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틈만 나면 만화책과 일본 드라마를 보곤 했던 내게 일본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나라였다. 일본 사람들이 코타츠에 모여 앉아 오손도손 수다를 떨거나 오코노미야키를 만드는 장면을 볼 때면 스크린을 뚫고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고 싶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드라마 <호타루의 빛>의 주인공들과 함께 일본식 마루인 다다미에 앉아 시원하게 맥주 한 캔을 들이켜는 상상. 솜이불을 뒤집어쓴 채 손이 노래지도록 귤을 까먹으면서 만화책을 펼쳐놓고 마음속 어딘가에 일본에서의 유쾌한 생활을 그려보곤 했다.
하지만 일본은 물가가 비싸서 갈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1년간의 여행으로 내공을 탄탄히 쌓은 지금이라면 일본에서무전여행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에 곧바로 방콕에서 오사카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샀다. 히치하이크를 하며 일본어도 배우고, 현지인들의 집에서 지내는 소소한 일상이 머릿속에 둥실둥실 떠올랐다.
'무전여행이라니…. 뭐, 식당에서 한 끼의 식사와 설거지 몇 시간을 바꾸면 되려나?'
처음 계획은 무전여행의 취지와 소개를 담은 글을영어, 일본어, 한국어로 프린트해서 들고 다니며 현지인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다. 페이스북에도 올려보는 것이 어떠냐는 일본인 친구들의 의견에 포스팅을 했는데 운 좋게도 일본에 살고 있는 지인들에게 많은 연락이 왔다. 자기가 사는 도시에 놀러 온다면 재워줄 수 있으니 언제든 주저 말고 연락하라는 고마운 메시지였다. 든든한 아군이 생긴 것 같았다. 자신만만하게 너덜거리는 잔고를 끌어안고 마지막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돈므앙 공항에서 이제는 익숙해진 체크인을 하고 오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설레는 마음도 반, 정말 마지막이라는 아쉬운 마음도 반이었다.
▲ 무전여행을 같이 할 친구를 섭외했다.
"승빈아, 너 겨울방학에 할 거 없으면 나랑 일본 여행 가지 않을래?" "안 돼. 나 돈 없단 말이야." "괜찮아. 비행기 티켓이랑 비상금만 들고 와. 내가 캐리 해줄게." "그럼 오사카에서 만나자. 비행기 표가 없어서 하루 늦게 도착할 것 같아!"
아무리 내가 큰소리를 쳤어도 그렇지 내 친구 승빈이는 딸랑 만 엔도 채 되지 않는 돈을 환전해서 왔다. 에라, 모르겠다.그래, 한 번 해보자. 돈이 없으면 길거리에서 두피 마사지라도 해서 돈을 벌지, 뭐. 두 명인데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근데 우리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 "그러게…. 일단 일본 가는 표만 사자. 돈 떨어지면 그때 한국으로 돌아가지, 뭐. 아, 그리고 스케치북이랑 마카 좀 챙겨 와 줘." "그래! 나 해외여행은 처음이라 너무 떨려!!!"
불쌍한 내 친구는 이때만 해도 몰랐었다. 희대의 궁상 앤드 개고생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제법 쌀쌀했지만 히치하이크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씨였다. 친한 친구와 일본에서 처음 하는 히치하이크라 제법 떨렸다. 우리의 여정은 정말 무계획이었다. 비록 머물 곳도,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친구도 없었지만 승빈이랑 함께라는 이유만으로도 왠지 든든했다. 우리는 도로 바로 옆 도보에 자리를 잡았다. '교토(京都)' 글자가 크게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차가 오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교대로 한 명은 스케치북을 들고 다른 한 명은 팔을 앞으로 뻗어 엄지손가락을 들고 있었다. 20분쯤 지나자 차가 한 대 멈춰 섰다. 하지만 차에는 남자가 5명이나 타고 있었고 별로 좋은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 야매 일본어로 공손하게 거절하고 원래 포지션으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저씨가 우리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아저씨는 창문을 열더니 일본어로 말을 거셨다. 애니메이션을 자주 보다 보니 귀가 트였는지 아저씨가 하시는 말씀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드라마에서나 봤던 대사를 주절주절 읊조렸다.
"지금 어디에 가시는 중이신가요?"
"아라시야마에 가는 중이야."
"아라시야마라면 교토 쪽이죠? 저희도 교토에 가려고 하는데 괜찮으시다면 가는 길에 내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저씨는 시크하다 못해 얼음장 같은 무뚝뚝함이 묻어나는 말투로 대답하셨다. 하지만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는 내면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저씨는 출근 중이셨는데 피곤하신지 우리를 차에 놔두고 편의점에 커피를 사러 가셨다. 차에 그대로 꽂혀있는 차 키를 보며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체 우리를 어떻게 믿고 차 키를 놔두고 가신 거지. 그는 편의점에서 돌아와 다시 시동을 걸었고 차는 어느새 교토 방면 고속도로의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교토의 청수사
아저씨는 교토 여행의 필수코스라는 청수사 앞 사거리에 우리를 내려주셨다. 아저씨에게 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서둘러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청수사에 올라갔다. 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청수사까지 가는 길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그중에는 기모노에 어여쁜 샌들을 신은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도 예산이 충분했다면 기모노를 빌렸을 텐데…. 꽃단장을 한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신나서 청수사를 돌아다니며 감탄하고 있을 때 코에서 뭔가 진득한 게 흘러나왔다.
"어!? 너 코피 나."
"이게 뭔 일이라냐. 잠도 잘 잤는데."
청수사와 같은 붉은색의 액체가 코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들 신사에 오면 소원을 빈다던데 코피가 한동안 멈추지 않은 탓에 오두방정을 떨며 양쪽 콧구멍에 휴지를 꼽은 채 소원을 빌어야 했다.
'제발 코피가 그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잘 곳이 생기게 해 주세요!'
청수사를 벗어날 즈음에야 코피가 멈췄다. 우리는 교토의 시내 기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사카 시내와 달리 교토의 거리에는 일본 특유의 예스러운 정취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한적한 골목에는 전통 가옥들과 신사가 즐비해 있었다. 해가 지면서 하늘은 어둑어둑해졌다. 우리는 무전여행 설명서를 가방에서 꺼내 들며 히죽 웃었다. 오늘은 잘 곳이 없었지만왠지 이것만 잘 사용한다면 잘 곳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명서를 한 장씩 나눠 들고 주택가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하지만 밤이 되자 생각 외로 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재워줄 수 있냐고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슈퍼마켓, 작은 상점, 식당에 들어가 도움을 구해봤지만 죄다 퇴짜를 맞았다.
네 시간째 가방을 메고 주택가를 지나 또 다른 주택가가 나올 때까지 무작정 걸었다. 처음에는 넘쳐흐르던 자신감과 체력도 바닥나버렸다. 그때 마침 마당에서 농구 연습을 하는 소년이 보였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는 어머니를 불러오겠다며 후다닥 집으로 뛰어 들어갔고 곧이어 인자한 인상의 부인이 소년과 함께 나왔다. 잘 곳이 없으니 하룻밤만 재워주시면 안 되겠냐는 뻔뻔한 부탁을 드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물어보겠다며 집에 들어갔다 나왔지만 역시 대답은 'NO'였다.
낯이 뜨거워져 길가로 나가려는데 부인은 추운데 감기 조심하라며 핫팩과 초콜릿을 두 손에 꼭 쥐여주셨다. 순간 그녀가 천사로 보였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일본에서의 무전여행은 힘들었다. 그러나 주택가를 헤매다 받은 초콜릿을 꺼내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하게 녹았다.
비록 돈도 없고, 잘 곳도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여행을 응원받는다는 건 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고 마지막 희망인 기차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결국 차가운 교토역 땅바닥에 모아 온 전단지를 깔고 침낭을 한 겹 덮고 노숙을 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딱딱한 바닥에 몸은 춥고 마음은 불편했지만 1년간의 여행이 곧 끝날 거라고 생각하니 사서 고생하는 것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