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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Mar 10. 2019

논산딸기 선구자를 따라서

- 다같이 돌자 동네한바퀴(3-2)  은진면 남산리 손광석 옹 인터뷰

은진면 남산리 손씨 시재는 이제 1년에 한번만 지낸다. 시재를 지내는 재실인 남창재에서 이것저것 물으니, 정확한 것은 동네에서 제일 많이 아는 손광식 할아버지에게서 들으라고 한다. 외출중이어서 그 다음날 이장과 함께 재방문하였다. 목소리가 찌렁찌렁하고 아직도 건강이 넘치는 듯하다. 어깨 인대가 늘어져서 고생하는 할머니의 귀띔, “밤 12시까지 뉴스만 보고, 지금도 신문이란 신문은 죄 찾아서 읽어요!” 마침 외출했다 갓돌아온 손흥섭 부부도 들어오니, 집안은 손씨 종친회가 되었다. “조선조때 선조가 남산리 일대를 하사받고 내려와 3형제가 살면서부터 손씨땅이 되었다고 들었어요. 밀양손씨는 신라시대 때 경주 남산에서도 세도가 있었고, 아마 그 후손이 이곳으로 와서 남산리가 되었을 확률도 있는 걸로 들은 거 같아요.....” 이 이야기를 받아서 기자가 바통을 이었다. 



남산리 지명 유래부터 얘기해 주시지요.


→ 경주 남산설은 아닐거야. 정확한 기록은 없어도 구전은 있어요. 구전에 의하면, 여기에 동네가 들어선 지 1000년 이상 돼. 처음에는 남씨, 하씨가 살았다고 해요. 묵은 산소를 보면, 하장재 산소가 많아. ‘장재’라는 말은 ‘부자’니까 하씨 성을 가진 부자였다는 말이지. 


그럼 손씨는 언제부터 여기로 왔나요?

→ 내가 14대손이니까 1대를 30년으로 잡을 때 400~500년 되었지. 이성계가 정권을 잡을 때 72명이 두문동으로 들어가 살았어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해서. 그 72인 중에 우리 17대 할아버지가 포함되어 있어. 파주 휴전선 안에 묘소가 있는데, 아직껏 찾지도 못한 채 슬픈 역사이지. 72인 두문동 관련 파주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논산에서는 손씨, 전씨 이렇게 두 성씨만 올라갔어요. 우리가 밀양 손씨이기는 하지만, 나는 17대 할아버지가 개성에서 살았고, 세상이 조선으로 바뀌면서 손씨들이 남쪽으로 낙향하게 된 걸로 추정해요. 


자랑스러운 손씨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우리 집안에서 참판 2명이 나왔어요. 지금으로 보면 장관급이니까 반가(班家)지. 양반집이란 말여. 벼슬이 자랑은 아녀. 서민들 종살이시키고 박대했으니, 어찌 보면 죄를 지은 거여. 우리 역사를 보면 서민들 기록은 하나도 없고 몽땅 왕의 역사여. 그래서 왕조사 대신 서민사가 나오면 반가운데... 경상도 어디 이씨 집안 묘에서 미이라가 나왔지, 언문 편지와 함께. 예전에는 장가 들면 처가에 들어가 살다가 시집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그때를 회상하며 쓴 내용이지. 그때 아내가 남편에게 쓴 호칭이 ‘자네’더구먼. ‘자네! 우리 집에 와서 3년 사느라 고생이 많았지?’ 이런 서민의 역사가 찾기 힘들어. 양반가라고 해서 비난만 받을 건 아녀.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넉넉하다 보니까 반촌의 인심은 훈훈했고 집성촌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어른 말을 잘 듣는 분위기였지. 그건 지금도 여전하다고 봐.  


조선조 끝나고, 그 후의 역사는 어땠나요? 

→  여기를 원남산이라 하고. 원래 남산, 그러니까 원조 남산이란 말이지. 저 뒷산을 남산재라고 해요. 재라고 하잖아 넘어 다니는 고개를 .....꼭대기에 보면 바위를 파놓은 곳이 있어요. 625때 족보 같은 것을 숨겨두기 위하여 그랬다는 것인데, 얘기로만 들었어. 산에서 우리가 펄쩍 뛰어 내리면 산 속이 비어 있는 것처럼 울려. 지금은 누가 거기에다가 묘를 쏴서 좀 그런데, 한번 지질학적으로 연구를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지금도 들어. 


마침 이 부분에 대하여는 1993년 문화원에서 실시한 “내고장 으뜸가꾸기 마을이야기 모음 제8집 은진(恩津)”에도 기록이 되어 있다. [치마바위] 남산재에 있는 바위로 마치 치마처럼 넙적하게 생겼다 한다. 이 바위에는 장수가 오줌을 누어 군데군데 피었다 하여,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기도 했다 한다. 또 바위를 구르면 마치 속이 빈 것처럼 쿵쿵 울린다 한다. 치마바위 앞에 또 바위가 있는데, 아들을 낳지 못하는 부녀자들이 돌을 던져 올려지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옛날에는 부녀자들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함께 배석한 손 이장에게 손 옹의 마을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니 모든 게 새롭단다. 작년에는 충남대에서 나왔다는 10명 정도의 합동조사단이 나와 사흘간 체류하면서 남창재를 중심으로 무언가를 조사해갔는데, 결과물은 아직 소식이 없다고 한다. 어느 주민 이야기로는 버스가 다녀갔다고도 하고.... 

인터뷰는 이어진다. 


조사된 내용이 많지도 않지만, 어떤 내용은 신빙성이 조금 떨어져 보이기도 하는데요.


→  미화하려고만 하다 보면 역사는 왜곡될 수 있지요. 여기 남산 전체가 우리 중종땅인데 우리 큰할아버지가 일부를 팔아먹었어요. 일제 때 공동 묘지가 필요했던 모양인데, 그때 한쪽 팔고, 그 후에 어디 조금 더 팔고... 남산에 우뚝 서 있는 순국지사 손필규 할아버지는 동학이라 불리던 천도교 접주였어요. 우리 징조할아버지와는 사촌간이었고....손필규 씨는 여기 있기보다 서울 왔다갔다 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는데, 그때 징조할아버지가 22마지기를 팔아서 말하자면 헌금을 한 거지. 


어떤 분은 일제에 선산을 팔고, 어떤 분은 독립운동자금을 대주고 그런 모양새네요. 일제때 얘기는 더 없나요?


→  동네가 들어서자면 필수 조건이 뭐겠어? 물이야, 샘물. 샘을 파서 물이 나오는 데가 마을터지. 그 주변으로 집이 들어서고 동네가 되는 거야. 남산1구는 삼거리, 2구는 거음실, 우리 3구는 원남산이라고 불러요. 샘 3개가 70가구였던 우리 마을을 먹여 살린 거지. 일제때 이시다라고 일본놈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도 우물이 하나 있어 총 4개였구먼. 지금은 그 우물들 물이 다 끊겼어. 하우스 농사 짓느라 지하수를 뽑아쓰면서 고갈되기도 하고.... 새마을운동할 때 다 없앴는데, 지금 우물터로 새로 해놓은 것들은 시설만 해놓은 거여. 


지상의 강산만 바뀌는 게 아니라 지하 물줄기도 바뀌는 세상이네요? 80평생 생업으로는 어떤 일을 해오셨나요?


→  나는 딸기1세대에 속혀! 그러니까 50년도 넘었지, 그때는 딸기가 참 귀했어. (손 옹은 기억을 더듬어 내느라 한참 후 말을 잇는다.) 전국적으로 볼 때 딸기 선구지는 경상도 밀양과, 충청도에서는 웅천이었어. 그걸 논산에 바로 들여온 사람은 3명인데, 연산까지는 모르겠고... 이곳 채운은 용곳(지금 용화리) 박상규 씨여. 은진은 손창식 씨인데, 나의 당숙이고 지금 82세이지만 묘목 일도 하시고 식사 잘 하시고 여지껏 건강하셔. 다만 귀가 좀 어둡고...


이 말을 듣던 손흥섭씨가 거든다. “우리 어렸을 때 그 아저씨가 자전거에다 딸기를 싣고 채운역에서 대전으로 부치러 가던 거 생각나요. 논산 채소전에다가도 냈지요.” 


→  손창식 씨 하는 거 봐서 따라 했지. 처음에는 노지재배였는데, 한 두렁 정도 소형재배였어. 그러다가 대나무로 비닐하우스를 세우면서 다섯 골로 넓히고..... 하우스를 짓자니 인근 대나무는 동이 났고, 그래서 남쪽 진주도 가고 북쪽으로는 인천에도 가서 구해왔지. 인천항에 가면 대만산 대나무가 들어왔거든. 


손 이장도 질세라 거든다. “저는요 전남 영광에도 다녀왔어요. 이런 논산의 딸기 역사를 아는 사람들, 농업기술센터 딸기반에도 별로 없을 걸요?” 이 시점에서 기자의 긴급 제안이 또 이어진다. “제가 제한된 시간과 지면에 모든 이야기를 다 담을 수는 없어요. 이리 귀한 동네역사 이야기는 별도로 담아내보세요. 딸기 이야기는 통과~~!!”


→  그래, 다 얘기하자면 끝이 없어요, 끝이 없어. 전라도 이리 출신으로 한국은행총재까지 한 사람이 낸 책을 읽어봤는데, 지금은 다 전기다리미이지만 어렸을 때 우리가 쓰던 숯 다리미 있잖아? 그거 신라때부터 쭉 천여년 넘게 써오던 것인데, 그게 없어진 지 실은 얼마 안 됐어. 사위가 대우 다녔는데, 그 대기업이 없어질 때 차 한 대 뽑아준다고 운전면허증 따라는 거야. 나는 오토바이면 됐다고 거부했는데, 30년 타면서 지금까지 3번 바꾸었나 그래. 자식들이 사고 나면 큰일이라고 난리인데, 그래도 30년 무사고운전이야. 나도 이렇게 변화에 바로바로 적응하지 못한 채 살아 왔지만, 실은 우리 고정관념도 버려야 해. 우리가 시골에서 땅을 파 먹고 살아왔기에 “땅이 있어야 산다”는 생각이 뼛속까지 박혀 있지만, 이제는 아녀! 중국 커제를 봐. 중원의 고수 다섯명이 머리를 짜내서 알파고에게 대들었지만 나가떨어졌잖아. 변화는, 안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러고 보니 손 옹의 휴대전화는 2G가 아니다. 동고동락 할머니 중에도 스마트폰이 섞여 있다. 강연구 할머니 전화는 고장인데 자식들이 전화가 안된다고 난리란다. 구판장에는 영업허가서처럼 스마트폰 판매 승인서가 액자로 걸려 있다. 새로 등장하는 것과 함께 남산리는 없어진 것도 있다. 남산리가 자랑하는 삼무(三無)는 범죄, 부채, 담배이다.



손광석 옹의 집을 나와서 딸기의 대부격인 손창식 할아버지 집도 뒤로 한 채, 다시 남창재쪽으로 향했다. 벼 말리는 시설 건물에 써 있는 대자보 <심은 대로 거두리라> .... 성구라 보기에는 전혀 튀지 않는 분위기다. 오른쪽으로 시재를 지내는 남창재 건물이 새삼스럽게 보인다. “저 재실이 200년이 넘은 집이여. 중간에 한번 보수했다는데, 나 태어나기 전이지.” 구전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던 손광석 옹의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무심코 보았을 기와며 기둥들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말했던, 남대문 복원에 애정을 보였던 유홍준 교수가 새롭다. 아참, 그러고 보니 그 양반이 귀촌한 곳이 부여 어딘데....?.... 그 사람 눈에 한번 들어오면 온 국토가 박물관이라면서 애니메이션처럼 생기로워지는데, 남산리는 유독 더 그런 거 같다. 아니, 문화재로서라기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처럼 굳이 생기를 불어넣지 않아도 싱그러워서이다. 사람들이 거의 안 다니는 남산재 너머 농로길로 해서 논산시내쪽으로 가니 남산농원이 정겹다. 나무시장으로서는 그보다 기업형인 보라농장에,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숨겨진 신작로 흙길로 꺾어서 진입해 보니 쌘뽈 유치원과 양로원 뒤편이고, 길 옆에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요양원이다. 근방에 뽕나무 오디는 지천인데 손 탈 일 거의 없을 분위기다. 은진의 오지로 몇 꼽는 중에 본인 동네를 지목한 남산2구 이장의 말이 실감나는 갈림길에 도달하였다. 


[글·사진] 이지녕

이 글은 『놀뫼신문』 2017-05-31일자에 실린 기사입니다.

https://nmn.ff.or.kr/23/?idx=514408&b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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