에 소개된 것처럼 예고 없이 들이닥친 격랑의 파도에 지나치게 허우적대던 날들이 있었다. 그저 버텨주기를, 살나기를 하루하루 기도했다. 그 여파로 무의식에 깔린 불안증상 때문에 가끔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고 흉통마저 생겼다. 여전히 그때의 무시무시한 연락들이 올 것 같아 초조해지기도 한다. 간이 약이라기에 8년을 기다렸지만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번주부터는 정신과 약을 처방받아 먹고 있다. 살아남는단 목표는 반쯤 이루었다고 해야 할까. , 그렇다고 마냥 해군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누구에게나 있는 인생의 굴곡을 만났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살아난 삶, 죽지 않은 삶은 기적이고, 세상엔 감사할 일뿐이다.





해군 보급장교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한 뒤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남을 돕는 삶이란 목표를 이루고자 본격적으로 노력했다. 나는 함정과 육상에서 급식과 식당운영 업무를 했지만 정작 요리는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요리학원을 다녔다. 한식 자격증 과정을 등록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반 수업을 들었고, 수료했다. 십수 년을 이어왔다가 손을 놓았던 리코더를 다시 배웠다. 언젠가 소속 부대에서 재능기부를 통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한국리코더연주자협회에서 인증하는 지도자과정을, 진해에서 진주까지, 마찬가지 단 한 번의 결석 없이 다녔다.


교들은 주로 관리자지만, 실무자가 하는 일을 할 줄 모르면 관리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부대에선 11명이 있던 부서가 조직개편으로 5명이 되고, 그 와중에 한 명이 전역하면서 부서장이던 내가 여러 일의 담당자를 자처했다. 물품 청구부터 구매, 서류 작성, 상하차, 보험가입, 주유소 운영, 근로자 선발까지... 시기에 노부부께서 부대에서 운영하는 민영식당 관리감독도 겸했는데, 불과 얼마 전 뜻깊은 연락을 받기도 했다.

떠나온 지 3년이 넘은 시점에 이런 연락을 받았다.



지스함 근무 때는 5시 반에 일어나 직접 밥을 준비하고, 칼질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흔들리는 배에서 피로에 힘들어하는 병들이 손가락을 다치지 않도록 소리치며, 어려운 일을 께했다. 그 시절 함께했던 수병 중 한 명이 전역을 하면서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콧 속을 파고드는 열기와 냄새, 멀미와 어지럼증, 열심히 해도 혼나기만 하는 현실에 정말이지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을 때, 뒤에서 "000아 최고다! 너밖에 없다! 멋지다!" 라며 함께했던 나 덕에 쏟아지는 눈물을 삼키면서 필사적으로 견뎌냈단 소회를 밝혀주었다.사고락을 함께했던 들이 결혼사진에 함께 찍혔던 순간은 내 젊음을 최대치로 불태웠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 하겠다.


조직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타인을 돕는 삶을 산다는 것, 더불어 우리나라의 해양 수호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드넓은 바다를 작은 가슴에 모조리 쓸어담는 모양으로 벅차고 보람된 일이었다.





인생에 의미를 심어주는 좋은 직장을 찾고 혼이란 관문을 지나면, 이 직장에 '뼈를 묻는다'는 생각을 하고 매진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석하게도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휘몰아친 격랑의 파도 속에서 느꼈던 것은 극심한 외로움이었다. 동시에 부모님께도 큰일이 닥쳤고, 가장 친한 친구마저 불의의 사건에 휘말려 연락조차 안 됐다. 단 한 명, 오직 한 명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부모님은 별거를 이어오다 내 결혼 직전에 헤어지셨고,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본식을 한 달 앞둔 동생이 파혼했다. 결혼 이후, 내 가정을 지켜야 한단 생각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지배했다.


장교들은 1~2년마다 지역을 옮겨가며 근무해야 한다. 운이 좋거나 경우에 따라 5년까지 한 지역에 있는 경우가 있지만 매우 드문 일이다. 최근에 이재명대통령의 타운홀 미팅에서 어느 학생이 이런 현실을 이야기한 바, 조만간 개선될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은 이렇다. 집에 돌아가면 아무도 없는 생활을 피할 수가 없다. 내 가족이 있지만 없다. 다시금 외로움과의 싸움이 이어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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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전역지원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