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별 Jun 15. 2024

우산 따위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

지우거나 가리거나 없애거나 뿌리거나

우산 따위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

-지우거나 가리거나 없애거나 뿌리거나


1. 지우개를 좋아해서 대략 오십 개 정도를 가지고 있다. 50개 정도라고 해도 지우개는 부피를 많이 차지 않는 물건이기 때문에 필통 세 개 정도를 가득 채울 뿐이다. 어른이 된 이후로는 지우개를 쓸 일이 많지 않아 졌다. 샤프나 연필보다는 볼펜이나 펜을 더 자주 사용하게 되고, 손글씨를 쓸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이나 디자인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해 연습장에 빼곡하게 계산을 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지우개를 사용하고 싶어 진다. 고무의 말랑말랑한 감촉과 부드럽게 미끄러지면서 지워질 때 느낌이 좋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지우개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는 걸 좋아했다. 친구가 가진 예쁘고 귀여운 지우개를 나도 몹시 갖고 싶어 동네 문구점을 다 돌아다녀도 찾지 못해 친구에게 하나만 줄 수 없는지 따라다니며 졸라봤는데 친구는 그 지우개를 여러 개 가지고 있었지만 단 하나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지우개가 너무 갖고 싶어서, 그리고 친구에게 너무 섭섭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부끄러워서 토라져 혼자 씩씩거리면서 걸어가던 하굣길.


2. 원래 모자를 잘 쓰지 않는데, 모자를 쓰는 날은 일 년에 열 번도 안되는데 작년 겨울과 올봄에는 모자를 여러 개 샀다. 모자를 사면서 어차피 있는 모자도 쓰지 않는데 왜 사고 싶은지 의문이었다. 머리에 기름기가 많지 않은 편이라서 하루쯤 감지 않아도 티가 잘 나지 않고 모자를 쓰는 게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비니, 버킷햇, 볼캡 이렇게 세 종류의 모자를 각각 서너 개씩 가지고 있는데 여전히 잘 쓰고 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다 가끔 모자를 쓰면 얼굴에 드리워지는 서늘한 느낌이 나쁘지 않고, 모자가 어느 정도 얼굴을 가려주는 게 왠지 모르게 편안하고 안정감이 들어 좋을 때가 있다.


3. 이쑤시개는 어떤 나무로 만들어질까. 몇 년 전에 치과에서 어금니 신경치료와 임플란트를 하나 했는데 그때 치과의사가 내 잇몸 사이가 점점 더 벌어져서 이 사이에 틈이 생긴다고,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 찌꺼기가 잘 끼게 된다고 했다. 치간치실을 사용하다가 피를 본 적이 여러 번 있어서 나는 옛날 아저씨처럼 이쑤시개를 사용한다. 물론 남이 없을 때 혼자 있을 때만 사용한다. 이쑤시개를 사용하는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그다지 보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다. 그저 얼마나 보기 흉할까, 생각할 뿐이다. 이를 닦기 전에 이쑤시개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좀 서글프다. 이러다가 50도 되기 전에 이가 다 망가지는 건 아닐까.


4. 외출하기 전에 언제나 향수를 뿌린다. 가끔은 잠옷이나 베개에 뿌리고 잘 때도 있다. 여름에는 산뜻한 향을, 겨울에는 포근한 향을 좋아하지만 너무 흔한 향은 좋아하지 않는다. 남들이 잘 모르는 향, 여러 번 뿌려도 거북하지 않은 향, 잔향이 오래 남는 향수를 좋아한다.


나는 물건에 대한 애착과 소유욕이 많은 편이다. 우산 하나를 사더라도 예쁘고 튼튼한 걸 고르고 싶다. 양말 한 켤레를 사더라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 색깔 별로 골라 신고 싶다. 초콜릿을 먹더라도 구하기 어려운 수입 초콜릿을 먹어보고 싶다. 예전에 사귄 애인이 "너 먹여 살리려면 돈 많이 벌어야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발끈하지 못했다. 걔는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로맨틱한 대사인 것처럼 여기고 그런 말을 한 걸까. 아니, 아무 생각이 없었을지도. 어차피 헤어질 거였으면 그때 발끈하기라도 해 볼 걸. "너 보고 나 먹여 살리라고 할 생각 없고, 나는 내가 알아서 살아갈 거라고." 헤어진 건 천 번 만 번 잘된 일이다. 어쨌든 내 소비욕과 물욕은 조절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쉬는 날(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