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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Mar 10. 2019

 『은진 남산리 』
남산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 다같이 돌자 동네한바퀴 : 은진면 남산리(3-1)

인류의 역사는 여전히 중앙집권왕조사 위주로 쓰여지고 있다삶의 터전은 현재여기인데도 말이다우주의 중심은 우리 동네이고우리집내 일터이다이제부터 동네사람들과 함께 달려갈 놀뫼신문의 연재기획 동네한바퀴는 논산예찬이다. “동네 사람들 만나고마을 구석구석 돌아봄으로써 우리땅 논산을 오롯이 읊어내고자 한다. 은진면 남산리 동네이야기는 3회에 걸쳐서 연재한다.

장수상 거부한 백세할머니 


남산리는 장수마을이다. “옆 동네에는 초상소리가 가끔씩 들리는데 우리 마을은 당체 없어요!” 손희천 이장의 말이 이상스레 들린다. 1년 반쯤 전에는 마을주민 40여명이 KBS2 "노장불패"에도 출연한 바 있다. 논산에서 경로효친상 하면 남산리가 휩쓴다. 


이 동네에는 장수상을 거부한 백세 할머니가 사신다. 기자가 이 동네를 찾은 날, 백세할머니가 논을 살피러 집을 나섰다가 기자에게 딱 걸렸다. 가는 길 막은 다음 다짜고짜 청하였다. “할머니, 과자 하나 먹고 가세요!”


마을회관 옆은 동네구판장이다. “난 음료수보다 소주 마시고 싶은데...” 건강하다는 귀띔은 있었지만,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소주 한 병에 안주로 고추멸치볶음, 오이김치 한 사라씩이다. 가격을 물으니 2500냥. 어찌 됐든 간에 할머니, 연신 고마워라 하면서 입이 귀에 걸리고 희색 만연이다. “늙지마, 늙으면 아프고 고생여!” 올해 94세인데 호적이 이상하게 되어서 100세가 넘어 있는 상황이다. “내 친정이 가야곡인데, 올케는 나보다 나이 더 먹었지만 아직도 펄펄혀~ 논이 어디 붙어 있는지, 밭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라. 고생 하나 없이 살아서 그런지 아픈 데도 하나 없다고 혀!” 


그러나 본인은 고생 자체였다고 토로한다. “시집에서 한 푼 없이 나와가지고, 남의 집 헛간에 들어가 사는데말여..... 비가 오면 물이 줄줄 샜어....” 남편과 함께 리어카 끌고 과일도매상을 했단다. 부창부수의 전형이다. “여기서 강경장 가는데 신작로가 돌짝밭이여. 지금은 비단길이지, 비단길!” 중국에만 있는 줄 알았던 실크로드가 강경길이다. 젊었을 때 고생이 징그러웠지만 그래도 그때가 좋았단다. 돈 버는 재미에 피곤도 몰랐고, 그 돈으로 논밭떼기 장만하면서 농사도 짓게 되었다. “니 엄마랑 논일하다가 흥이 겨우면 춤추고 노래했지.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 아들 장가보낼 때하고!” 술잔을 기울여 주는 친구의 자식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던 남편이 44년 전, 훌쩍 떠났다. 너무 오래 되어서 이제는 신혼 적 일 하나도 생각 안 나지만, 어쨌든 아들은 둘 두었다. 그런데, 첫째도 아버지를 따라 떠났다. 둘째며느리는, 3년쯤 전 외국인 노동자 한 명을 사랑채로 들여 생활하게 해주더니만, 며느리가 해야 할 일들을 그 외국인 여자에게 몽땅 인계해주다시피한 다음 시아버지 봉양하러 먼 길을 떠났다. “어쩌다 보니 내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어. 이런 내가 뭐 잘났다고 장수상 같은 거 받겠어?” 


어느덧 7순에 접어든 친구 아들은, 버스 기사 출신이라서 별칭 동네운전사이다. 엄마 앞에서 재롱 떨 듯 “새댁”이라고 호칭하면서 까부는 아이다. “오늘 13년 만에 처음 눈뚝에다가 풀약 하라고 했어요.” 매년 논뚝에 풀이 한 키이니 입 달린 사람마다 한 마디씩 해왔던 모양이다. “하두 말 듣기 싫어서 이번에 하기는 하는데, 그게 풀만 죽이는 게 아니라 흙도 푸석하게 시마리 없게 만들어요.” 시내버스를 하면서 4남매 키워낸 동네운전사가 망성면 5마지기 논 농사도 짓던 시절, 면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단다. “벼반 피반인데, 높은 사람들 나와본다고 하니까 방위들 시켜서 피 뽑도록 허락”해달라고....즉석 “노우” 한 다음, 아줌마들 사서 해결했노라는 이야기를 듣자, 백세할머니 또 말참견이다. “그래, 방위한테 맡기면 농사 뵈려!” 아직도 현역이고자 하는 백세할머니!  몸도 아프다면서 딸기농사며 벼농사 죄 참견하고 거든다. “내가 논에 나가서 모를 멍하니 쳐다보고 오면 아들이 뭐라고 혀! 그치만 난 매일 나가보고 싶거든!” ‘벼는 농부 발소리를 듣고 큰다’는 속담은 ‘백세농군 눈길 닿아야 큰다’로 바뀌어얄 판이다. 


구판장의 옛주인과 새주인의 만남


백세할머니와 정담을 나누는 곳은 마을회관 바로 옆 구판장이다. 시골동네에 없어진 것 중의 하나가 점빵이다. 구판장, 구멍가게, 수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고 수많은 사연과 추억이 서린 곳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물건 사러 오는 사람이 없으니 이름만 존재하는 곳 태반이다. 


13년 전 이곳 남산리도 그랬다. 그 전 동네운전사 아저씨가 운영할 때만 해도 괜찮았다. 70여호가 있었고, 대부분 생필품을 동네에서 구입했다. 거리가 제법 되는 곳에는 동네보다 조금 싸게 파는 경쟁업체가 있었는데, 농협직판장이다. 동네에 거동이 불편한 아주머니가 하나 있었다. 차 쓸 때는 물론 집안에 뭐가 고장 나면 구판장에 와서 고쳐달라 부탁이다. 그런데 라면 살 때가 되면 안면몰숟. 그 불편한 몸 종종 걸음으로 한나절 거리나 되는 농협으로 가고는 하더란다. 요즘 시골은 트럭가게가 은인이다. 그 트럭이 동네 들어와서 스피커를 틀어대면 점빵 주인인 동네운전사는 냅따 뛰어나가서 쫓아내곤 했단다. 그래도 그때가 돈도 됐고, 재미도 있었다고 껄~껄~이다. 



주인 몇 번 바뀌던 구판장이 마침내 문을 닫게 되었다. 2년여 폐가가 되다시피한 이곳을 어느 아낙이 찾아왔다. 고쳐서 문을 다시 열겠다면서... 옥천댁인 그녀는 20년 식당 경력자였다. 혼자서 해물탕도 하고 순대도 했던 그녀는 병을 얻어 큰 수술을 받았고, 갈데도 마땅찮던 차에 남산리와 연이 닿은 것이다. 마음을 몽땅 내려놓아서인지 결국은 완치가 되어서..... 이제는 맥주 한 병쯤은 거뜬하단다. 


맥주 소주 말고 가게빵에는 물건이 별로 없다. 이 동네는 담배 피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 담배도 최소한만 구비되어 있다. 이웃마을 이장이 담배 사러 와서 찾는 종류가 없으니까, 그러면 아무꺼라도 달라고 한다. 인근에 수퍼가 없어졌으니, 걔 중에 독야청청 문 열고 있는 남산리 구판장이 성업중이다. 동네 사람들이 들어오면 대개는 소주 한 병 시킨다. 기본 안주는 무료다 보니, 다 마시고 나갈 때는 2500원 많아야 두병값 5천원 계산한다. 


이웃동네에서 오는 사람들은 안주까지 시키는 편이다. 푸짐한 계란찜은 5천원, 김치두부는 7천냥이다. 비오는 날이나 새참때는 국수가 3천원, 라면은 2500원! 예전 음식점 하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들이다. 시조시인이기도 한 옥천댁이 국악으로 봉사활동 나갈 때나 딴 일로 구판장을 비우면, 동네오빠가 대신 자리를 지켜준다. 원래 물건 진열대였던 한쪽 벽면이 훵해지자 주인장 옥천댁은 커다란 민화 하나를 내걸었다. 얼핏 이발소 그림 분위기로 느껴지만 격조가 있어 보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옥천댁 아버지는 목수로서 서울 남대문일도 하고, 탱화도 손댔고, 지관일도 보고... 그러던 분이 마지막에는 딸과 함께 구판장에서 3년을 지내다가 임종하였다고 한다. “그 예술 피가 딸에게 그대로 흘러왔나벼~?” 칭찬을 입에 달고 사는 손흥섭 씨 부인, 부녀회 총무의 명확한 발음이 기자의 귀에는 아스라하다. 어느 시절 예인 한 분이 한동안 이 동네에 머물렀고, 사람들은 그런 예술혼을 감지조차 못한 채 그대로 떠나보냈다는 역사적 현재가 오버랩되면서이다. 


기자가 찾은 날 구판장 매출은 오르는 거 같았지만, 결국은 꽝!!  커피 한잔 얼마냐니까 커피에 무슨 돈이냐면서, 동네 한바퀴 돌고 온 다음에 꼭 들르랜다. 다시 돌아올 때 어쩌다 보니 4명이 몰쳐서 들어갔다. 국수를 마는 동안 서너 사람 더 들어오니 오늘 열무김치 비빔국수는 완판이다. 쉬는 날이라서 놀러왔다는 여동생은, 하지감자 시절에 때아닌 상월고구마를 쪄서 후식으로 내놓는다. 국수값 하나도 못 받은 옥천댁은, 오늘따라 엄청 잼나다며 신바람이다. 미모의 여동생은 커피까지 서비스하더니 이윽고 작별인사이다. 못내 서운한 동네운전사 아저씨가 감언이설을 하고, 기자는 동네할머니에게서 뇌물로 받은 사탕 아낌 없이 꺼내어 사탕발림해봤지만, 얼굴값 하려는지 씨알머리도 안 먹히고^^^ 동네 이장은 오후 내내 마나님에게만 일 맡겨두고 온 게 껄쩍지근한지 그 핑계로 자리 떴고.... 논산읍내로 큰 교회 댕겨온 손 씨 부부도 더 나올 게 없다고 느껴져서인지 자리를 떴고....


파장 분위기인가 싶었더니 몇 명이 구판장으로 우르로 몰려온다. 옆동네에서 고구마 캐달라고 해서 일 나간 적이 있는데, 여지껏 그 일당들 안 줘서 함께 받으러 가기 위해서란다. 맘씨 고운 남산리 사람들, 그간 포기 상태였는데, 동네 오빠 ‘딴 동네 사람들은 다 주었대더라’는 풍문 듣고서는 열이 뻗쳐 소집령 발동한 것이다. 빚쟁이집 운전은, 이 체임과는 엄연히 제3자인 동네운전수 아저씨 모가치다. 시내 버스 출신인 이 아저씨는 걸핏하면 동네 이곳저곳 운전병으로 차출되곤 해왔다다. 어쩌다 일이 있어 “오늘은 안 되겠는데요!”라고 하면 욕 바가지란다. “누구는 잘 태워주면서 말이야....” 그 욕 다 먹고, 두 딸로부터 “아버지 나 대학 보낼 돈 없지유?” 소리 다 들은 동네운전사는 희희락락이다. 그 좋은 머리로 척척 취직해 나간 두 딸 덕에 나머지 둘은 하겠다는 공부 다 해주었었다고 뻐길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그 동안 술을 14개월 동안 끊었는데, 70 나이에 논 일도 고되고 하여 다시 입을 댔단다. 


변신 여의치 않은 농촌살이 


농촌에서는 외국인 노동자가 월급제인 경우가 많다. 여기도 외국인 여자가 우리나라 농부와 재결합한 경우도 있단다. ‘농사 죽어라고 지어봐야 인건비 나올까 말까인데, 그 인건비 다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거 같다’는 자탄과 각성의 소리가 높다. 논산딸기도 이제는 전국화되어 소득이 예전 같지가 않다. 논산농고 축산과를 나온 손씨는 서울에서 금세공을 하다가 20여 년 전인 IMF때 정리하고 귀농한 경우이다. 7년쯤은 진라면 대리점 하다가 전업농으로 전환, 이제는 딸기 두 동과 논농사 30여 마지기를 짓는다. 한우 20여 마리 키우고자 시도했지만 규제가 심해서 포기하고 말았다. 농촌의 환경은 강화되었지만 기득권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옆동네에 돼지농장 냄새가 여전하지만, 20여 년 전에 시작한 농가라 뭐라고 말을 못한다. 


농촌의 고질적 문제 중의 하나가 비닐하우스의 폐비닐! 이걸 걷어다가 재생하는 업체가 20여 년 전 남산리에 들어왔다. 미관은 차치하고서라도, 냄새와 먼지로 인해 빨래조차 널기 어려운 상황이다. 원래는 논이었던 이 땅을 팔았던 강연구 할머니가 산 밑에서 호젓하게 살다가 어느날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이곳 바로 옆으로 이사 와 살게 되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하여 견디기가 힘들어 이장에게 얘기하고, 동네 회의때 얘기도 해보고, 자녀들이 민원도 넣어봤지만 미안하다는 정도의 말뿐, 별무신통이다. 


이제는 상주하는 직원도 없고 초창기에 있던 십여 명의 직원이 각자 독립하여 열쇠를 따고 들어와 짐을 부린 후 떠나는 시스템이다 보니, 멱살 잡을 사람마저 보기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5일제라서 빨래는 주말을 이용한다. 어머니 혼자 계신다고 해서 막내가 며느리 내려보내 보살피도록 하고 있단다. 뜨개질이 주특기인 며느리는 시내에 가게를 하나 내어 일하는데, 입출 꼭 고하면서 시어머니 봉양중이란다. 이런 며느리가 어머니는 물론 동네에도 기여할 일이 생겼다, 재능기부의 기회가...



기부하는 마음이 세운 마을회관 이야기


마을회관이 지어지면서 그 안에는 프로그램이 돌아간다. 한글교실, 체조교실, 컴퓨터교실... 이런 프로그램 속에 뜨개질도 하나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2014년, 남산리는 손희천 이장을 중심으로 마을회관 신축을 위한 추진위원회가 구성된다. 1억 4천이 들어가는데 시지원금 9천만원뿐이다. 나머지를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손 이장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대지구입비가 제일 큰 문제였다. 옛적에 말로는 마을회관 지으라고 한 것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법적 효력이 상실되고 말아서 부지부터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추진위의 결론은 “해보는 데까지 해보고, 정 안되는 건 융자를 받아서 하자.” 결과적으로 4,680만원이 모금되었고, 빚 없이 그해 11월 감격의 준공식을 할 수 있었다. 


농사일 마치고 돌아와 저녁을 먹은 다음 손 이장을 기다리는 것은 전화통였다. 외지에 나가 사는 출향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얘기가 길어지다 보니 하루 영업은 겨우 한두 통! 줄기차게 전화를 건 결과 출향인이 보내준 액수가 40%에 달했다. 대출 없이도 목표지점에 안착한 것이다. 이런 집념과 주민단합, 애향심 등은 쉬운 사례가 아니어서인지 남산리에 대한 평가는 천정부지인 감이다. 경로효친상으로 3천을 받아 마을회관 뒤쪽을 확장하는 공사를 했다. 적정 공간이 덤으로 확보되자, 작년에는 콩나물 기르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2016년은 “동고동락”이 명실상부한 공동체로 출범하기 위해 독거노인들이 실제로 동거하는 모델 사례로서 남산리와 시묘리가 시범 운영되었다. 그 결과 높은 점수는 2500만원의 시상금으로 환금되었다. 농업기술지원센터 시범사업 지원금도 2천만원이나 나왔다. 지원금 용처는 4가지이다. 회관앞 미끄럼방지시설, 꽃밭조성, 콩나물키우기 자동시설(모터 등) 그리고 농한기때 뜨개질사업이다. 


현재 회관에서 숙식까지 하는 주민은 4명이다. 작년은 동고동락 시범마을로서, 각자 집에서 혼자 식사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저녁만큼은 함께 하도록 하였다. 매일 저녁 15~20명에 달하는 식사는 부녀회원 2명의 소관이었다. 부녀회원이라면 일주일에 한번꼴로 며느리가 되어서 회관 어르신들 저녁 식사를 대접해왔던 것이다. 올해 들어서는 저녁때 회관에서 밥을 먹는 숫자도 줄고 하여 회관에서의 식사 등등은 자체로 해결되어 간 모양새이다. 농번기가 지나고 상황이 달라지면 그건 그때 가서 상의가 될 거 같고.... 



우리 동네, 콩나물 장사도 해요


이런 흐름 속에서 콩나물은 동거동락하는 분들의 소일거리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시장에서 콩을 사다가 했는데, 이런..?..... 1할 정도만 싹이 터서 낭패를 보았다. 그 후 동네 콩을 사다가 해보니, 남산리에서도 비정상화의 정상화가 회복되었다. 길러진 콩나물은 자체 소비되고, 부녀회원들이 사갖고도 가서 자가 소비가 되었다. 재고 걱정이 없는 이 콩나물 사업은 경제적인 수익과 노년의 생명교육이 동시에 충족되는, 두 마리 토끼이다. 


11월부터 시작 예정인 뜨개질도 엇비슷하다. 올해로 90세인 강연구 씨는 4남매를 두었는데, 현재 막내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다. 아들은 집수리 등등의 기술이 다양한 맥가이버인데, 조만간 귀향쪽으로 정리가 될 듯하다고 한다. 최근 남산리 교회 내부 손보는 일을 일주일여 하다가 서울일 전화를 받고 올라가 있는 상태라고 한다. 막내 자부는 뜨개질 실력이 프로급이어서 현재 시내에 가게를 내고 영업중이다. 이제 때가 되면 동네 할머니들과 모여서 뜨개질을 하게 된다는 계획이다. 뜨개질 배우면서 만드는 것들은 동네 필요한 분이나 양로원 선물로 가져다 줄 모양이다. 한데 모여서 한땀한땀 떠나갈 때 수익성보다는 포근한 대화가 온 동네를 따습게 감싸줄 거 같다. 


꽃밭 조성에 대하여는 동네 주민들 자부심이 대단하다. 지저분하고 스산했던 길이 깔끔하고 이쁘게 변신하여 있기 때문이다. 공동꽃밭 작업을 위해 마이크를 켜고 “주민 여러분! ...” 손 이장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서 들려오면 대부분 나와서 동참한다. 호구 조사를 해보니, 이 동네 농가수는 45호이고 인구는 120여명이다. 한때 손씨가 8할을 점하는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절반 정도이고, 임씨가 그 다음이란다. ‘집성촌’은 ‘비교적 말 잘 듣는 동네’와 친족어이다. 시대는 바뀌고 이제는 외지에서 이사온 주민도 꽤 된다. 이사온 사람들 마당에는 꽃밭도 있고, 곁눈질만 해도 표가 날 정도이다. 


동네로 진입하는 고샅길 탱자나무 울타리가 듬직하다. 남산리 자연부락 마을 이름 중 감나무뜸이 있다. 삼거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권력있는 사람이 감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태평성대를 누린 마을이라 해서 “팔자 좋은 사람은 감나무뜸에 가서 찾으라”는 말과 함께 온 나라에 알려졌던 마을이다. 최근에도 조 참판이 크게 세도를 부리며 살아왔다고 전해오는 동네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탱자나무 울타리는 수난이다. 즐비한 행렬 중 몇 주가 희끗거린다. A장기할아버지에게 연유를 물으니, 오가는 승용차가 긁히므로 가시나무벽도 바짝 면도를 쳐준단다. 그런 와중에 탱자나무 몇 주는 풀약 세례를 받은 듯싶다. 


가시나무 끝자락이 B장기할아버지 집이다. 가뭄으로 밭에다 물 주고 있는 B할아버지의 손목을 잡아끈다. 마침 할아버지 집을 찾은 손녀가 물 호스를 인계받는다. 5살 더 적은 A장기할아버지는, “회관 할머니들에게 말 들으면 안 되니까 옷, 양말 모두 갈아입어야 해요”라면서 성화다. 그 사이 기자는 꽃매니아인 B장기할아버지의 할머니를 꼬셨다. “할머니, 읍내 장 갔다 올 때 보통 얼마짜리 화분 사와요?”  대개는 3천원, 희귀한 것은 만원까지도 쓴단다. 가르쳐 주는 이름 “달랴” 그 발음조차 정겹다. 꽃보다 예쁘게 사진을 찍어준다고 하여도, 쑥스럽기만 한 여심이다. 


올봄 동네 꽃밭에는 주로 뭘 심었는지 물으니 영산홍, 해바라기 등이라고 한다. 꽃밭가꾸기는 시청에서 동고동락 잘했다고 나온 지원금에도 포함되어 있다. 꽃밭도 A꽃밭, B꽃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대답을 듣고나서 기자는 동네사람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긴급 제안을 했다.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추억의 꽃, 가령 목화나 꽈리 같은 종은  어떤지요? 해바라기도 좋지만 조 수수 같은 꺽다리는요? 꽃밭과 함께 계획중인 벽화도 그래요.... 건너 동네 야화리의 해바라기 솟대 마을은 솟대가 참 정겹더라구요. 그런데 벽화는 좀 그래요.  해바라기 일색이던데, 남산리에서는 다른 데서 보기 힘든 내용의 그림으로 꾸며져야 좋을 거 같아요. 가령 여기가 논산 딸기 원조이니까 손창식 할아버지 사진도 좋겠고요...” 시나 면에서 해주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던 이장님, 곧 마을 회의라도 열 태세이다. 



다목적홀 마을회관에서 치매친구와 동거/동락


“모이는 게 나부터 쉽지 않잖아요. 농번기를 피해야 하구요.. 그래도 우리 동네는 잘 모이는 편예요.” 손이장의 말을 듣고나서, 회관살림을 도맡다시피하는 강정자 할머니의 설명까지 듣고서 보니 회관은 마치도 공부방 같다. 일주일에 한글교실 3번, 체조교실 2번, 이제 농한기가 되면 컴퓨터 강사가 온단다.  


65세인 손홍섭 씨가 동안이어서 건강관리 비결을 물으니, 작년에 충대에서 어떤 팀이 나와 2주간 건강 관리를 중점적으로 해 준 덕이라고 한다. 남자들은 회관에 잘 안 나오는 편이지만, A장기할아버지와 B장기할아버지만큼은 호적수라서, 장기판 앞에 앉기만 하면 용호상박이다. 장기판이 편안한 탁자 위에 놓여 있다. 앉아서 장기 두는 게 건강에 안 좋다고 느껴서인지, 면장님께서 하사해준 테이블이란다. 장기판이 불붙자 고스톱으로 맞불 놓는 할머니들, 그러나 오래 가지 않는다. “왜요~ 더들 하시잖고요~?” 오래 치면 허리 아프고 해서 알맞게 친단다. 10원짜짜리 돈통에도 이름 태그가 붙어들 있다. 외부 반출이 안 되고, 돈 통 떨어지게 되면 많이 딴 사람이 채워주는 모양이다. 인간성 보려면 고스톱 한번 쳐보라고 하는데, 남산리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기자가 노랑봉다리 커피를 찾자, 강정자 할머니는 “여기는 없다.”며 집이 코앞이라며 문 열고 나가 챙겨갖고 오신다. 동고동락 공동체가 몸에 밴 듯싶다. 남산리 마을회관은 현재 논산시정의 핵심 철학이자 실천 과제인 동고동락(同苦同樂) 제1호가 되었다. 아니, 동거(同居) 동락이다. 


남산리 40여호 할머니들이 다 모여 식사하면 20여명 정도이지만 요즘 같은 농번기에는 식사하는 사람들이 바짝 줄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지만, 4인은 취침까지 한다. 곧을 정(貞)자라서 랑군에게 구박을 받았다는 강정자 할머니는, 동고동락 입소 기준에서 벗어난 ‘한시간 할머니’와 동고한다. 왜 한 시간이냐고 물으니, 직접 대화를 해보라고 한다. “할머니, 이렇게 총각이 놀러오니까 좋아요?” “총각 좋아하네~? 이렇게 잘 생긴 남자를 누가 총각으로 놔뒀겠어?” 농을 섞든 진지모드이든 척척 받아넘긴다. “할머니 심심하면 전화해서 건너오라고 해요!” “그런 말 하려면 전화번호까지 알려줘야지!” 번호 적어서 건네주니, 이름까지 보완하란다. 


그런데 이렇게 깔깔 대면서도 한 시간만 지나면 기억이 몽땅 사라지는 현상! 의사도, 집안 자녀도 ‘입원시킬 수까지는 없다.’는 데에 동의! 완전 정상 같지만 밥 먹은 사실을 잊어버린 채 또 먹어 과식..... 치매약 챙겨먹는 일은 나몰라라라 하고... 이런 문제는 동네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해결이 되어가고 있는 것다. 


나머지 두 명은 아직도 현역이다. 요즘은 일당이 올라서 이틀 일하면 쌀이 한가마란다. 일 나오라는 데만 생기면 자고 일어나자 마자 논밭으로 향한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손주 용돈이며 약값 같은 노후 생활비로 충당한다. 할머니 군단은 여전 강군하지만, 하루 종일 뙤약볓에 약값이 더 나갈지 걱정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한때 8할 정도로 손씨 집성촌였던 이 곳에도 외지인이 들어와 현재는 반반 정도란다. 남산리에서 손씨 시재를 지내는 곳은 남창재(南昌齋)이다. 이 재실 남창재는, 빈 집이 아니라 후손이 직접 들어와 사는 생가(生家)이다. 그런데 남자후손이 아니라 여자후손이다. 사랑채에 또 한 후손이 들어오려고 하는 모양이다. 대전에서 정년퇴직을 한 분인데 예전에 딸기 농사를 지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귀농귀촌은 꼭 서울만을 전제로 하지 않는 듯싶다. 



남산리는, 은진면 탑정로가 끝나가는 채운면과의 경계이다. 말이 은진면이지, 동네사람들은 채운국민학교를 나왔고 식당도 채운면사무소쪽을 이용한다. 은진면은 논산시의 알박이 같다. 부적, 가야곡, 연무, 채운, 논산에 둘러싸여 있는 다운타운의 전형이다. 개발권에 노출되어 있는 지역이지만, 여전히 고풍스런 향교가 버티고 있고 소나무가 울울창창한 묘역들이다. 


순국지사 손필규 묘가 있는 남산리는 1000여 소나무가 손씨 선산을 엄호하고 있다. 애국가에 있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여러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서울 남산이 아니다. 남산은, 예전에 남(南) 씨들이 모여 살았다 하여 생겨난 이름이라는데 지금은 남씨가 아닌, 손씨 집성촌이다.


여하튼, 남산은 따뜻한 남쪽이라 놀기 참 좋다. 인근 채운/ 이화 초등학교 소풍 갈 곳으로는 최적지였다. 고학년은 걸어서 은진미륵까지 가기도 했단다. 논산 기준으로 볼 때 대개는 연무대나 강경으로 빠지면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접어들 일 없는 탑정로 남산리는 숨겨진 동네 같다. 남산에서 연무대쪽으로 내려다 보면 전형적인 삼태기 지형이다. 산 밑에 집들이 몰려 있고, 좀더 나가면 논이 펼쳐진다. 그 논밭은 방축리로 넘어가는 고개까지이며, 왼쪽으로는 채운면 용화리이다. 남산리는 특산물도 별로 없다. 논산에서 누구나 하는 쌀과 딸기 정도이다. 장삼이사, 주민들도 평범하다. 평범하다 못해 온순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이장이 뭐 하자 하면 대부분 따른다.(....to be continued)



[글·사진] 이지녕

이 글은 『놀뫼신문』 2017-05-31일자에 실린 기사입니다.

https://nmn.ff.or.kr/23/?idx=514407&b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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