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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트랙 1
18화
[히든트랙] 무명(無名) by 정밀아
깊이 있는 울림이 있는 곡, 묵직한 감동이 있는 곡
by
스파씨바
May 28. 2020
얼굴 없는 가수
중,고등학교 때부터 틈틈이 곡을 써오던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내가 만든 몇몇 곡들을 묶어, 지인 배포용 데모앨범을 만들기로 결심을 했다.
나보다 2살 위인 형이 음악을 먼저 하고 있었던 터라,
난 형의 음악 장비였던 KORG의 신디사이저 M1을 틈틈이 빌려, 조금씩 곡을 만들고 시퀀싱을 해서 앨범에 들어갈 열곡 정도를 다 만들었고, 그 다음은 녹음을 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찾기 시작했다.
PC통신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었으니,
인터넷으로 그런 정보를 찾는 것은 불가했고,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날로그적인 도구와 수단으로 녹음 스튜디오들을 컨택했다.
전화, 그리고, 어린 시절 즐겨보던 월간 만화책 "보물섬 정도로 두꺼웠던 전화번호부 책.
전화번호부 책에서 "스튜디오"로 적혀있는 곳들에 참으로 많이 전화를 했었고,
이 중 대다수는 "음악"을 만드는 스튜디오가 아닌, "사진"을 찍는 스튜디오여서 참으로 많이 실망을 했었고,
그러다가 몇몇 후보를 찾았고,
마침내 최종 녹음 스튜디오를 결정하게 되었다.
강남 영동 AID 아파트(차관아파트) 근처였던 것 같은데,
거리뷰를 통해 아무리 봐도, 시간이 많이 흘렀고, 주변은 싹다 재개발이 된 탓인지 대체 어디쯤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마침내 녹음하던 날,
친한 친구 1명과 함께 키보드 스탠드까지 포함해 20 Kg는 족히 넘었던 신디사이저를 낑낑거리고 매고 스튜디오로 갔다.
USB 따위는 없던 시절이었기에,
시퀀싱 편곡된 음원을 정확한 명칭도 가물가물해진 그 매체(2.5인치 디스켓이던가 플로피디스켓이던가 그랬다)에 넣어 같이 챙겨갔던 기억도 난다.
하긴, 이때 이 앨범의 최종 결과물은 카세프 vs CD의 선택지(DAT라는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중 훨씬 더 비쌌던 CD로 받기로 결정했는데, 녹음을 도와주시던 스튜디오 기사 분께서 CD 라이터가 스튜디오에 있음을 뽐내며 자랑을 하시던 그 시절이었으니...
오후 쯤부터 시작했던 녹음은 그 다음 날까지 진행했던 것 같고...
한참 녹음을 하고 녹음 부스 안에서 그 다음 곡 녹음을 준비 중인데,
누군가 스튜디오 창문을 똑똑 두들기더니 손가락짓으로 나와 보라고 한다.
밖으로 나왔더니, 어디서 많이 봤던 분이 계신다.
누구시더라?
정말 낯이 익은데...
아!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큼 엄청나게 유명한 밴드에 속한 그 분이시구나.
나한테 물으신다.
유명한 분: "몇 살?"
나: "스무살입니다."
유명한 분: "다 니가 만든 곡들이야
?"
나: "네 그렇습니다."
유명한 분: " 작곡은 그렇다 치고... 작사는? 편곡은? 연주는?"
나: "부족하지만 그냥 제가 다 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분: "아, 그렇구나. 한 몇 곡 정도 있니?"
나: "대략 몇십곡은 만들어놓았습니다."
유명한 분: "내가 전화 한 통 해줄테니 이따 녹음 마치고 한 번 가봐"
유명한 분:(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어, 박실장, 난데, 이따 오후에 사무실에 있나? 내가 괜찮아보이는 애 하나 보내볼게"
그리곤 명함을 한 장 주시며 그리로 가보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나지만, OO기획이라고 써있었고, 주소는 방배동 어디쯤으로 되어 있었다.
녹음을 마치고, 친구와 난 방배동으로 이동했다.
20Kg 쯤은 되는 신디사이저를 든 채로...
까페골목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OO 기획에 노크를 하자,
조금은 무섭게 생긴 중년의 남성 한 분이 나오신다.
나: "OO 스튜디오 OO 선생님께서 가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무섭게 생긴 중년 분: "(뽐내듯이) 여기 어딘지 알아? (엄청나게 유명해서 히트곡이 많았었지만, 이 당시에는 점차 활동을 안하기 시작했던) 가수 OOO 소속사야! (퉁명스럽게)"너 몇 살인데?"
나: "스무살입니다."
무섭게 생긴 중년 분: (좀더 퉁명스럽게) "뭐뭐 할 줄 아는데?"
나: "작사, 작곡, 편곡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무섭게 생긴 중년 분: (여전히 퉁명스럽게)"노래 잘해?"
(내가 "아니요"라고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무섭게 생긴 분: (짜증을 내시며) "얼굴 없는 가수 하면 되겠다"
그렇다.
내 음악인으로서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공식 제안은
"얼굴 없는 가수"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 그래도 바쁘고 귀찮은데 가요계의 대 선배가 갑작스럽게 전화해서 보내온 아이를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더할 나위 없었던 것 같다. 당사자는 다소 상처를 받았지만....)
가수를 할 생각도, 능력도, 실력도 없었지만,
설령 있다 하더라도,
"얼굴 없는" 가수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20Kg짜리 신디사이저를 들고 낑낑거리며 올라갔던 방배동 작은 건물의 4층엔가 있었던 그 사무실에서의 우리의 대화는 허무할 만큼이나 짧게 끝이 났었고,
같이 갔던 친구의 놀림과 위로를 한꺼번에 받으며 돌아오던 내내,
신디사이저가 더더욱 무겁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음악을 반대하던 부모님께 "스카웃 제의"를 받을 뻔 했다는 말씀을 드려 인정을 받아볼까 하다가,
당신들의 아들이 "얼굴없는 가수"로 제의받았다는 사실에 슬퍼하실까봐 부모님께도 말씀 드리지 않았(못했)다.
[히든트랙] 무명 by 정밀아
https://youtu.be/E3h5RAvFnPQ
발매일: 2019.02.18
작곡: 정밀아
작사: 정밀아
편곡: 정밀아
오늘 적은 가벼운 글의 분위기하고는 다르지만,
글을 적으면서 떠오른 노래는 바로 이 곡이었다.
정밀아라는 가수의 무명(無名).
이름 없는 날에, 이름 없는 곳에,
이름 없이 살다가 또 이름 없이 간다.
라는 묵직한 가사가, 큰 울림을 주는 감동스러운 곡.
자의던지 타의던지,
얼굴 없이, 혹은 무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무명(無名) by 정밀아
이른 어느 봄날 떠나지 못한
찬 겨울 끝 바람에 옷깃 여미운다
언제부터였나 채 녹지도 않은
메마른 땅 위로 연초록이 어리운다
무너진 담장 아래 한 줌 흙 위에도
아무 투정도 없이 뿌리를 내린다
이름 없는 날에 이름 없는 곳에
이름 없이 살다가 또 이름 없이 간다.
왜 없겠는가 수수한 이름 하나
그저 아무도 그 누구도 부르지를 않지
건네주겠는가 깊은 눈길 한 번
사뿐 들꽃을 피해서 조심히 가는 발길
온 산 뒤덮은 푸름은 큰 나무만 아니라
무심히 밟고 가는 수많은 그냥 풀
이름 없는 날에 이름 없는 곳에
이름 없이 살다가 또 이름 없이 간다.
이름 없는 날에 이름 없는 곳에
이름 없이 살다가 또 이름 없이 간다
이름 없이 살다가 또 이름 없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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