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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May 17. 2019

호화로운 저택에서의 하루

@벨기에, 리에주



벨기에의 국경 휴게소에서 도시명 루벤 삐뚤삐뚤하게 적힌 박스를 들고 히치하이크하기 위해 30분째 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베를린에서 출발하여 독일을 가로질러 약 600km 되는 거리를 히치하이크로 벨기에의 국경까지 온 것이었다. 어느덧 해가 지평선 아래로 숨어버렸기에 휴게소에서 노숙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이만 히치하이크를 포기하고 휴게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막 휴게소를 벗어나려던 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크리스티앙 아저씨와 가족들이 타고 있는 차였는데 그들은 아름다운 기차역이 있는 벨기에의 도시인 리에주에 가던 길이었다. 마침 리에주는 다음 목적지였던 루벤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크리스티앙 아저씨는 부인인 지젤 아주머니, 그리고 고등학생 아들 니콜라스와 함께 차에 타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가던 중, 시간이 너무 늦어지자 지젤 아주머니는 늦은 밤에 여자애를 길 한가운데 내려주고 갈 수는 없다며 집에서 자고 가라고 초대해주셨다.



갑자기 잘 곳이 생기다니. 이게 웬 행운이야!?



차는 리에주 시내를 지나 15분쯤 달린 후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 아저씨가 직접 설계한 집이라는데 집에는 화장실이 4개나 있었고, 방은 얼마나 많던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었다. 복도에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시는 지젤 아주머니가 직접 그린 그림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취미라기에는 몹시 뛰어난 솜씨였다. 아주머니는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해주셨다.




"오늘은 여기서 머무르다 가.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




큰 창문이 딸린 넓은 방이었다. 한국의 내 방보다 두 배나 컸고 손님방인지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배낭을 침대 옆에 내려놓고 푹신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였다. 이런 방에서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갑자기 찾아온 과분한 행운이라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제대로 씻지 못한 채 지냈던 나는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꾀죄죄한 몰골을 지워냈다. 포근한 감촉의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눕자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한 번에 씻겨나갔다.



그 사이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아래층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계셨다. 샤워를 마친 후 부엌에 내려가 뭔가 도울 게 없나 찾아봤지만 소파에서 쉬라며 극구 말리셨다. 집에는 딸 소피와 이란성쌍둥이 아들 니콜라스와 줄리엔, 그리고 소파에 누워서 하루 종일 턱을 괴고 조는 강아지 빌리가 있었다. 가족들과 원목으로 만들어진 8인용 테이블에서 해산 물 파스타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룩셈부르크산 와인을 마셨다.




집에 자쿠지와 사우나가 있다니. 이게 꿈이야. 현실이야?



성대한 저녁식사를 마친 뒤, 소화도 시킬 겸 소피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뒷마당에 설치된 자쿠지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야외 온수풀인 자쿠지는 6명이 들어가도 자리가 남을 만큼 컸다. 쏟아지는 별빛 아래, 뜨거운 김이 자욱한 온수풀에서 물장구를 쳤다. 눈을 감고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있는데 크리스티앙 아저씨가 벨기에산 초콜릿과 직접 우린 차를 마시라며 옆 탁자에 놔두고 가셨다. 뜨끈한 물에서 나른하게 몸을 녹인 우리는 차가운 돌계단을 성큼성큼 맨발로 밟고 나와 오른편에 있는 가정용 스팀 사우나에 들어갔다.



벨기에에서는 때타월로 때를 미는 대신 스팀 사우나에서 때를 불린 후 바디 스크럽으로 각질을 제거한다고 한다. 사우나 안에서 소피와 이야기를 하며 시원하게 때를 불린 후 스크럽제로 몸을 마사지했다. 개운하게 샤워를 마친 뒤 스팀 사우나 밖으로 나왔다. 여름밤이었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 시원하고 상쾌했다. 커피머신에 캡슐을 넣어서 향긋한 커피 한 잔을 내려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마셨다. 목욕을 했더니 몸이 노곤해졌다. 평소에는 쉽게 누리지 못할 호화로운 하루였다.



이처럼 히치하이크를 하다가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어 밤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현지인 가족이 사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경험하는 일은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놀랍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였단다. 낯선 이방인을. 특히 한국인을 집에 초대하는 건 처음이라며 나를 만나게 되어 한국이란 나라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하셨다. 정말 감사한 하루였다. 유쾌한 벨기에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나도 긴장을 한껏 풀고 편히 쉴 수 있었다.










다음날, 길게 신세를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눈을 뜨자마자 짐을 챙겨서 현관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창밖에는 장대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지젤 아주머니는 비 오는 날 무리해서 가지 않아도 괜찮다며 날씨가 갤 때까지 며칠 더 지내라고 하셨다.


그렇게 하루 더 머무르게 된 나는 비도 오고 날씨도 우중충하니까 집에서 쌍둥이들과 소피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비 오는 날은 역시 크레페가 제격이라며 니콜라스는 주방 서랍에서 크레페 전용 팬을 꺼냈다. 그는 자신 있게 팔을 걷어 올리며 크레페에 들어갈 재료를 준비했다. 밀가루, 우유, 버터 그리고 약간의 소금.



“음... 계란이 없네. 그럼 남은 재료를 구하러 가볼까!”



잔뜩 신이 나 보이는 니콜라스를 따라 재료를 구하러 뒷마당으로 나왔다. 마당 안쪽에는 지젤 아주머니가 가꾸시는 아기자기한 텃밭이 있었다. 민트, 바질, 토마토, 호박, 양파, 오이, 상추 등 웬만한 채소는 전부 직접 재배하고 계셨다. 작은 텃밭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니. 나도 언젠가는 이런 사랑스러운 집에 살 수 있으려나. 마당에는 딸기, 해바라기, 자두나무가 있었고, 한쪽에는 병아리와 닭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닭장도 있었다. 니콜라스는 닭장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닭을 꺼내서 한 번 안아보라며 내 품에 안겨주었다. 푸드덕거리던 닭은 내 품이 편한지 구구- 거리며 가만히 안겨있었다. 닭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모이를 한 줌 주고는 암탉이 낳은 달걀을 몇 개 챙겨서 집에 들어왔다.



마당에서 구한 재료를 전부 블렌더에 넣고 섞자 쫀득한 반죽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원형 크레페 팬에 버터를 바르고, 그 위에 반죽을 얇게 펴서 올렸다. 반죽에 방울이 올라오며 크레페는 점점 모양을 갖춰갔다. 크레페를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했다.




'집에서 혼자 크레페를 만들어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큰 집에 살게 된다면 반드시 크레페 전용 팬을 사고 말 테다.




우리는 부엌에서 얇은 크레페를 10장도 넘게 만들었다. 4인용 반죽을 준비했더니 잘 익은 크레페가 접시 위에 층층이 쌓였다. 제일 위에 있던 크레페를 한 장 덜어내 쟁반에 펼쳤고, 그 위에 휘핑크림과 흑설탕을 가득 뿌린 뒤 돌돌 말에서 입에 쏙 넣었다. 직접 만든 크레페는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달달했다. 촉촉한 크레페와 달콤한 생크림의 조합은 완벽했다. 이렇게 맛있는 크레페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옆에서 잔소리를 하며 코치해준 니콜라스 덕분이다. 벨기에의 가정집에서 크레페를 만들 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데, 니콜라스 고마워!



마시멜로를 녹인 달콤한 핫초코를 후식으로 마신 뒤 이번에는 줄리엔과 2층에 올라가 당구를 쳤다. 호화로운 저택에는 당구대, 탁구대는 물론 사면이 책들로 가득한 서재도 있었으며 앞마당에는 발리볼 코트와 분수대, 야외 테이블과 바비큐 시설도 설치되어 있었다. 실로 없는 게 없는 집이었다.



저녁에는 소피의 친구가 식사를 하러 올 예정이었기에 소피와 나는 함께 요리를 하기로 했다. 우리가 만들 요리는 스페인산 흑돼지 뒷다리 구이와 벨기에 푸딩이었다. 대형 마트에 같이 장을 보러 간 뒤, 부엌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크리스티앙 아저씨는 사이좋게 요리하는 우리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그리고 원목 테이블에 스타터로 먹을 나초와 아보카도를 으깨 만든 과카몰리, 오늘의 요리와 잘 어울리는 프랑스산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을 두 병 꺼내 놓으셨다. 식탁에 놓인 갖가지 요리를 보자 입에 침이 고였다.



'여기는 천국인 게 틀림없구나' 





벨기에의 가족들과 함께 했던 즐거운 저녁 식사








저녁을 먹은 뒤 일기예보를 보니 다음 날은 날씨가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소피와 시내 구경을 하고 나서 다음 목적지인 루벤에 가기로 했다. 이른 아침 방에서 가방을 전부 챙겨 1층으로 내려가자 선물 한 보따리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루벤까지 가는 길에 배가 고플 거라며 지젤 아주머니는 직접 만드신 샌드위치 그리고 바나나, 맥주, 초콜릿 케이크, 탄산수 등 비상식량큼지막한 봉투에 챙겨주셨다. 그 외에도 벨기에에서 가장 유명한 캐릭터 틴틴이 나오는 만화책과 두툼한 종이에 루벤이라 큼지막하게 적어 손수 만든 히치하이크 사인 정말 감동이었다.



"지젤 아주머니, 신세 많이 지고 갑니다."



감사함에 어쩔 줄 몰라 아주머니를 꽉 안아드리고 가족들에게 인사를 한 뒤 현관을 나왔다. 붉어진 눈시울을 소매로 닦아내고 소피의 차에 올라탔다. 시내에 함께 나간 우리는 리에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벨기에산 초콜릿과 바닐라 와플을 먹고, 뷔렌 언덕에 올라가 리에주 구시가지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리에주의 중심에는 뫼스 강이 흐르고 있었고 한가운데는 섬이 있었다. 작지만 무척 화려한 도시였다. 저 멀리 색 바랜 건물들과 거리의 사람들이 점처럼 작게 보였다. 언덕에서 내려온 우리는 마지막으로 시내를 몇 바퀴 더 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소피는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히치하이크를 하러 다시 길 위에 올랐다.



리에주의 야경. 지난 3일간 신데렐라의 요정 할머니를 만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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