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터널 같은 시간을 지나가는 중
오늘은 25년의 마지막 날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곱씹는 요즘
행복했던 시간도 가슴 뛰는 순간도 많았지만 왜인지 우울감에 허우적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는 요즘이다
24년 9월 발리에서 지금의 남자친구를 우연히 알게 되어 천천히 친해진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결혼을 준비하게 되었다. 너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여기까지 왔다. 처음에는 신기하고도 감사했다. 다른 사람들은 결혼 준비를 하며 많이 다툰다던데 우리는 다툼도 없이 의견 충돌도 없이 남자친구가 나를 참 많이 존중해주고 있구나. 고마웠다.
그런데 문제는 차츰 생겨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결혼 준비를 하는 과정이 즐거웠고, 여러 스드메 업체를 예약하고 알아보는 것이 즐거웠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웨딩 업계의 비합리적인 관행에 화가 났고, 이렇게 까지 부당함을 겪으면서 결혼을 과연 준비해야 하는 게 맞을까 많은 생각이 들고 낙담하게 되었다.
처음 인스타를 통해 봤을 때부터 우리의 서사를 담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던 베뉴 A. 그곳에서 웨딩을 진행하기 위해 26년 전체 토요일 2부 일정 중 남아있다는 9월 5일을 선택했고, 야외웨딩을 진행하기에 썩 좋지 않은 날씨였지만 온갖 이유를 대며 그 날짜를 마음에 들어 하기 위해 합리화를 하며 결혼 준비를 이어나갔다. 어느새 그 날짜는 우리의 결혼기념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버진로드를 걷는 상상을 수없이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처음 150명으로 생각을 하고 계약을 했던 베뉴였는데, 실제 하객수를 세어보니 260명은 될 것 같았고, 난 점점 마음이 불안해지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예약했던 베뉴는 150-200명이 가장 예쁘고 하객 불편함도 없다는 후기가 많아서 정말 많이 수백 번도 넘게 고민을 하다가 남자친구랑 하객으로 같이 가보게 되었다.
그렇게 가게 된 베뉴 A에서 난 실망을 많이 했다. 인스타에서 사진으로 보는 것과 달리 예쁜 지도 잘 모르겠었고, 주차나 음식이나 협소함 등에서도 불편함이 많았다. 그걸 몸으로 체감하니 점차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베뉴에서 웨딩을 진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4월에 베뉴 계약을 한 우리는 11월 말쯤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베뉴에 계약금을 냈다. 이렇게 내년에 결혼을 하기로 한 우리의 계획은 나로 인해서 엎어진 거다. 뒤로 밀려버린거다. 무려 8개월이나. 27년 5월로 밀려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홀가분했다. 선택을 잘한 것 같았고. 기분이 참 좋았다. 그동안 하객수와 협소함을 걱정했었는데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런데 내가 간과했던 것이 있었다. 새로 계약한 날짜가 마음이 안 가는 것 있지. 뭔가 그동안 7개월 동안 꿈꿔오고 설레하던 게 전부 물거품이 된 것 같고. 더 이상 결혼 준비가 설레지 않게 되고, 같이 하는 미래가 기대가 안되고, 무기력해지고, 새로 계약한 27년 5월은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지고, 날짜에 대한 애정도 없고 어색하고, 지나간 선택이 후회되고 아쉬운 생각뿐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베뉴도 더 쾌적한 곳으로 바꿨고, 날짜도 후덥지근한 9월 초보다는 5월 중순이 나은 건 사실이니까. 근데 결혼식 날짜가 변경되고 내가 처음 꽂혔던 머릿속으로 수십 번 그려왔던 그 장소에서의 결혼식이 무산되며 뭔가 나 역시 텅 빈 것처럼 모든 게 무의미 해진 것 같다.
사실 중요한 건 같이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고 행복하게 말 그대로 해피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만드는 건데. 난 왜 이렇게 결혼식과 로망 실현에 집착하게 되어 현재 무기력에 빠진 건지 모르겠다. 이해를 잘할 수가 없다. 반드시 결혼을 하고 싶었던 25년 초 나의 마음이 지금은 뭔가 번아웃이 온 것처럼 텅 비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아무튼 결혼 준비를 하던 우리는 둘 다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어차피 결혼할 거 먼저 같이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집을 합치게 되었다. 같이 산지 첫 삼 개월간은 정말 불만으로 삼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남자친구는 자상하고 가정적이고 마음이 따뜻하고 넓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웨딩 베뉴를 변경하는 일로부터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 보니 불평불만이 늘어나고 스트레스도 많아졌다. 그리고 요즘은 정말 괴롭다.
일상이 괴로워서 남자친구와의 권태기일까 한참 고민을 했는데 깊게 생각을 해보니 연인 간의 권태기라기보다는 지금 내 삶에 대한 권태로움인 것 같다.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그런 지점. 글을 안 쓴 지도 오래되었고, 제대로 된 운동을 안 한 지도 오래되었다. 지나간 과거, 지나간 인연, 그 시절 웃던 사랑하던 안도하던 열정적이던 내 모습을 그리워하는 한없이 나약하고 자포자기한 심정의 내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리고 난 자꾸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데, 난 정확히 어떤 것이 불만인 건지 잘 모르겠다. 남자친구가 혼자 있는 것을 지지해 주고 이해해 주는데, 정작 혼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은 하지 않은 채, 퇴근하면 젖은 낙엽처럼 소파에 구겨져 앉아 핸드폰으로 쇼츠만 보는 나 자신이 한없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목표의식 없이, 생각 없이, 한심하게 살아가는 게 너무나도 괴롭고 숨이 막힌다. 내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자유롭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난 뭐가 이렇게 힘든 걸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튼 지금 남자친구는 참 많이 고마운 사람이다. 정말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람. 내가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 것도 당신 덕분이겠지. 만약 당신이 나에게 불안과 힘듦을 주었으면, 당신에 대한 고민을 했겠지만 나 스스로의 고민을 한다는 점에서 당신은 정말 나한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어. 고생이 많아 정말.
결혼을 한다는 건. 타인과 삶을 나누며 살아간다는 건. 당연히 혼자 살아가는 삶과 다른 모습일 텐데. 내가 그동안 너무 양보를 안 하고 혼자 살던 때의 편안함만 추구하며 살아가려고 했던 것 같아. 같이 살 때의 장점도 있을 텐데 그런 건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매사 불평불만만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혼자서 살아온 시간이 길다 보니 남들보다 개인주의 성향이 더 강한 나이기에 적응하고 배워나가는데 오래 걸릴 수 있겠지만 나 역시도 불안한 마음은 조금 내려놓고, 이 시간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여기고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게.
정말 답답한 마음에 눈물부터 나왔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리는 왜 자꾸 싸우는 걸까. 내가 결혼에 맞지 않는 사람인가 방금 전까지도 고민을 정말 많이 하고 괴로워했어.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내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변하지 않는 진실은 당신이었기에 우리가 여기까지 자연스럽게 올 수 있었고, 지금은 둘 다 지쳐있는 상태고, 특히 나는 결혼식에 번아웃이 왔지만, 내가 이렇게 고민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건 당신이 마음이 넓기 때문이야. 그래서 다시 한번 고마워.
나도 단순히 로망 실현을 위해 결혼식을 하는 것이 아닌 부인으로서 당신을 맞이하고, 가정의 일원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준비해 가며 결혼식을 차분히 준비해 나아가자. 한없이 부족하고, 공동체 생활에 서툰 나지만 당신이 꿋꿋하게 옆에서 한결같이 있어준다면 나도 조금씩 변해갈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글로 쓰니까 속이 시원하다. 당분간 글로 마음을 자주 남겨야겠다.
아무튼 연말에는 조금 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평온한 연말을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