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녕 쌩글삶글 Oct 22. 2020

논산동학과 ‘망국의 길에 핀 꽃- 동학’

-72대교구 중 사무실 있던 곳은 논산과 예산뿐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논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막강하다.” 이런 주장은 논산사람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일까?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기 1년 전에 노성민란이 일어났다. 1894년 당시 논산은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는 자리였다. 


그로부터 20여 년 인고의 세월이 지나고 1904년 동학이 천도교의 이름으로 재정비할 때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모였다.”  이 땅에는 북조선 포함 천도교 72대교구가 생겨났다. 대교구라고 해봐야 대부분 가정집이었는데, 사무실을 갖춘 교구가 전국에 딱 둘이었다. 논산과 예산이다. 그만큼 논산의 동학세는 여전히 강세였다. 800여명의 교인명부가 수록된 『第三十五大敎區敎案』은 논산밖에 없다. 박성묵 예산역사연구소장이 논산에도 기증한 자료이다. 


박소장은, 지금까지 잠자고 있던 논산이야말로 동학의 총진군지임을 강조한다. 10여 년 전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을 두고 격론이 일었다. 과연 어느 장소,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정할 것이냐? 지자체간에 힘겨루기가 치열하였다. 정읍과 고창이 겨루었다. 고창무장봉기 고부민란, 황토현전적 기념일은 우리 민족끼리의 내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척양척왜를 외친 동학을 전라도 감영군에 대한 싸움으로 축소시키는 한계가 노정되었다. 전주화약일도 모양새가 그러하다. 혁명이 일어난 날을 기념해야지, 해산일을 기념하자는 폼새다. 패전한 우금치도 모양새가 빠진다. 이러저런 것을 종합한다면, 혁명의 불꽃이  본격적으로 발화한 시점,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지점이 동학혁명의 하이라이트인데, 그게 다름 아닌 논산의 연합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논산은 여전히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지만 2020년 9월 6일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정식 창립식을 가졌다. 김선덕 회장의 광폭 행보도 시작되었다. 


......

9월 16일 천도교아산교구를 찾아 달렸다. 충남동학단체협의회(이하 동단협)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천도교35교구가 논산에도 있었는데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탄압이 심했던 건지 알아볼 일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논산이 갖는 위치는 상당하다. 그러나 그 동안 논산에서 제대로 된 어떠한 일들도 진행되지 못하고, 2019년 세미나 한 번이 고작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복잡한 심경으로 여러 선배님들을 만나는 자리에 참석했다. 


들어가면서부터 놀랐다. 옛날 고서적이 한가득이다. 예산 박성묵 예산역사연구소장이 오랜 시간 개인 사비로 모아온 동학 관련 여러 자료들을 세 보따리나 가져오신 것이다. 

........


박성묵 소장이 가보로 간직하다시피하고 있는 보따리들을 풀어놓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박소장은 이해준 교수와 함께 동학12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 참여하여 충남 동학의 얼개를 엮어냈다. 도중에 동력이 상실되는 듯했는데, 2019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본격적인 동학사업의 불을 지폈다. 동학사료발굴, 데이터베이스 구축, 유족구술 등을 내용으로 현재진행형이다. 이 작업에 현장성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박소장은 최근 연구원을 찾아가 공동작업을 제안하였다. 자신이 가진 보따리부터 풀어야 공동연구가 실질적으로 진척된다고 보아서, 그는 가보급들을 한 차 가득 싣고 나온 것이다. 다음은 보따리에 쌓여 있는 동학보물들이다. 



논산땅에 펼쳐질 동학한마당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 논산지부 주관으로 제1회 논산시민 평화대동 한마당이 11월 7일에 열린다. 오전에는 한국지속가능 문화교육센터에서 ‘논산동학마당’이 열리고, 오후에는 논산시민공원에서 평화대동 한마당으로 펼쳐질 예정이다. 


논산동학마당은 논산동학자료전, 논산동학토론회(10시), 논산동학극(11시)으로 꾸며진다. 논산동학자료전은 본지『놀뫼신문』에 연재된 내용들을 주축으로 대형 브로마이드로 선보일 예정이다. 논산동학토론회의 제목은 “동학 남북접의 운명적 만남; 논산 ‘소토산’은 어디인가?”이다. 논산이 동학농민혁명의 주요지역임을 재확인하고, 대림아파트 인근지역인 소토산을 장차 논산동학평화공원(가칭)으로 조성하고자 하는 시발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논산동학극 <그리운 소토산 해방구>는 풍물가락을 바탕으로 198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논산에서 벌어진 일들을 실감나게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윤여진 논산민예총 지부장이 대본을 썼으며 동학연구자들의 감수를 받았다고 한다. 


논산시민공원에서 오후에 열리는 평화대동 한마당은 전시체험와 무대공연으로 나뉜다. 전시체험부문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논산계룡모임의 평화통일자료전과 들차회 ‘차향’의 전통차 전시 및 체험, 논산동학혁명계승사업회의 논산동학자료전이 펼쳐진다. 이 행사의 대미인 평화대동한마당 무대공연은 논산인의 노래, 풍물놀이(논산두레풍물, 금회북춤), 민족춤, 2020 논산시민 평화선언 등으로 논산시민에게 보내는 평화대동의 메시지를 예술로 담아내게 된다. 



 이번호는 동학의 태동을 궁구하면서 현대 우리 삶에 도전을 던져주는 논산의 조각가 김용수 선생의 외침으로 그 시절 동학의 함성을 들어본다.


- 이지녕 기자


위 글은  『놀뫼신문』 2020-10-14일자 7~8면에 실렸습니다.

https://nmn.ff.or.kr/17/?idx=5088556&bmode=view


[붙임 1]  동학극 시나리오 

[붙임 2]  동학의 대의- 김용수



[붙임 1]  동학극 시나리오 



논산동학극 “그리운 소토산 해방구” 이야기


“동학(東學)” 하면, 그 동안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전라도나 공주의 격전지 우금치가 동학농민혁명의 상징인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렇지만 논산인의 입장에서 보면 목숨 걸고 논산에 온 동학농민군들을 품어 안은 논산인들의 포용적인 자세와 헌신적인 도움이 소중한 것이며, 논산에서 이루어낸 전국농민군의 단일대오와 며칠간의 해방구, 드높은 출정의 기세를 기념하고 소중히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에 “그리운 소토산 해방구”를 제목으로 하는 논산동학극을 펼쳐 보인다. 


[줄거리] 

때는 19세기 조선 말. 조정은 무능하고 관리들은 부패하여 백성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었다. 이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설파한 동학사상이 싹텄으나 창시자 최제우는 처형당하고 만다. 그러나 동학사상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지고 1894 갑오년 봄에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의 동학농민군은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치켜들고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이들은 파죽지세로 전주성을 점령하였지만 피치 못할 여러 사정으로 인해 조정군대와 화약(和約)을 맺고 물러선다. 


그러는 사이에 무능한 조정은 동학농민혁명군 진압을 청나라에 요청하고, 이것을 빌미로 일본군은 불법으로 조선에 들어와 조선왕궁을 점령한다. 이에 분개한 남접 동학농민군은 음력 9월에 삼례에서 재봉기하고, 거의 같은 시기에 북접 동학농민군도 봉기를 결정한다. 남북접 동학농민군들은 썩어빠진 세상을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논산에서 합세하게 되고, 논산은 동학농민혁명의 기세가 한데 모아진 출정의 땅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에 논산인들은 정의로운 세상을 갈망해 떨쳐 일어선 전국에서 모여든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들에게 협력하게 된다. 논산의 동학도들뿐 아니라 벼슬아치나 유림들까지 나서서 동학농민군들을 지원함으로써 여러 날 동안 소토산 일대에서 장막을 치고 숙영하도록 돕는다.

 한편 남접을 이끈 전봉준과 북접의 손병희는 논산에서 의형제를 맺고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정한다. 병사를 모으고 군을 정비한 동학군은 논산의 지원에 힘입어 최대의 진영을 갖추게 된다. 전국에서 모인 동학농민군들과 논산인들이 이뤄낸 이 해방구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우리역사 최초의 민본자치 집단체험이라 할 것이다. 


[극의 흐름과 전체적인 내용]

[1장] 시호시호 이내시호!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전국농민군들을 기다리는 논산인들을 그린다.

[2장] 가자, 논산으로!

논산으로 향하는 남접과 북접의 상황을 그린다. 

[3장] 남북접 논산에서 만나다

전봉준과 손병희로 대표 되는 남북접군이 논산 소토산에서 만나 의기투합하는 장면이다. 

[4장] 논산인들의 환대

논산인들이 동학군들을 돕는 모습을 극중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5장] 소토산 해방구

충청 전라 경상의 동학군들이 자신들의 사투리로 동학군의 높은 기세와 자신들을 돕는 논산인들에 감격하는 장면을 그린다.

[6장] 가자, 우금티로!

논산인들의 지원으로 재정비한 동학농민들이 공주를 행해 출발하는 장엄한 출정식을 보여준다.




[붙임 2]   동학의 대의-2


망국의 길에 핀 꽃-동학


조선의 국정이념은 사대와 성리학에 있었다. 고려 강토였던 요하 동쪽의 만주 벌판을 명나라에 그대로 바치면서, 명의 제후국임을 자처하고 들어선 나라가 조선이었다. 이는 전에 없던 민족의 굴종이었다. 성리학은 주자가 유교경전을 재해석하여 관념을 극대화한 사상이었다. 이는 당대 불교이념에 눌려있던 중국인의 자존을 세우기 위한 표현이기도 하고, 중세 중소지주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이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특징은 명분과 의리론에 있었다. 이는 공맹孔孟의 인의仁義를 정치논리로 왜곡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송나라는 중원을 오랑캐 여진족 금나라에 내주고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왔으나, 중원의 정통은 한족漢族인 자신들에게 있다는 명분을 세워 정명正名으로 삼았다. 송나라는 오랑캐 금을 극복하는 것을 명분으로 여겼으므로, 사회 전반을 개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비제로 대별되는 신분제를 혁파함으로써, 사회는 활력이 넘치고 사람마다 소질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역동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대여하는 양곡이나 씨곡을, 추수기에 화폐로 교환하여 나라 빚을 갚도록 하는 청묘법을 시행함으로써, 시장이 활성화되자 화폐와 물류의 유통이 원활하게 되어, 당나라에 버금가는 풍족함을 누릴 수 있었다. 여기에 과거시험으로 발탁한 관료들을 군현에 직접 파견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왕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앞선 선진적 사회구현이었다.


신분제 혁파 송()을 역행했던 조선 성리학


그러나 조선 성리학은 송나라와 반대의 길을 걸었다. 몇 백 년 간극 두고 조선 땅에 접목된 성리학은 그 외에 다른 학문은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웠다. 한 번도 도전받아 본 적이 없는 선비들의 사상 경직은, 그대로 망국의 길이 되고 말았다. 조선은 출발부터 신권臣權이 강한 나라였다. 무장인 이성계와 정치철학을 제공한 성리학자들의 연합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고려 말 성리학자들의 명분은 원나라 치세에 발호한 고려 권문세족 척결과 토지의 고른 분배에 따른 사회개혁에 있었다. 명분은 필요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여, 당쟁이 격화될 때마다 명분이 달라졌다. 파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로 바뀔 뿐 아니라, 자신들의 신분제를 영구화하기 위한 차별을 극대화하는 논리로 작용되었다. 신권이 강하다는 것은 왕의 독단을 막는 장점도 있었지만, 향촌은 사림의 양반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조정의 정책이 왜곡될 소지가 많을 뿐 아니라, 민초들은 그만큼 촘촘한 그물망 내에 있었으므로 삶은 팍팍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말 그대로 사대부의 나라였던 것이다. 


나는 한동안 우리 고대사에 열중하여, 고조선 문명이 지구 반 바퀴를 돌 만큼 훌륭한 역사임을 자각하고, 이렇게 위대한 민족이 왜 망했을까?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소장 다큐멘터리 작가가 쓴 책에서 단서를 보게 되었다. 흔히 망국병으로 당쟁, 임금과 지도층의 무능, 관리의 부패 등을 말해 왔으나, 이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있는 것이어서 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오던 터였다. 우리역사는 노론사관에 장악되어, 역사에 불문율처럼 누구도 노비세습제가 망국의 단초임을 논하지 않았다. 조선의 노비는 40%를 육박할 정도였다. 내 좁은 소견으로는 거길 피해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노비세습제가 장장 500년이다. 만약 노비제를 풀어 인재양성의 길을 택했더라면 어떤 나라가 됐을까? 


생각해 보라,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 천만을 넘긴 조선은 4백만이 노비로 묶여 주인 한사람을 위해 공력을 쓰는 나라였다. 절반도 안 되는 양민(상민)이 모든 과중한 세금과 수탈, 노역과 군역을 지고 겨우 버티는 형국이었다. 더구나 당시 유랑인구가 백만을 넘었으니. 버틸 수 있는 동력이 상실되자, 노비세습의 일즉일천제(一卽一賤制: 부모 어느 한 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됨)를 종모법(從母法:어미가 노비일경우만 자식을 노비로 삼음)으로 바꿔 조금이나마 양민을 늘려보자는 보조조치를 낸 것이 18세기 영정조시대의 실상이었다. 나라가 망해가는 데도 조선의 선비들은, 송나라와 같은 근본개혁을 눈감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라, 4백만을 종으로 묶어 국가에 공여할 능력을 사장시키는 사회 하고, 4백만 각자가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국가하고 어느 곳이 더 행복하고 발전하겠는가? 


더구나 동족을 세습제까지 만들어 노비를 양산하고, 거래하고 500년을 부린 사람들이, 다름 아닌 선비들이었다는 데 충격은 컸다. 선비는 전인격체로 배웠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선비들이 공부하는 성리학은 말 그대로 ‘사람 본성을 살피는 학문’이 아니었던가? 또 자기들 스승 공자, 맹자, 주자는 노비를 부리지 않았음에도, 사림(농촌경제를 장악한 선비무리)이 정치를 완전히 장악하는 16세기는 노비 수가 양민 수를 초과하고 있었다. 그 책임을 어떻게 피해 갈 수 있을까? 노예 상거래는 서양에만 있는 줄 알고 있었기에 며칠을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슬픔이 짓눌렀다. 하루 밤에 읽을 책을 시름시름 알면서 한 달이 걸렸다.  


의병장 유학자들마저 노비제 당연시


다음을 보자.

1. 무엇을 명名이라 하는가? 천자, 제후, 공경대부, 사, 서인庶人이 그것이다. 무엇을 분分이라 하는가? 상하, 존비, 귀천이 그것이다.   ......   귀한사람은 천한사람을 부리고, 천한사람은 귀한사람을 따른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은 마치 눈과 머리가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 같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은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나무 밑 둥과 뿌리를 호위하는 것과 같다. = 생육신 김시습의 <매월당 문집> (15세기)


2. 대방大防이란 적서의 명분과 귀천의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국가와 가정이 공고히 유지되고 비천이 감히 존귀를 능멸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예법이 있기 때문이다. = <명종실록>의 퇴계 이황이 한 말(16세기)


3. 천지의 높고 낮음과 만물의 크고 작음이 있듯이  ......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 귀한사람과 천한사람 구분이 있으며 ...... 어찌 서로 평등하겠는가? = 조선말 의병장 유인석의 <의암집>


말하자면 재야의 선비나, 대성리학자나, 망국을 코앞에 두고 일어선 의병장 유학자나, 모든 선비들 세계관에는 귀천과 차별은 마치 자연법과 같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니 노비제와 그 세습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낄 수 없었다. 말로는 공자의 사랑과 정의를 치국의 근본으로 하여 백성을 편안케(安民)한다하면서도, 실제는 백성을 옥죄고 있었다. 


한 예로 퇴계 이황은 367명의 노비를 거느렸고, 전답은 3천 마지기에 가까웠다. 그 아들의 재산분재기 내용이었으니, 헛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는 농법의 발달과 농지개간 붐이 일어남으로써, 거기 노역을 담당할 노비는 많을수록 좋았다. 우리가 여행을 많이 가는 보길도 주인 윤 씨 집안 노비는 700이었다. 어느 왕실 척족은 만 명을 거느렸고, 이름 있는 사대부들은 천 명을 웃돌았다. 이러한 양반 사대부와 사림 선비들은 각종 세금, 군역(군복무) 등에 책무는 벗어나 있었다. 양반 선비들이 특권만 누릴수록, 백성들은 도탄에 허우적거렸다. 이것이 성리학을 익힌 조선 지도층의 한계였다. 


동학은 이러한 조선의 불합리한 구조와 차별을 극복하고자 한 자각의 소산이었다. 더 도타운 것은 동학이 민초들의 밑뿌리에서 솟았다는 데 있다. ‘사람이 하늘이다’는 선언은 그냥 출현한 것이 아니었다. 갖은 병폐를 뚫고 망국의 벼랑에서 건진, 인류사에 다시없는 천기누설의 영적 선언이었다. 


- 김용수(조각가)

작가의 이전글 총리가 둘러본 돈암서원과 파평윤씨종학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