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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Feb 05. 2019

전국명소로 발돋움하는 계룡 팥거리 “콩쥐팥쥐”

-논산·계룡 농가 맛집 순례(3) : 이야기 함께 먹는 두계장터 팥죽전문

두마면 두계리는 계룡의 중심지였다. 면사무소, 지서, 우체국이 있었고, 5일마다 두계장이 열렸다. 원래는 소국밥집였다 순대족발집하다가 다방도 했던 곳에, 지금은 ‘콩쥐팥쥐’라는 음식점이 하나 서 있다. 7년전 팥거리 분위기에 걸맞게끔 팥죽전문점을 개업한 김승태 사장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구수하다.  “두계 장날에 시골에서 아버지 따라 장터로 온 형제가 있었어요. 궁핍했던 그 시절 아버지가 팥죽을 사주었는데, 형은 5원, 동생은 3원짜리로 시켜주었대요. 먼저 먹은 동생이 형 입만 바라보면서 환장했는데, 그때가 생각난다면서 찾아오는 손님도 있어요.” 



이스라엘 사서인 구약성경에 보면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팥죽사건이 나온다.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중동 분쟁의 씨앗이 여기서 발원했다 할 만큼 팥죽은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동지때마다 챙겨 먹는 팥죽도 숱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콩쥐팥쥐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까?


팥거리 이야기 


계룡시청쪽에서 계룡역으로 진입하면 ‘팥죽다리’를 건넌다. 계룡역에는 커다란 돌에 팥죽거리 이야기가 길게 적혀 있다. 계룡역 맞은 편에는 ‘팥죽이야기’ 간판이 보이면서 팥거리다운 분위기가 짙어진다. 좀 지나면서 두마초등학교를 지나면, 자그만 두계장옥미술관이 서 있는 두계장터이다. 3·1만세운동이 열릴 수밖에 없었던 시장터 번화가 두계 장터에는 매년 4월 1일 만세운동이 재현된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는 이번 행사에 참석한 350명의 점심메뉴는 계룡의 3대 음식 중 하나인 팥죽이다.  예부터 계룡의 삼미(三味)는 신도안 엿,  신도안 냉면, 신도안 팥죽이 있다. 


팥죽이야기는 조선초 개국당시로 올라간다. “두마(豆磨)라는 지명은 팥 가는 고을이란 뜻입니다. 조선 태조가 신도안에 도읍 조성시 인부들이 팥죽을 많이 먹었다는 고사가 있어요. 팥죽을 쑤려면 곱게 갈아야 하는데 수많은 인부가 먹을 팥죽을 쑤려면 마을 전체가 맷돌로 팥을 갈다보니 팥 가는 고을, 즉 두마(豆磨)라는 명칭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김철규 계룡학연구가가 들려주는 팥거리 이야기이다.


거리이름도 팥거리요, 아랫장터와 연결되어 있는 지하도의 벽화도 온통 팥죽거리이다. 그렇지만 먹거리타운처럼 팥죽집이 즐비한 게 아니다. 콩쥐팥쥐집이 유일하다시피한 팥죽집이다. 팥죽칼국수도 있다. 그럼에도 일당백이라고, 팥죽 하나만큼은 국내 정상급이다.  <미더유> 인증업체이다.  “2014년 이 인증제도를 시작할 때 7개만 선정되었는데, 우리가 최초의 선정업체예요. 네이버에도 검색이 되는데, 어느날 서울에서 손님이 기사를 대동하고 내려왔어요. 내비가 문제가 있었는지, 내려서 물어물어 찾아왔어요. 마침 고구마를 굽고 있었는데, 식후 고구마를 챙겨주니 그 냄새를 맡으며 추억에 젖어들더라구요.” 



미더유’ 인증업체로서


충남농어업6차산업화센터에서 인증하는 “충남을 대표하는 건강한 로컬푸드 음식점” 미더유 관련 사항이나 평가는 www.meplusyou.or.kr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미더유’ 인증의 기준 중 하나인 지역농산물은 60% 이상 써야 한다. 팥은 콩 중에서 제일 늦게 수확하고, 제일 먼저 상하기 때문에 구매가 최대 관건이다. 콩쥐팥쥐의 경우 로컬푸드를 100%를 쓰고 있다. 개업할 때 처음에는 여기 처갓집에서 아는 사람들의 것만 구매하였다. 이제는 동네에서 직접 재배하는 분들을 다 알게 되어서 재배 전부터 얘기하고 심는 분도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 팥죽집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질문에 김사장의 답변은 의외였다. “이 동네가 처갓집 동네고, 이 자리가 국밥집하다가 다방으로 바뀐 자리였어요. 내가 총각 때 집식구가 두마우체국 직원였는데, 선을 바로 이 자리에서 봤어요. 집식구는 나와 결혼하면서 직장 그만 두고 나를 따라 서울로 올라갔었죠. 퇴직 설계를 하던 중, 집식구가 친정집으로 가자고 하더라구요. 무슨 계획이냐고 물었더니 팥거리니까 팥여행 겸하여 전국의 팥집을 거의 다 돌아봤어요. 그리고는 집식구 오세화 이름으로 개업을 하더라구요.”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는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해왔고, 우리 가족 중에도 장사를 하는 사람이 없어요. 개업 후에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내가 매스콤 몇 번 타면서 결국 가족들이 알게 되면서 놀랐죠. 장사 체질은 아니지만, 노력하니까 이제는 이리 수다스러운 대변인이 됐네요.”     


정확하고 정갈해야 



개업 후 몇 달 간은 가게에 들렀다가도 쑥스러워서 1시간쯤 후 도망치곤 하였다고 한다. 그런 생활이 몇 달 되면서 집식구가 안쓰럽기도 하여 ‘뭐 도와줄 거 없나?’하다 보니 메뉴판도 써줘야겠다 싶었고..... 그러다가 이제는 손님을 반갑게 맞는 서빙맨이 되어 있다. 대변인으로서 콩쥐팥쥐를 이렇게 정리한다. 


1. 기름을 쓰지 않아 담백하고, 가게에 음식점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팥죽을 테이크아웃도 하는데, 그 음식이 남아서 나중에 먹어도 거부감이 없다. 


2. 주방에서 정갈하게 만들고, 홀의 분위기도 정돈하여 식후 찻집으로서의 분위기도 손색이 없도록 관리한다. 


글씨나 공예에서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선 김사장은 메뉴판이가 실내데코레이션을 책임진다. 그러나 ‘팥죽의 효능’에 대하여 써놓으라는 손님도 있지만 그건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문헌에는 위산이 많은 사람에게 팥은 궁합이 맞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것만 빼고서 써넣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김사장은 정확한 것을 좋아한다. 방송 피디가 주문을 하더란다. “여기 두계 장터가 없어진 이유를 잘 설명해주세요. 아파트가 들어서고 계룡 전체가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요...” 그러나 그런 멘트를 할 수가 없었다. 시골장이 없어진 것은, 그런 이유에서라기보다 농촌생활이 체질적으로 변하면서 생긴 현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방송 출연시 머리 염색을 하고 나오라는 당부도 중시하지 않았다. 평상시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계룡역 거대한 돌에 새겨진 팥 이야기 내용 중 과장된 것이 있음을 지적한다. 팥 거리 조성도 중요하지만, 진실이 앞서야 한다는 지론이다.    


가게 안팎을 장옥미술관처럼


이런 태도는 음식점 경영에도 그대로 반영되는듯하다.  “사람들이 먹어보면 대뜸 알아요! 한두 해 장사 할 것도 아니면 성심성의껏 마련해야죠.” 주방이야 집식구가 책임지지만 주변 환경 정리는 전적으로 김사장의 몫이다. 손재주와 예술혼을 타고난 김사장은 메뉴판 글씨도 직접 쓴다. 붓글씨 같기도 하고 캘리 같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붓과 함께 지내는 집안 환경이었고, 군대 시절에는 보고용 차트를 쓰는 전담이었다. 회사에서는 상장 써주는 일을 도맡을 정도로 달필이었다고 한다. 서예뿐 아니라 목공예나 다른 미술 분야에도 관심이 많다. 목각 서예나 실내 조명등, 메뉴판도 직접 만들었다. 


메뉴판 가격은 7년전 그대로란다. 일행 중 팥이 안 맞는 사람을 위한 그냥 칼국수도 메뉴판에 있는데, 5천원이다. 원가 계산을 해보니 한 그릇당 800원 남는 꼴이라고 한다. 팥알을 다 골라내고 먹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에 맞추려는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배달은 안 하지만, 딱 하나 예외는 있다. 어느 고위직 공무원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데, 그 분이 팥죽을 참 즐기므로 공동효를 하려는 마음이다. 4인분을 가져가려고 기다리는 손님과 얘기를 나누는데, 알고 보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이라고 한다. 이 가격대면 좀 비싼 커피샵에서 한잔씩 하는 것과 엇비슷하므로, 대전 논산 등에서 각기 모일 때 중간 모임 장소로 애용되기도 한다. 



신도안 이야기 밝히며 


신도안에는 도읍지로 알려진 대궐 터가 있고 신도안 용동리에는 인부들이 신을 털어서 생긴 신털이봉이 있다. 도읍을 옮기고자 할 때 수많은 역군들이 일을 하고, 쉬면서 신에 붙어 있던 흙을 털어 모은 것이 신털이봉이 되었다고 한다. 신털이봉 이야기는 아내를 기다리다 죽은 편씨의 한이 깃들어 있다 해서 ‘절개의 산봉우리’로 불리기도 한다(신털이봉 전설 참조).  이러저런 인부들에게 서려 있는 민초들의 한을, 저녁때 한 그릇의 팥죽이 달래주지 않았을까 상상이 든다. 


김사장은 오늘도 시간 날 때마다 목공예품을 만든다. 만들다 보니 이상하게도 등잔받이나 스탠드 등 조명기구에 애착이 가더란다. 예전에 흥청대던 두계시장도 이제는 저물었고, 어느 시골이나 저녁 장사는 일찍 끝나는 편이다. 해 저문 두계 팥거리 장터에, 신도시 계룡과 주변 도회지에 콩쥐팥쥐 이야기와 청실홍실 등불을 다시 켜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털이봉의 전설



(용동1구 상원마을 신털이봉 모습)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옮기고자 하였는데 이 부역에 동원된 사람 중에 전라도 정읍에 사는 편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농사를 천직으로 아는 사람이었으나 그의 아내가 천하일색이라는 이유로 관가의 미움을 받았다. 그는 집을 떠나올 때 아내에게, “여보! 아무래도 내가 집에 없으면 관인의 출입이 잦을지 누가 아오? 그러니 친정에 가 어머니 곁에 있구려.”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세상에 한번 태어나 죽는 것이 무엇이 두렵습니까? 저는 당신의 아내입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제가 집도 지키고 농사일도 할 테니 염려마세요.”하였다. 그는 신도안에 와서 주춧돌을 운반하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러나 집에 두고 온 아내 걱정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아내가 꼭 누구에게 붙들려 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도안 공사중단 명령이 내려 부역 나온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집에 가보았지만 아내가 없었다. 그는 아내를 찾기 위하여 먹는 것도 잊은 채 수소문하며 다녔다. 그러다가 언덕길 아래에 사는 숯 굽는 집 할아버지로부터 자기의 아내가 누구한테 쫓기는 듯 여기를 지나가면서,


“남편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고 허둥대며 저산을 넘어 갔는데, 그 이튿날 새벽에 나졸 두 사람이 찾아와 물어 보아서 엉뚱한 곳을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아내의 소식을 듣고 충청도 신도안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도안에 도착하여 여기 저기 들리면서 아내를 찾아보았지만 그의 아내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털이봉 아래에 뗏집을 짓고 살면서 아내를 기다리기로 했다. 몇 년이 지나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땅을파고 곡식을 가꾸기 시작했다. 아내는 30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늙어서 허리는 꼬부라져 갔지만 그래도 아내를 잊지 못하고 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다가 그만 여기서 죽고 말았다.


신도안의 신털이봉은 많은 사람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내를 기다리다 죽은 편씨의 한이 깃들어 있다 해서 절개의 산봉우리로 불려지기도 한다.『놀뫼의 전설』논산문화원,101쪽]


[글·사진] 이지녕  

이 글은 2017-04-05일자 『논산계룡신문』에 실은 내용입니다.  

https://nmn.ff.or.kr/23/?idx=514354&b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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