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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Apr 26. 2019

별이 쏟아지는 숲 속의 여름밤

@슬로바키아, 도브라보다

수풀을 헤치고, 오솔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고, 수많은 채소밭을 지나왔다. 태어나서 이토록 텅 빈, 하늘이 뻥 뚫린 밭 한가운데를 헤치고 걸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너도 같이 갈래?
다음 달에 스카우트 캠프에 일하러 갈 거야.



보이스카우트 단장이었던 매티를 따라 슬로바키아 시골 마을의 스카우트 캠프에 보조 스텝으로 일을 하러 가게 되었다. Dobra Voda라는 마을의 숲 속 평야에서 열리는 캠프 행사를 기획하고 아이들과 함께 자연을 한껏 즐길 수 있는 기회였다.


1주일 먼저 캠프에 가있는 매티가 캠프 위치가 적힌 지도를 보내주었다. 지도 한 귀퉁이에는 X자가 그어져 있었고, 숲 속 어딘가에 위치한 베이스캠프인 X로 찾아오란다. 이거 무슨 보물찾기 같잖아!


매일 밤 캠프파이어도 열릴 예정이라기에 기대를 잔뜩 품고 여정에 올랐다. 낡은 마을버스를 타고 도브라보다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시골길이었다. 버스는 차가 한 대만 다닐 수 있을 만큼 좁은 논길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렇게 약 1 시간을 산속으로 들어가자 작은 시골 마을 도브라보다가 나왔다.




동서남북도 적혀있지 않다니...

매티가 보내준 지도에는 X자를 제외한 어느 표식도 없었다. 지도상으로는 숲 속으로 5km를 걸어 들어가면 나오는 평야 한가운데 어딘가라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지도를 보여줘도 다들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숲 속에는 불빛 하나 없었기에 늦게 출발하면 어둠 속에 갇힐 수도 있었다. 서둘러야 했기에 대충 방향을 잡고 여정을 떠났다.



밭두렁을 한 시간쯤 걸었을까.

저 멀리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 빽빽한 나무에 둘러싸인 넓은 평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드디어 X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 중간에는 스카우트 캠프 깃발과 흰색 텐트가 둥그렇게 설치되어 있었고, 나를 발견한 매티가 베이지색 천막에서 달려 나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오느라 고생했어. 스카우트 캠프에 온 걸 환영해!”






아득하지만 매 순간이 행복했던 한 여름밤의 꿈




매일 숲 속에 앉아 광활한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이란 몹시 거대하게 느껴졌다. 스카우트 캠프에서 우리는 샤워실과 화장실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산에서 끌어 온 물을 전기 없이 햇빛만으로 데워 호스에 연결하고, 호스는 나뭇가지 위에 매달아 샤워하는 데 사용했다. 그래서 이른 오전이나 저녁이 아닌 대낮에만 따뜻한 물로 샤워가 가능했지만, 시간만 잘 맞추면 나무와 나무 사이에 천막을 쳤을 뿐인 자연 한복판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따뜻한 물을 즐길 수 있었다.



샤워장 바로 옆에는 계곡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작지만 수영하기 적당한 높이의 자연 풀장이 있었다. 한 여름에도 나무가 무성한 그늘 아래 있어서인지, 목욕탕의 냉탕처럼 차가웠다. 햇살이 세게 내리쬐는 날, 더위에 지칠 때면 차가운 계곡물에 뛰어들어 아이들과 물장구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화장실을 만드는 것은 꽤 간단했다.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긴 통나무를 가져다 놓았다. 통나무에 엉덩이만 내놓고 걸터앉아 땅 깊숙이 파여 있는 거대한 구덩이에 볼일을 봤다. 하루가 다 가면 구덩이에 쌓여 있는 변은 흙으로 덮었다. 구덩이가 어찌나 깊고 넓던지. 3주 동안 변이 쌓여도 충분할 것 같았다. 




스카우트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기본적인 슬로바키아어를 외웠다




활동 시간에는 꼬마 스카우트들과 초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곤충채집을 하기도 했고, 문구점에 파는 털실뭉치를 숲 속 곳곳에 숨겨 놓고 찾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꼬깔콘 모양의 인디언 텐트에서는 각종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매티는 아이들을 데리고 막대를 손으로 비벼 불씨 만드는 법도 알려주었다. 나무에 마찰을 일으켜 직접 불을 피우는 건 실제로 처음 보는 진기한 광경이었다.


여기가 무인도야?

뭐, 전기 없는 대자연 속에서 생활하니 원시시대에 떨어진 것 같긴 했다.





나뭇가지에 소시지를 꽂아 캠프파이어에 구워 먹고, 감미로운 기타 연주를 들으며 온전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기에 더욱 소중했던 시간




하루 일정을 마친 뒤, 저녁을 먹고 언덕 나무 사이에 매달려 있는 해먹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자연 속에 사르르 녹아드는 듯한 기분. 매일 밤이면 고요한 풀밭에는 기타 연주가 울려 퍼졌고, 자기 전에는 종종 티타임을 갖곤 했다. 숲에서 직접 캐온 허브잎을 커다란 솥에 넣고 팔팔 끓여 만든 달달한 향이 나는 차였다. 한 컵 마시고 누우면 하루의 피로가 전부 씻겨나가는 듯했다.


스카우트 캠프에서의 모든 경험이 새로웠다. 처음일 테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던 전기, 전자기기, 문명으로부터 이토록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건. 텐트에서 자는 것도, 태풍 부는 날 휘딱 넘어간 텐트를 직접 고치는 것도, 스카프를 메고 선서하는 것도, 하늘에 수 놓인 은하수와 별똥별을 헤아리다 잠에 드는 것도. 말이 안 통해도 자연 속에서 모두와 어울릴 수 있었고, 하루가 다르게 자연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숲 속에서 보내는 일상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다채로움으로 나의 일상을 칠해주었다.




오래도록 별 헤던 밤의 추억을 간직할게





마지막 날, 아이들에게 한글로 짧은 편지를 써줬다.

비록 알아볼 수는 없겠지만, 한글을 보며 나와 함께 보냈던 무더운 여름의 스카우트 캠프를 기억해주길.


텐트를 해체하고 장비를 트럭에 실었다. 캠핑장에 있던 물건을 전부 대형 트럭에 싣고 나니 우리들이 머물렀던 캠핑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내 마음속에는 영원히 그때 그 모습으로 남아 있을 테니까.


아이들은 부모님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작 몇 주간의 만남이었지만 떨어지기 싫다며 다리를 붙잡고, 가지 말라며 입을 삐죽 내민 아이들도 있었다. 달려와서 꽉 안기던 내 키의 절반만 한 아이들에게 남은 여름방학도 잘 지내라고 말한 뒤 우리는 헤어졌다. 




매일 밤 잔디밭에  침낭을 깔고, 별똥별을 세다 잠이 들었다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 아래 잔디밭에 누워 쏟아지는 별똥별을 보며 함께 재잘거리던 밤.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에 뜬 쌍무지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숲 속 평야에서 일상을 보내던 한 여름밤의 꿈.


가끔 한 여름의 추억이 그리울 때면 눈을 감고 캠프파이어 앞에 모여 앉아 떨어지는 별똥별을 세며 지새우던 그때의 밤을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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