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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Jun 07. 2019

소매치기로부터 구해준 천사들

@보스니아, 사라예보


보스니아 사라예보에 도착한 이후 소매치기를 3일간 연속으로 당했다. 다행히도 소매치기범들은 치약, 칫솔, 볼펜 등 중요한 물건이 없는 가방 앞주머니를 노렸다. 하지만 어제도, 그제도 소매치기를 하려는 모습을 목격하자 자존심이 확 구겨졌다.


그날도 길을 걷는데 뭔가 어깨가 묵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꺼림칙한 마음에 뒤를 홱 돌아보자 얍삽하게 생긴 청년이 내 가방 지퍼를 열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그의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소매치기범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는 것이었다.


후, 내가 소매치기를 또 당할 뻔하다니.

그는 분해서 씩씩거리는 나를 보며 히죽 웃더니 지금껏 오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잽싸게 사라졌다.


망할 놈! 가다가 자빠져서 코나 깨져라. 그러나 다음 날에도 소매치기범과의 악연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른 놈이었지만 말이다.






골목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 어디를 찍어도 오랜 멋이 드러나는 사라 예보의 구시가지.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들으며 골목길을 따라 뚜벅뚜벅 걸었다. 고즈넉한 골목길의 유혹에 빠져서 사진을 찍는데 여념이 없었는데


… 바로 그때!




야!!!!!! 뒤돌아봐!!!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내 뒤에서 꼼지락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이번에는 어린 커플이었다.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의 커플은 내가 노려보자 가방에서 손을 슬쩍 빼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사를 하더니 태연하게 웃으며 가던 길을 갔다. 얼굴에 대고 욕이라도 실컷 퍼붓고 싶었지만 어안이 벙벙해져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cajdzinica dzirlo




방금 전 나에게 소리를 지른 사람은 건너편 찻집 테라스에서 따뜻한 과일 차를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저 사람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누군가가 내 물건을 훔쳐가는 것도 모른 채 그저 경치가 예쁘다며 사진이나 찍고 있었겠지. 갑자기 울컥해서 찻집 돌계단에 주저앉아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3일 연속으로 가방을 털릴 뻔하다니... 난 왜 이렇게 한심할까.

어쩜 이렇게 둔하고 멍청할 수가 있냔 말이다.








고개를 숙인 채 자기 한탄을 하고 있자 소매치기범의 존재를 알려줬던 요니와 에디가 울고 있던 내 손에 과일차를 쥐여주고는 계단에 앉았다.



야, 이 골목을 봐. 얼마나 아름답냐. 나 같아도 사진 찍느라 정신없었을 거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정신 차려, 이 친구야.








그 말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그동안 힘들었던 감정이 몽땅 녹아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수호천사 같은 그들은 내 기분을 북돋아주려고 웃긴 표정을 짓는 데 열심이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버렸다. 다행이었다. 그래도 나쁜 일만 생기라는 법은 없나 보다. 뜨끈한 과일차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찻집에서 실컷 울고 난 뒤 기분전환을 하자며 거리로 나선 그들을 따라 절벽 요새가 있는 오르막길로 향했다. 절벽 요새 전망대에는 사라예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카페가 있었다.







쓰디쓴 보스니아의 커피와 함께 절벽에서 내려다보는 시내의 전경은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탁 트인 하늘과 싱그러운 숲에 둘러싸인 사라예보. 시내 곳곳에는 빨강 지붕의 아기자기한 집들이 있었고, 아담한 도심공원 옆에는 밀랴츠카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인생이란 쓰디쓸 때도, 달달할 때도 있는 법이지. 다시 힘내자.







요새에서 내려온 우리는 코너에 있는 작은 상점에서 과자와 우유를 사들고 요니의 차에 올라타 작은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 속의 여행이랄까.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과거에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던 장소였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아무렇게나 방목된 소와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우리는 건물 뒤편에 있는 피크닉 테이블에서 피크닉을 즐기기 위해 마트에서 사 온 간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드넓게 펼쳐진 잔디밭에서 여유를 만끽한 뒤 산을 내려가 에디의 친구가 운영하는 찻집으로 향했다.



평소와 색다른 하루는 왠지 마법 같았다. 우리는 찻집에 앉아 하루를 돌아보며 꽃향 그윽한 차를 마셨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같이 있던 아늑한 찻집에서 그들은 닌자 옷을 입은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틴케이스와 티백을 선물로 주었다.




@franz&sophie


이건 선물이야. 향이 좋은 블랙티니까 여행 다니면서 마시고 기운 내. 여기 그려진 닌자처럼 당당하게 기죽지 말고 여행해. 가방은 항상 조심하고. 너의 여행을 응원할게 꼬맹아.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 줘.



그들의 응원에 힘들었던 기억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우리는 서로를 꽉 안아주고 서로의 길을 응원하며 발길을 돌렸다.


고마워요. 잘 지내. 요정 아저씨들.






마법에 걸린 신데렐라가 된 듯한 하루였다. 힘들었고 상처투성이였던 사라예보는 어느새 마법의 성으로 바뀌었다. 어느 순간 요니와 에디가 뿅 하고 나타나 평생 기억에 남을 유리구두와 우아한 호박마차를 선물해주었으니까. 사라예보는 행복하게 마무리되어 내 마음 한 곳에 고이고이 접어둘 수 있게 되었다.


요니와 에디, 그들은 요정 아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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