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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Mar 10. 2019

은진면 남산리
손필규(孫弼奎) 순국지사 이야기

- 다같이 돌자 동네한바퀴 : 은진면 남산리(3-3)


손필규의 호는 반암(盤菴)이며, 1870년 7월 20일 논산군 은진면 남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손필규는 어려서부터 한문에 능통하였고, 성년에 이르러 국운이 기울어져 왜놈이 침략의 마수를 뻗치자 국운을 회복하고 백성을 구제하기로 결심하였다.


1904년 손병희, 권병덕, 권동진, 오세창 등과 제휴하여 각처를 다니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했다.  1912년에는 서울의 봉황각(鳳凰閣)에서 49일 동안 국운이 회복되기를 기도 드렸고, 1918년 손병희 산하에서 교령(敎領)의 책임을 맡아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그 후 손필규는 천도교(天道敎) 은진 교구장(恩津 敎區長)이 된 데 이어 지방순회 위원 겸 논산군 교구장이 되어 논산, 대전, 공주, 부여, 임천, 청양, 고산, 진산, 금산, 진안, 용안, 함열, 이리, 옥구, 군산 등지에 관내교인들을 밀파(密派)하여 독립 운동을 고취시켰다.



 1919년 3월 11일 논산읍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손필규는 김태오와 함께 논산읍내에 거주하던 천도교 교인 민영순(閔泳淳)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고 3월 12일 논산읍내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김태오(金泰午 ; 다른이름 김태호 金泰昊), 이백순 (李伯純), 이근옥(李根玉) 등과 함께 미리 태극기를 그려 두었다.

 3월 12일 오후 3시반경, 손필규는 동지들과 같이 논산읍민과 학생 1백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논산읍민들이 가세하여 시위 군중은 1천여명에 이르렀다. 평화적인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일제는 무역으로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서 만세시위 대열은 미친 듯이 날뛰는 왜병의 총칼날에 무참하게 짓밟히게 되었다. 이때 염상오(廉象五)는 일헌병의 발포로 순사(殉死)하였다.


이날 밤 손필규는 김태오, 이백순 등과 함께 태극기를 돌리며 독립만세 시위를 계속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날밤 일경은 시위운동 주동자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손필규는 이때 체포되어 공주 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받고 공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면서도 밖에 있는 동지들과 내통하면서 독립운동에 협조하였다. 왜헌병이 마음을 돌리면 관직을 주겠다고 달랬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옥고를 치루고 나온 손필규는 1938년 천도교인으로서 교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의 지령으로 실시된 세칭 “무인년 기도사건(戊寅年 祈禱事件)”으로 또다시 체포되었다.


 무인년 기도사건은 천도교 교주 춘암이 전국 각처의 두목들에게 “무궁한 내 조화(造化)로 개같은 왜적놈을 일야간(一夜間)에 멸하고서 전지 무궁하여 놓고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汗)의 원수까지 갚겠습니다.”라고 조석식고(朝夕食告)에 지성껏 기도하자는 멸왜기도 (滅倭祈禱)의 밀령을 내렸다. 우리나라 주권 획득운동이 극비리에 진행되는 도중에 신천(信川) 경찰서에 제보되어 황해도 연원대표 홍순의(洪順義)와 관내 교인을 검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국 각지에서 다수 교인들이 투옥되었다. 이 사건으로 손필규는 일경에 검거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 왜경에게 취조를 받게 되었다. 


남창재 내부


그러나 손필규는 의연한 태도로 “강탈당한 내 나라의 주권을 찾으려는 일이 무슨 죄란 말인가!” 하면서 “춘암상사(春菴上師)는 나의 스승인데 내가 스승님께 누가 미치는 언동을 할 수 있겠는가! 설사 춘암상사의 지시로 내가 왜멸(倭滅)기도를 하였다 하더라도 내가 어찌 선생님의 지시로 이 일을 했다고 할 것인가?” 하고 항변하면서 시종일관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으니 왜경의 고문과 약형이 사정없이 가해져서 69세 노구(老軀)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석방되어 큰아들 손우진(孫愚鎭)이 등에 업고 집으로 왔을 때는 혹독한 고문으로 몸은 부어올라 옷을 벗기지 못하고 가위로 짤라내어야만 했다. 결국 손필규는 고문당한 여독으로 별세하였고 유족으로는 손자 손제원 씨가 은진면 남산리 579번지에 살고 있다.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글·사진] 이지녕

이 글은 『놀뫼신문』 2017-05-31일자에 실린 기사입니다.

위의 순국지사(殉國志士) 손필규(孫弼奎) 이야기는 1938.5.1.일자 부산일보, 독립운동사(3권, 8권), 독립유공자공훈록(2~3권), 대한충의효열록, 천도교정신사(천도교의 운동약사) 등의 기록들을 종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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