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7일>
그 날 아침부터 아빠의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밥을 먹기 힘들어 했고, 평소보다 구토도 더 많이 했고, 밥도 더 먹지 못했다. 그 날 따라 컨디셔이 안좋다는 말을 했고, 나는 그 시간이 빨리 지나고 다시 괜찮아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날 밤, 통증은 훨씬 심해졌고, 참다참다 아빠는 119를 불러달라고 했다. 급하게 119에 전화를 해놓은 다음, 병원에 가져가야 할 서류 및 간단한 옷가지를 챙겼다. 이내 구급대원 분들이 도착했고, 아빠를 태웠다. 나는 정신 없이 집을 정리하고 나와 함께 119를 탔다. 원래는 동네의 큰 병원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러면 모든 검사를 새로 해야했기에 거리가 멀더라도 원자력병원에 다시 가기로 했다.
병원에 가면서도 아빠는 많이 힘들어했다. 새벽이라 도로에 차가 많지 않았지만 병원에 가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응급실에 도착하고 나서 급박하게 아빠의 몸에 많은 줄이 연결되었다. 상태가 정말 좋지 않다는게 느껴졌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응급조치가 계속 되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는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아빠의 상태는 심각했다. 시간이 지나 겨우겨우 진정이 된 것처럼 보였지만, 이전 입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줄이 아빠에게 꽂혀 있었다. 아빠는 의식이 없었고, 진통제를 맞았는지 그대로 누워 있었다.
나는 입원 수속을 밟았다. 언제까지 응급실에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원자력병원의 입원실은 5층과 6층이 있었는데 5층은 암환자 전용, 6층은 기타 환자의 입원실이었다. 하지만 이미 5층에는 자리가 없었기에 나중에 5층에 자리가 생기면 이동하기로 하고 일단 6층으로 가기로 했다. 6층의 입원실은 2인실이었는데, 의식이 없는 아빠와 함께 새벽에 입원실로 향했다. 이동식 침대에서 입원실 침대로 옮기는 것조차 어려웠던 아빠는 도와주신 선생님 덕분에 겨우겨우 새로운 침대에 누웠지만 계속 고통스러워 하셨다. 그 때마다 나는 간호사실로 뛰어가 아빠의 상태를 알리고 조치를 취해주길 바랐다. 이전과는 고통의 시간이 자주 찾아왔다. 거의 10분에 한번씩 아빠는 힘들어했고, 나는 피곤이 쌓인 상태에서도 쉽게 잠을 잘 수 없었다. 새벽 4시쯤 되었을 때야 비로소 아빠는 잠이 들었고, 나는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잤다.
아침 8시, 의식을 어느정도 찾은 듯한 아빠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 하셨다. 걸을 수 없었던 아빠를 위해 나는 휠체어를 끌고 갔고, 겨우겨우 휠체어에 탄 아빠를 태우고 화장실로 향했다. 구석 좌변기 자리 칸막이로 몸을 옮기던 아빠가 갑자기 축 늘어졌다. 부축하던 나는 순간 놀라 아빠를 흔들면서 화장실에 붙어있던 비상벨을 눌렀다. 비상벨에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다급하게 아빠의 상태를 설명했고, 순식간에 간호사가 뛰어와 아빠의 상태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불렀다. 갑작스런 비상사태에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 뛰어왔고, 아빠를 병실로 옮긴 뒤 급하게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좁은 병실에 10명이 넘는 병원 사람들이 들어와 정작 나는 밖에 있었다. 그 때 나는 직감했다. 이제 아빠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응급처치가 끝난 후 의사 선생님과 대화를 했다. 이전 입원 했을 때에도 아빠를 봐주시던 선생님이었는데, 장이 많이 망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소변도 보기 어렵다고 했다. 소변이 나와야 정상적인 치료가 가능한데, 그렇지 못해 많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잘못하면 오늘은 넘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랬다. 그것이 나에게는 마치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오늘을 넘긴다고 해도, 하루하루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는 친척분들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의 상태가 많이 안좋아져 오늘을 못넘길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한 두분씩 병원에 도착하셨다. 원래는 코로나 때문에 환자 1명 당 1명의 보호자만 출입이 가능하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말을 하니 모두 들여보내 주었다. 응급처치가 끝난 아빠는 의식이 돌아오셨다. 나는 아빠의 다리르 주물러드리고 손을 잡으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대화를 했다. 아빠의 표정은 덤덤했다. 자기가 없어도 잘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을 잡고 다리를 주무르는 것 말고는.
오후에 나는 의사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아빠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면서 병원에서는 두 가지 선택지를 마련해주었다. 하나는 최대한 고통을 줄이면서 아빠가 돌아가시는 걸 준비하는 것이었고(말 그대로 치료를 포기하는 거다), 다른 하나는 중환자실로 옮겨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아빠의 수명은 연장시키는 것이었다. 후자는 말 그대로 '생명연장'이지 언제 의식이 돌아오고, 어떻게 병세가 호전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식물인간이 되는 것나 다름 없었다. 아빠의 상태는 더 이상 호전을 기대할 수 없었고, 나의 선택도 하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치료 포기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병원 로비 의자에 앉았다. 그제서야 아빠가 죽는다는 것, 혼자 살아야 한다는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큰아빠와 아빠의 장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선산이 있었지만 시골이었고, 그러면 내가 자주 찾아갈 수 없었다. 아빠도 예전부터 화장을 원하셨고, 나도 화장이 낫겠다 싶었다. 큰아빠가 아는 절에 아빠를 모시기로 결정했다. 그 동안 아빠는 고모가 봐주었다. 아빠의 의식은 없었다. 계속 잠자듯이 누워있었고, 가끔 통증이 올 때만 깨셔서 그 때만 잠이 깨셨다.
저녁 시간에 아빠를 5층의 입원실로 옮겼다. 잠에서 깬 아빠에게 미음으로 저녁을 드시게끔 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고, 약도 넘기기 힘들어하셨다. 결국 포기하고 다시 누우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의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진통제도 말을 잘 듣지 않았고, 너무 고통스러워하셔서 같은 입원실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였다. 결국 아빠를 1인실로 옮겼다. 말이 1인실이지 그 곳은 전에 입원했을 때에도 봤던 임종실이었다. 임종을 얼마 남기지 않은 환자들을 옮겨 가족들이 임종을 지켜볼 수 있도록 마련된 병실이었다. 그 곳에 아빠가 들어갔다.
저녁이 되자 더 많은 친척 분들이 도착했다. 아빠는 산소호흡기를 낀 채 누워있었고, 의식이 없었다. 아빠의 상태를 살피던 간호사는 우리가 물어보자 산소호흡기만 있을 뿐이지 거의 돌아가셨다는 말을 해주었다. 친척분들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실이 믿기지도 않고, 이 상황 자체가 어이가 없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당직 의사가 들어왔다. 그리고, 아빠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