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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Jul 31. 2020

“풋개다리는 마을과 마을, 마음까지 이어줘요~”

- [다같이돌자 동네한바퀴]  광석면 항월1리 풋개마을


광석면 끝자락에 있는 항월1리 초포(풋개마을)는 4개면과의 경계이기도 하다. 동네 끝 노성천 뚝방길 북쪽이 노성면이다. 초포교 건너자 마자 부적면이고 통미교 건너면 연산면과 상월면이다. 행정구역상 갈라져 있지만 지척지간이다. 노성, 상월, 부적면사무소가 머잖다. 막혀 있는 동네, 그러면서 뻗어가는 동네다. 


항월1리는 광석면에서도 숨겨진 동네이다. 서울로 올라가거나 전라도로 내려가는 사람에게 전용도로가 따로 있다. 논산에서 23번 국도를 타면 공주다. 1번 국도를 타면 연산을 거쳐 대전이다. 1번 ~23번 국도 중간에 흐르는 하천이 있다. 노성천이다.  


초포교에서 상류쪽으로 바라본 통미교. 오른쪽 백사장 아래로 예전의 석교 돌이 보인다.



노성천은 연산천을 받아들이면서 논산으로 달린다. 왕덕리와 산동리쯤에서 논산천과 합천(合川)하므로 그 동네 이름이 ‘합천’이라 부른다. 이 강 논산천을 우리는 논산대교로 해서 건넌다. 대교가 없었을 때는 이 강을 어떻게 건넜을까? 논산에서는 배로 건넜고, 상류 10리쯤 올라가야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가 항월리 초포교(草浦橋)다.  풋개다리, 풀 초(草) 개 포(浦)이다. 


노성참게로도 유명한 이곳 노성천에는 고가다리가 두 개나 우뚝 서 있다. 하나는 통미교. 연산면과 광석면의 사계로를 연결시켜주는 지방도로서 재작년에 완공됐다. 다른 하나는 초포교, 광석면 항월리 사람들이 부적면 덕평리로 농사짓기 위해 넘어다니는 농업용 다리이다. 2018년 준공되었으니 둘 다 새다리(新橋)이다. 



논산의 옛길왕건출정길 


이제는 시작과 끝만 남겨두고 퇴역한 예전의 회다리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생겼다. 당시는 뚝방길도 높지 않았으므로 교각이 2~3미터 정도로 짧았다. 비가 조금만 많이 내려도 잠수교가 되었다. 그 전에는 돌다리로 추정된다. 현재 통미교와 초포교 사이에 큰 돌들이 남아 있다. 징검다리는 아니었고, 우마가 다닐 수 있는 꽤 큰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만이 아니다. 보건소 옆에 중수비가 하나 서 있다. 1674년에 초포교를 고쳤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한양 가는 풋개마을 초포길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삼남길로 통칭되는 이 길은 이도령길, 과거길, 이순신백의종군길, 동학길 등으로도 불린다. 새도로명은 과거보러 가는 길이라는 의미로 ‘벼슬길’로 명명해 놓았다. 그런데 이 동네는 이 길이 ‘왕건출정길’로 명명되기를 원한다. 이유가 있다. 


강 건너면 부적면 부인리다. 거기에 태조 고려건국을 예언해준 조영부인을  모시고 제사드리는 부인당이 있다. 왕건의 논산유적지가 5곳이다. 초포교, 왕전리, 부인당, 어린사(탑정호), 개태사이다. 왕건이 연산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했는데, 바로 그 자리에 개태사를 세운다. 이런 배경 속에서 풋개마을에는 왕건의 출정길에 초포교를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KTV ‘옛길 시간을 걷다’에서도 이 길을 촬영해 갔다. 삼남길 해남에서부터 시작해 옛길을 따라 한양까지 가는 코스로서, 초포는 천안삼거리처럼 주막거리로 유명했다. 교통요충지인 이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런 곳에 술집이 성하게 마련. 한때 600여 명이 넘었던 동네에 지금은 60여 가구 100여명이 옹기종기 살고 있다. 


이제는 스산해진,  한때 천안삼거리 못지않게 흥청대던 주막거리


책 한권 분량의 동네이야기 


광석면사무소에서 출발할 경우, 항월1리는 노성천을 끼고 있다는 점에서 2~4리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4리는 등산로가 잘 닦여진 서변산 자락이다. 1~3리는, 그 산과 마주보는 봉망산(국립지리원 정식명칭) 자락이다. 4리 초입에는 ‘탑과채’ 논산수박연구회 대형창고건물이 항월리로 진입하는 차량을 맞아준다. 조금 더 들어오면 YWCA에서 운영하는 아동돌봄기관 ‘생명숲돌봄센터’가 있다. 그 전에는 항월2~4리 공동의 마을회관 자리다. 거기를 거쳐 노성천쪽으로 쑥 내려오면 길 옆으로 거대한 마을표지석이 반겨준다. 동네소개를 집약한 비문도 곁들여 있다. 


동네소개는 대동소이한 게 많다. 그런데 풋개마을은 강이 있어서도 그렇지만 이장이 극성스러워서인지 온 동네가 이야기 지천이다. 동네밴드에 올라와 있는 그의 동네 소개글은 수백 편에 달한다. 질로 볼 때도 하나하나가 주옥 같다. 분량으로도 두툼한 책 한 권 내기에 족한 분량이다. 주마간산으로 보면 알 수 없는 것들을, 귀향인으로서 20여 년간 애정 어린 눈길로 찾아낸 결과물들이다. 


죽림 속 껑쭝한 아카시아 나무엔  딱따구리가 산다. (대나무 뒤덮은 건 금강 뒤덮는 '가시박')


그 중 몇 가지. 논산에서 금개구리가 최초로 발견된 곳이 풋개마을이다. 이런 희귀생물은 물론 새천국인 동네다. 금개구리가 발견되었다는 산밑 소류지 쪽으로 가다 보면 대밭이 보인다. 죽림 속에서 껑쭝한 아카시아 나무 둘이 삐져 나왔다. 안내하던 김이장은 “저기에 딱따구리가 산다”고 일러준다. 동네 초입은 이름부터 황새말랭이다. 동네 한복판에 자리잡은 마을회관에는 제비들이 집을 짓고, 마치 자기네들 집인 양 지지배배 난리가 아니다. 노성천으로 내려오면 청둥오리를 비롯한 새들이 새하얀 모랫가에 내려앉아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외국인노동자들 중에는 낚시처럼 강변의 새 잡는 기술이 탁월한 친구들도 있다 한다. 


새만 많은 게 아니다. 무덤과 사당도 많다. 남양홍씨 사당, 전의이씨 사당, 광산김씨 재실, 여주이씨 재실 등이 있고, 이 집안의 선조들 묘소가 많이 있다. 논산갑부 조옥환 씨 묘소도 있다. 


김권중 이장 중심으로 좌=어머니(우= 마을역사도 잘 아는 화투 타짜)


정감록 초포가 어디냐?


인조 25년에 노성에서 역모사건이 터졌다. 정조때도 문인방이라는 자가 역모를 일으키다 잡혀서 문초를 당하였다. 그때 정조가 물었다. “초포라는 데가 어디냐?” 초포라는 지명이 많았지만 예전 인조때 사건도 있었던지라 계룡산 주변의 초포(풋개)가 지목되었다. KBS 역사스페셜 “정감록 조선의 운명을  말하다”에 초포가 소개된 적이 있다. 정감록에는 ‘초포에 배가 들어와야 세상이 바뀐다’고 예언돼 있다. “동네 안쪽으로 배묵골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는데, 그곳이 배 묶어두는 포구였다나 벼” 마을회관 정자 아래서 육백을 치는데 오고가는 현금 대신 주판알로 계산중이던 자칭 ‘선수’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 얘기를 들은 김 이장은 “그런 설도 있지만, 계곡 모양이 뱀 같다 하여 뱀골이라 했고, 뱀골이 배모골로 변천이 된 거 같다”고 조용조용 귀띔이다. 



어쨌거나 이 동네 한복판에 배가 등장한다. 실감나지 않지만 논산에서는 배가 은진미륵 앞까지, 또는 연산천까지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간간 들려온다. 그러나 물길이 훨씬 넓은 포구 포(浦)자를 쓰는 초포에 배가 들어왔다는 기록이나 이야기는 없는 모양이다. 올해 항월1리는 3천만원을 받는다. 논산시에서 올해 희망마을선행사업 마을로 5개 마을을 선정했고, 그 중의 하나 항월1리가 된 것이다. 마을회관 앞으로 300평의 밭이 있는데, 그 땅을 장기 임대하여 마을 공원으로 활용하려 한다. 애초 한복판에는 연못을 계획했지만 여러 논의 끝에 결국 상징적으로 배 조형물을 세우기로 결론을 냈다. 초포에 정감록의 배가 들어와서 약속의 땅이 되기를 기원하는 염원에서다. 



요즘 풋개마을의 천변풍경’ 


마을회관에 동네 전체가 모이는 것은 1년에 세 번이다. 어버이날과 1월 총회, 그리고 8·15 두레먹는날이다. 딸기농사가 주업인 이 동네는 광복절 때가 가장 한가하다 보니 동네잔치가 크게 벌어진다. 동네 풍물패가 나서고 부녀회가 하루 종일 수고하여 점심은 물론 저녁까지 먹으면서 놀다가 간다. 올해 경비조로 벌써 100만원이 들어왔단다. 올 8순인 어르신 자녀들이 두레잔치 경비조로 동네에다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8순이라는 분이 트랙터를 끌면서 우사도 관리하고 농사도 짓는 현역이다. 마을회관에 할머니방, 할아버지 방이 따로 있다. 그런데 한글대학은 없단다. 희망인원 미달여서라는데, 논산에서는 유별난 현상이다. 


초창기에 30여 명으로 출발한 청년회는 이제 절반 정도로 줄어들면서, 수입도 이래저래 끊어지면서 요즘은 크게 활약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마땅히 모일 장소도 없다보니 통미교 밑에 별채를 마련해 놓고 친목을 도모한다. 기자가 찾은 날은 마침 중복날. 그 통미교 멤버로 부적 부인리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날 점심은 그 사람이 냈다고 한다. 평소에 진 신세를 갚겠다고 복날 한 마리를 그슬른 모양이다. 통미교가 잠수교로 있을 때 초포사람들은 부인리쪽 작은 다리 밑으로 놀러다녔다. 그러다 꺽다리 통미교가 생기자 부적 사람이 놀러오게 되는 역전 현상이다. 


농사도 엇비슷하다. 초포교가 여름 장마철 걸핏하면 잠수교가 되던 시절, 강건너 부적면으로 농사 지으러 다니기가 다소 어려웠다. 새 초포교가 생기면서 초포 사람들은 덕평리에 농사채를 더 빌리거나 장만하였다. 다리 하나를 두고 생겨나는 역전 현상들이다. 김이장이 다리체 천착(穿鑿)하는 이유가 여러 가진데, 농사생업도 그 중 하나다.  


김권중 이장이 약속 장소로 정한 곳은 노성천 초포교 옆 정자였다. <합수정(合水亭) 건립기>를 동네 이장이 직접 썼다. “노성천(구 대천)과 연산천(구 사계)물이 만나는 합수지점에는 옛날부터 다리가 있었는데 풋개다리(草浦橋)라 불렀으며 왕건이 출정길에 쌓았다고 전해진다. 이 다리는 논산이라는 포구 신도시가 발전되기 전까지는 서울과 전라도를 잇는 삼남대로상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4대강외 사업의 하나인 노성지구 등 하천정비 사업으로 풋개다리를 재가설하면서 이 정자를 세우게 되었다. 합수정이라 명한 것은 물이 합쳐지는 곳으로 항월1리의 옛 지명인 합정리(合亭里)와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박스기사 


[김권중 이장이 들려주는 마을이야기]


풋개다리(초포교) 이야기



강변인 이곳은 일찍부터 문명이 발전했겠어요?

= 우리 동네 근처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예부터 교통의 요지로 삼남대로의 큰길이었습니다. 정감록에 나오는 초포와 주막거리 명칭에서 보다시피, 한양 가던 나그네의 지친 발걸음을 쉬게 하였던 곳이고, 우리가 어릴 적 뛰어놀던 백사장에는 돌다리가 있었습니다. 


이장이 되어 하고 싶은 사업이 있다면서요?

= 풋개100년사 발간 추진입니다. 차례 내지 주요 내용도 정해 보았습니다. 초포와 풋개의 기원/ 초포원은 어디?/ 풋개다리(초포교)/ 풋개의 자연마을/ 잘 나가던 주막거리/ 풋개의 명당/ 아사리는 언제쩍 얘기 순입니다. 


이 중에서 유독 풋개다리에 집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을 표지석에 기록된 ‘내고향풋개’에 의하면 풋개다리는 왕건이 출정길에 쌓았다고 전해집니다. 혹은,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으러 가는 기념으로 쌓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왕건이 왕이 될 것을 해몽해준 부인(부인리 지밧마을 거주)에 대한 보상으로 고려 개국 후 쌓았을 가능성까지요..... 개태사 은진미륵 부인리 왕전리 왕덕리 등의 지명이나 사찰이 고려개국과 연관된다고 봐서입니다. 


동네 전봇대마다 표시되어 있는 삼남길 안내표시(하늘색=상경길, 살색=남도길)


왕건 이외에 다른 가능성이나 기록은요

=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보면 정유재란때 백의종군 가던 길입니다. “저녁에 이성(현 노성)에 닿자 현감이 정성껏 대접했다. ... 맑았다. 일찍 떠나 은원(현 은진)에 이르렀는데 김익이 우연이 왔다고 한다. 임달영이 곡식을 사러 은진포에 왔다고 하는데 그 행색이 몹시 괴상했다...” 문화원에서 행한 ‘논산 옛길 걷기 행사’도 백의종군길을 표방했습니다.


풋개는 한글소설 춘향전 ‘여정기’에도 나와요. 춘향전 작가는 조경남으로, 실존 인물 ‘성이성’을 몽룡의 모델로 구성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논산지역에서 6개의 지명이 등장합니다. 뇌성(노성), 풋개, 사다리(부적 신교리), 은진, 간치당이, 황화정 등이죠(1647년 호남어사 성이성의 ‘호남암행록’ 참조). 근래에는 동학 농민군의 상경 진군로였다고 봅니다. 동학혁명 당시 1차 2차 봉기 때 모두 초포를 지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초포 갈대밭에 장막을 치고 야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석이나 옛 기록도 존재하나요

= 큰 홍수가 나면 다리는 떠내려가고 또 다리를 놓아야 했겠죠? 그 중 하나 1674년(현종 15년) 4월에 세운 비석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마을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 놓았습니다. 논산지역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교량비석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습니다. 그걸 근거로 하여 돌다리 발굴 복원을 제안하고 주장했는데, 돌다리 하나 발굴에  3억원 정도 든다고 해서 일단 숨고르기를 하는 중이네요. 


논산 옛 돌다리 중에 복원된 곳이 셋이나 있습니다. 수탕교(성동 원북2리, 1675년) 은진미교(미내다리; 채운면 삼거리, 1731년), 원항교(채운면 용화리, 1900년). 이 중 어느 다리가 먼저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비석으로 볼 때 초포교가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역사성 깊고 자료가 나와 있는데도 왜 주목을 받지 못할까요?

= 내가 보기에 이유는 딱 하나,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문화 의식도 그렇지만 배고픈 시절에 끼니 걱정이 우선인 시절에 돌다리 복윈 운운하는 것은 사치였을 것입니다.  내가 이장이 되고 나서 멋모르고 추진해 보았더니 으설피 덤벼서 될 일이 아니더군요. 어쨌거나 교각 돌들은 하상에도 남아 있지만, 동네로 옮겨진 것들도 있고 하여서, 그것들 보면서 위안 삼습니다. 우리가 건너고 상여도 건너던 섶다리를 그리며 그 돌들 위에 놓을 나무들도 확보해 두었는데....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요, 우리 동네의 꿈이!


[도움말] 김권중(항월1리장),  서동석(부인2리장)

[취재]  이지녕 기자


위 글은  『놀뫼신문』 2020-07-29일자 8~9면 브리지에 실렸습니다.

https://nmn.ff.or.kr/18/?idx=4339865&b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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