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토너 손기정의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다음백과사전’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놓았다.
1936년 8월 13일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에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우승 사실을 보도하며 유니폼 속 일장기를 삭제하였다. 25일 일본관헌이 발견하고 문제를 삼았다.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조선중앙일보는 9월 5일부 자진 휴간하게 되었다.
일장기말소사건을 거론하면 십중팔구 “동아일보”가 거명된다. 맞다! 동아일보가 눈엣가시인 일장기를 떼어내고 게재함으로써 항일의지를 적극 표출하였다. 조선일보도 일주일 후 보도함으로써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묻히거나 왜곡된 언론사, 논산의 역사
그랬음에도 이 두 신문사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폐간된 신문의 존재는 잊혀져 가는 듯하다. 『조선중앙일보』이 신문에 관하여 다음 세 가지 사항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 중앙지로서 일장기말소 사진을 최초로 게재한 신문은, 조선중앙일보이다.
2) 이 사건 이후 자진휴간 형식을 밟았지만, 실은 폐간 조치였다.
3) 당시 이 신문의 사주(社主)는, 논산갑부 윤희중이었다.
우선 정확한 보도시점을 보자. 베를린올림픽대회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기사는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 4면에 실렸다. 그날 동아일보에도 실렸다. 정확히는 그 날짜에, 중앙판 아닌 지방판 조간 2면에 실렸다. 이어 동아일보에서는 중앙판에도 실었는데, 8월 25일자 『동아일보』2면이었다. 동아일보는 처음에는 지방판에만 실었다가, 17일 지난 후 중앙판에 다시 게재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그로부터 1주일 후에 실었다.
이런 릴레이에서 가장 큰 철퇴를 맞은 것은 최초 게재자인 조선중앙일보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권고사직처럼, 형식은 자진 휴간였지만, 신문사 현관에는 나무가 X자 모양으로 못 박혔다. 윤희중 씨의 손자 윤여광 씨(82세)의 증언은 이어진다.
논산은 물론 부여, 공주에 걸쳐 대지주였던 윤희중(尹希重)은 1901년 파평윤씨 4대 독자로 태어났다. 호가 희당(希堂)인 그는 20세까지 한학만 배웠다. 당대 최고의 금수저인 그는 논산 일대에서 고서, 고화, 도자기 등 골동품을 수집하며 소일한다. 그러다가 주변분들의 권유와 조언으로 독립운동에도 눈을 돌리며, 암암리에 군자금 보내는 일을 시작한다.
1920년대 후반기에 서울로 상경한다. 거기서 위당 정인보 선생을 만난다. 계몽사업으로 민족문화 창달에 신경을 써보라면서 일제의 언론탄압으로 망한 신문사를 인수해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정인보 선생만 권한 게 아니다.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조동호(건국훈장 3등급)의 기록에 윤희중 씨에 관한 사항이 나온다. 윤희중 씨는 조동호의 사촌동생 조동순의 처남이다. 그래서 윤희중에게 조선중앙신문에 출자를 권유하였다. 당시 여운형, 조동호, 조동순은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였다. 한국독립운동가협회 기록에 의하면, “독립운동가 여운형(건국훈장 1등급)과 조동호와 함께 조선중앙일보를 운영하였으며, 전무로 활동하였다.” 표면상 여운형을 사장으로 내세워 사설 등을 쓰게 하면서, 실제는 기자들 월급 등 모든 경영을 책임지는 CEO였다.
그러다가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이 벌어졌다. 필화(筆禍)보다는 사화(寫禍)였다. “때려 부수라”는 명령과 폐간에 이어 구속 위기도 우려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구속까지는 심하다는 정서도 있었던 데다가 윤갑부가 어디서든 인심을 잃었던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지주들에게 절체절명의 위기는 6·25였다. 숙청대상 1위가 지주, 2위가 경찰였던 시절, 누구에게나 인심을 잃지 않았던 그는 주변 농민들 만류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일제말에도 만석꾼 재산은 요지부동이었다. 대동아전쟁 때 일제는 한반도를 상대로 공출을 시작했다. 이때도 그는 모나게 행동하지 않았다. 쌀을 더 바칠지언정, 놋그릇은 파묻어 숨겼다. 그의 골동품 사랑도 여전했던 듯싶다. 젊어서부터 시작한 골동품 수집은 양보다 질 위주로 나갔다. 논산에는 개인전시관이 없었기에 보관이 문제였다. 서울로 올라가면서 골동품 관리는 더 부실해졌다. “돈을 의미 있는 데 쓰라”는 주변분들의 권유로 암암리에 독립자금 보내는 일도 시작했다. 이 일은 신문사 폐간 후에도 계속 되었다. 상해로 보내는 군자금은 멈추지 않고 지속했다.
와중에도 골동품 애호벽을 버리지 못했다. 평소 상당량을 구입하여 수집하던 것들이 곰팡이가 슬고 망가지니까 대책을 찾아야 했다. 마침 국립공주박물관이 개관하면서 1941년 유시종 초대관장의 권유로 기탁하였다. 유관장은 사랑채에서 살다시피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기탁된 유물은 박물관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1948년 정식 기증되었다. 기증품 중에서 도장은 집안의 보물로 내려오던 것으로 당시 누이가 부마(임금의 사위)의 집안인 정씨네 집으로 시집 갔을 때, 그 집안에서 내려오던 도장이었다.
경주 최부자 못지않은 철학, 그러나 현실은
45세 해방 후 다시 광석으로 내려온 윤희중은 50대 후반까지 논산에 머문다. “그 사람 땅 밟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곳이 논산 광석뿐 아니라 인접한 부여, 공주에까지 미쳤다. 정확히 내 땅이 어디까지인지, 소작을 누가 짓는지 모를 정도였다. “가을 추수 때면 곡식 창고가 꽉꽉 들어찼는데, 마치 대한통운 창고 같았다”고, 손자 윤여광 씨는 술회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관리인인 ‘마름’이 10명이었고, 그 마름이 거느리는 ‘도마름’이 각각 5명씩이니, 그 너른 땅 소출을 관리하는 사람이 50명 이상이었다. 당시 마름을 재임용할 때 기준은 “결산 결과, 작년에 비하여 2~3% 많습니다”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출이 떨어진 해에도 플러스로 보고하는 경향이었는데, 윤부자는 그런 거짓보고를 못하게 하였다. “100석을 넘기지 말아라”고 한 경주 최부자집처럼, 윤희중 가문도 99, 999 등의 숫자를 중요시했다. 이렇게 윤부자는 두 가지만 신경 쓰고, 나머지는 모두 일임하는 형태의 경영을 유지해왔다.
농지개혁은 북한에서는 1946년 초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에 의한 전면적 토지개혁이 이뤄졌다. 남한에서는 단독정부 수립 후 1950년 3월에야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 6·25전쟁 발발 직전 실시되었다. 원칙은 ‘유상몰수·유상분배’였다. 남한의 토지개혁이 지주에게 유리했다는 평가도 있으나, 윤희중의 경우는 아니었다. 당시 지가의 1/5로 책정된 금액을 현금 아닌 지가증권으로 지급하였으며, 그 채권이 나중에는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 했던가! 논산갑부 윤희중 집안의 3대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희당의 아들 윤석주(尹錫疇)의 연희전 문과 졸업때.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당시 이상, 윤동주 등과 교류할 만큼 문재(文才)가 출중하였다.
문재 타고난 후손들 이야기
윤희중은 파평윤씨 서윤(庶尹)공파이다. 윤희중은 4대 독자로 1901년 4월 11일(음력) 태어났다. 1971년 8월 12일 타계했으니 그의 나이 70 고희때였다. 자손복은 많아 6남 7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1918년에 얻었다.
1927년경 상경하여 1945년까지 서울생활을 18년 정도 한다. 해방후 6·25를 거치고 1950년도 말경까지 13년 정도 논산생활을 하다가 다시 상경, 서울살이를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노년기를, 서울 장남 집에서 보낸 것이다.
장남 윤석주(尹錫疇) 씨는 1918년 12월 25일생이다.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았고 정년을 채운다. 당시 이상, 윤동주 등과 교류할 만큼 문재(文才)가 출중하였으나 남겨둔 작품은 없다고 한다. 1989년 72세로 작고하는데, 평생 샌님으로만 살아온 것이다.
윤갑부의 아들 윤석주는 2남 2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인 윤여광(尹汝光) 씨는 1939년생으로, 올해 82세이다. 고령임에도 희당 윤희중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정확하다. 큰 손자 윤여광은 직장을 구해야 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첫 직장은 신문사였다. 군대 졸업 후 우연히 S신문 게시판에 붙어 있던 모집공고를 보고서 응시를 했다. 그 신문사 공채1기가 되기까지 에피소드 하나! 면접관이 집안을 물어보면서, 할아버지 하시던 일까지 물어보았다. “조선중앙일보 경영하셨다”고 답하니 깜짝 놀라며, 자기네들끼리 수군수군했다. 합격을 하고 발령이 난 후 나중에 좀 친해져서, 당시 면접관에게 물어보았다,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면접관들은 조선중앙일보에 대한 검증의 시간을 가졌단다. 이광수도 친일로 돌아섰던 당시 “황성일보의 경우 겉은 독립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친일행각을 했는데, 조선중앙일보가 그런 신문은 아니었는지?” 따져보았다는 것이다. 그 검증에서 무사 통과 후 입사한 신문사에서는 7~8년간 근무하였다.
그후 삼성으로 옮겼는데, 주로 창립멤버로 활약했다고 술회한다. 용인에버랜드 태동을 위하여 기획실에서 암약, 각사 자금을 염출하는 등 비선 업무를 수행해온 결과 5년 만에 개장을 하였다. 첫 번째 미션 완료! 이제는 삼성물산이나 삼성생명(=동방생명 후신), 제일모직 같은 양지로 나가서 일하기를 기대했으나 이병철 회장이 또다른 미션을 주었다. 70년대 오일파동으로 외자도입이 어려웠던 당시, 그 팀에 떨어진 특명은 ‘호텔신라’ 신축 추진! 당시 4층 구조의 호텔 신라는 녹슨 철골 상태로 앙상했는데, 어떻게든 완공해내라는 프로젝트였다. 경제기획원에 들어가 외국과 합작 시도를 꾀하는 등 이 또한 5년 만의 각고 끝에 1979년 3월 오픈을 하게 되었다. 굵직한 현대사와 함께 해온 그는 2006년 정년퇴직을 하였다. 이제 그는 노성에 가끔씩 내려와 파평윤씨 노종파의 종사일도 거든다.
윤갑부의 아들 윤석주는 2남 2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인 윤여광(尹汝光, 82세) 씨의 가족사진(아내와 아들 내외, 손자)
신당리에서 사라진 고대광실집
그러면서도 고향땅인 광석 신당리에는 여간해서 들르지 않는다. 으리으리했던 고대광실이 사라졌고, 그 많던 문전옥답이 눈에 아른거리면서 황량하게 느껴져서란다. 현재 남아 있는 만석꾼 집은 윤희중 본가가 아니다. 문화재로서도 손색이 없는 본가는, 완주에 사는 구매자에 의하여 해체되었다. “그냥 놔두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도 해봤지만 “여기 들어와 살 일이 없다”면서 집 전체를 완주로 옮겨가 복원해놓은 상태이다. 와중에도 두 채는 남아 있다. 이 집은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의 손자 한상빈 씨가 구매하였다.
한 채는 대지 1000평에 서 있는 고택으로 1984년 봄에 구입하였다. 당시 서울 강남아파트 한 채 가격이 3천만 원선였는데, 폐가이다시피한 이 집을 2,300이라는 거금에 계약하였다. 나머지 한 채(300평)는 몇 해 전 9천만원에 추가 구입하였다. 시골집에다가 이렇게 거금을 들인 데는 사연이 있다. 1907년 결성된 “5적암살단” 주요 멤버는 나철, 기산도, 오기호, 윤이병, 한훈 등이었다. 이때 스무살인 한훈이 제일 어렸고, 윤이병은 노성사람이었다. 한훈이 도피생활을 할 때 고초를 제일 당한 사람은 본인 당사자보다도 그의 부인인 유응두 여사였다. 주재소로 끌려가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위골, 출소 후에도 번뜩이는 감시의 눈.... 가장인 할머니 본인과 식솔들을 거두어줄 손길이 간절히 필요했다. 이때 윤이병이 같은 파평윤씨인 윤갑부에게 부탁하였고, 윤갑부의 OK로 한훈 가족은 그 집 신세를 지게 된다. 그 때 기거하면서 입은 은혜를 유응두 할머니는 평생 잊지 못하였고, 그 할머니 유지와 추모 차원에서 손자인 한상빈 씨는 이 집을 사들이고 정착한 것이다.
연초 기자가 희당 윤희중 고택이 있는 신당리를 찾았을 때, 동네사람들은 그를 만석꾼 전설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었다. 기자가 마을 회관을 들르자, 나이 지긋한 분이 나서더니만, 동네 옛날 이야기 들려준다면서 회관 옆 고택으로 이끈다. 충남 논산시 광석면 신당리 90-4, 11 일원. 계룡 신도안에서 살다가 1983년 보상을 받고 광석으로 이사온 한상빈 씨 집이다.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의 손자인 한상빈 씨가 현재 살고 있는 주택 바로 옆에 있는 고택은 천석꾼 정도가 아니라, 만석꾼 저택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폐가 수준에 가깝지만 예전의 영화와 위용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들려준다. 현재 그 고택을 중심으로 하여서 날맹이 위쪽은 모두다 그 집의 행랑채였단다. 고택 옆으로는 ‘마름’이 살던 집이고, 좀더 내려와서는 창고지기가 살던 집이었다며 당시 윤갑부 집안의 판도를 세세히 일러준다.
논산갑부 윤희중의 고택. 본체는 완주로 이전되었고 별채만 남아 있다(오른쪽은 한훈 손자 한상빈 씨 개인주택)
‘논산시 인물사적인 시문화재’로 가치
만석꾼 아들이면 부러울 게 없었을 터인데 “그집은 남로당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런 대토호가 좌익을 했다는 게 실감나지 들리지 않았다.(확인 결과, 남로당 운운은 전혀 사실 무근이다. 사회주의와 6·25를 거치면서 생겨난 시대의 비극이요 와전이다.) 지금은 자꾸 허물어져서 폐가처럼 보이기에 “문화재로 지정을 받아서 보전과 역사캐기를 해놓으면 좋겠는데, 정작 나서는 사람이 없다”며, 기자를 안내한 주민은 한숨을 내쉰다. 논산 갑부를 탐구해달라고 제보한 김철규 씨의 부탁도 이심전심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논산시 인물사적인 시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게 그의 관점이다.
충청도 갑부로는 공주갑부 김갑순이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한편 ‘논산갑부 윤희중’과 ‘조선중앙일보’라는 이름은, 바람과 함께 사라져가는 듯싶다. 윤희중은 말년에 궁핍기로 접어들었다. 독립운동 지원에서 시작된 그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부를 축적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 후손처럼 빛을 발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노병이 사라지지 않듯, 거목도 거부(巨富)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이타주의(利他主義)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의 후손에게로, 뜻이 있는 사람에게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