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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Apr 14. 2019

논산사람 서재필 다시 만나는 날

- 논산은 왜 서재필을 못 알아보는가?

[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9~10)]


논산사람 서재필 다시 만나는 날


4월 7일은 신문의날, 보건의날이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 『독립신문』 창간 61주년을 기하여 언론인들이 제정한 날이다. 4월 10일, 독립운동가 송재 서재필 박사 기념식이 열린 날이다. 연무체육공원 실내체육관서 열린 이 기념식은 올해로 15회째이다. 송재 서재필박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논산시와 연무읍, 논산문화원이 후원하였다. 연무읍번영회(회장 안일순)가 주관단체로 나서는 것은, 서재필 박사의 고향이기 연무읍이기 때문이다. 금곡리 256, 당시의 행정구역명은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였다.


이날 행사에 유족과 시민, 각급기관단체장 등 200여 명이 참석하여 체육관을 채웠다. 식전행사는 특강이다. 특히 올해는 3·1운동100주년을 맞아 ‘3·1운동과 서재필의 독립운동’이란 주제의 특강이 펼쳐졌다. 강사로는 문학박사인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장이 나섰다. 1부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서재필 박사의 생애와 업적 소개는 논산시낭송인회 이필붕 회장이 맡았다. 윤숙희 회원 기념시 낭송, 유공회원 공로패 전달에 이어 단체장 기념사, 이어서 유족대표 인사말로 마쳤다. 묘소참배는 2부 순서이다. 선생은 1951년 87세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서재필 선생이 유아시절을 보낸 연무읍 금곡리 256


구한말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는 김옥균·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독립신문』발간과 독립협회 결성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민족의 선각자였다. ‘송재 서재필박사 기념식’은 지난 2004년 3월 25일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화석개발위원회에서 서광효(서재필부), 성주이씨(서재필모), 송재서재필, 부인광산김씨를 추모하기 위한 사단 설립을 결의한 데서 시작됐다.


논산에는 서재필박사기념사업회 외에도 선생에 대하여 유별난 애정을 표출하는 개인도 눈에 띈다. 우선 서재필전도사로 불리는 윤석일 강경역사문화연구원장. 강경 제일감리교회 담임 시절, 강경역사문화관에 서재필박사코너도 마련할 정도다. 1~2층에 분야별로 정돈되어 있는 근현대사 전시관은 천안의 독립기념관 별관 못지않다. 윤원장은 “서재필 선생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미국시민권 1호, 미국의사 1호, 미국공무원 1호, 국제결혼 1호, 심지어 처음으로 골프친 사람”이었다고 소개한다. 고종이 주장하던 절대군주제와 등을 지고 반대편에 서서 민주국가 건설을 주창한 선구자였음을 강조한다. 한편, 은진면 토양리에 사는 장세근 씨는 서재필 박사 소개 논문을 쓸 정도로 서재필 매니아이다.


서재필전도사로 불리는 윤석일 강경역사문화연구원장


연무대 선샤인랜드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미스터션샤인(미·션)”의 시대적 배경은 구한말이다. 서재필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김은숙 작가가 이름없는 의병들을 끌어낸 점은 한국사에서 위대한 작업이다. 그 무명의병들에 비하여 서재필은 지나치게 드러난 개인이다. 미·션에서 이병헌으로 분한 유진초이와 교집합도 있어 보이지만, 둘의 시대극 배역은 상당히 달라 보인다. 클라이맥스만 보더라도 이병헌은 사랑을 위해 죽었고, 서재필은 해방후 귀국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 되었으니 말이다.


혁명가, 정치가, 의사, 교육자, 군사학전문가, 독립운동가, 사업가, 시인, 문필가, 언론인, 박사위의 박사.... 이리도 유명한 서재필이지만, 후세들은 그 이름 석자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한때 3천 명 모였던 연무대 서재필 기념사업회 열기를 봐도 온도차가 느껴진다. 서재필 기념관으로 논산시에 내놓은 땅 3천평은 바람만 오가고 있다. 100여 년 그 전, 그 후 풍전등화 조선 앞에서 개척자, 선구자로서 형극의 길만 골라서 걸어갔던 고독한 영웅 서재필! 이제 그 좁은길을 평범한 시민 하나가 밝혀주는 손전등에 의지하여서 걸어가 본다. 2부 행진곡 중, 오늘은 1부이다.


민족의 성자 송재(松齋) 서재필(기고 : 장근세)

https://nmn.ff.or.kr/17/?idx=1770876&bmode=view





[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10)]


논산은 왜 서재필을 푸대접하는가?


“혁명가, 정치가, 의사, 교육자, 군사학전문가, 독립운동가, 사업가, 시인, 문필가, 언론인, 박사위의 박사.... 이리도 유명한 서재필이지만, 후세들은 그 이름 석자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한때 3천 명 모였던 연무대 서재필 기념사업회 열기를 봐도 온도차가 느껴진다. 서재필 기념관 짓는다고 해서 논산시에 내놓은 땅 3천평은 오늘도 바람만 오간다....”


이상은, 지난 호 기자가 [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9)] “논산사람 서재필 다시 만나는 날”의 기사 끝부분이다. ‘제15회 애국지사 송재 서재필 박사 기념식’은 지난 10일 연무체육공원 실내체육관에서 열렸다. 서재필 박사 증종손녀인 서동숙 유족과 기관단체장, 시민, 학생 등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종로에서 만민공동의회 개최.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민주주의 주장.

문학박사인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장이 ‘3·1운동과 서재필의 독립운동’이란 주제로 특강을 하였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이기도 한 홍선표(洪善杓) 박사의 논문 저서는 3·1운동1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권장도서 노미네이터 1위이다. "서재필 개화 독립 민주의 삶"을 필두로  "3·1운동 직후 무장투쟁과 외교운동",  「윤봉길의거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반응」 등이 그러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연구교수이기도 한 홍 박사의 저서와 논문은 대한민국 독립에 대한 미국의 역할이 돋보인다.  "재미한인 독립운동의 표상 김호",   "재미한인의 꿈과 도전",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미국인」,  「관동대지진 때 한인 학살에 대한 구미 한인세력의 대응」,  「1930년대 재미한인사회의 진보적 변화와 대응」,  「헐버트(Homer B. Hulbert)의 재미 한국독립운동」, 「1900∼1930년대 하와이 한인사회의 선전·외교활동」,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와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등등이 그것이다.


논산사람들 뭐하시나요?”


이리 상세하게 열거하는 것은, 서재필 박사 기념관이 논산에 세워지는 것을 반대하는 측의 논리가 과연 타당한가 따져보기 위함이다. ‘서재필은 친일파’라는 주장은 과연 사실인가? 이 논쟁은 별도의 장을 마련해야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시대 흐름상 친미파라는 사실이다.


보성군청에서는 서재필 선생이 태어난 문덕면 생가 앞에 1991년 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시작해 2003년 완공했다. 기념공원에는 선생의 정신이 살아 있는 독립문을 재현하고 유품 8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https://blog.naver.com/nonger10/221357279245 송재 서재필선생 기념공원을 소개한 블로거 ‘맛이멜로우’의 포스팅이 좀 유별나다.


[미스터 션샤인 유진 모델.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박사 송재 서재필기념관]  

보성과 논산에 모두 적(본적)을 둔 송재 서재필 선생. 보성은 외가이고 논산은 친가이다.(논산에는 유적지가 없음...ㅜㅜ) 송재 서재필. 갑신정변, 독립신문 등 역사의 굵직한 무대에 등장하는 이 분.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는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의 모델로도 불리는 서재필 박사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중략....)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필라델피아에서도 시위를 하여 일제의 만행을 알리려 노력했다. (해방 후) 김규식은 우파의 대표, 여운형은 좌파의 대표. 그 사이에서 중립 성향을 띄었던 서재필 박사! 김대중 대통령도, 이승만보다는 서재필이 대통령이 되길 바랐다.


서재필 박사의 유해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묻혔으나 1994년 정부의 요청으로 고국으로 돌아와서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에 묻혔다. 참고로 서재필 박사의 본가는 논산시 연무대에 있다. 이곳은 서재필 박사의 친가이고, 보성은 박사의 외가가 있다. 박사님은 외가에서 태어나 5살까지 보성에서 살다가 5살 때 논산 친가로 왔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너무 영특하여 5개월 만에 서울로 올라가 공부하고 18살의 어린나이에 과거에 합격한다. 보성은 서재필 박사의 유적을 잘 관리했는데 논산에는 집 한 채 달랑 있다고 한다. 논산도 문화재 관리 좀 잘 하시길...



Dr. 서재필은 박사아닌 의사


타지 사람이 가하는 따끔한 일침이다. 부끄러우면서도 고마운 일이다. 여기서 한 블로거 글을 대폭 인용한 데는 이유가 있다. 서재필이 시대의 흐름상 친미파였음을 부각시키고자 함이다. 연무대 선샤인랜드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미스터션샤인(미·션)”은 상당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친미(親美) 시비가 일었다. 한술 더 떠서, 이병헌으로 분한 주인공 유진초이 모델이 서재필였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모양이다.


미·션의 시대적 배경은 구한말이다. 서재필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김은숙 작가가 이름없는 의병들을 끌어낸 점은 비록 픽션을 가미했지만, 한국 근대사의 위대한 발굴 작업이다. 그 무명의병들과 견주어 볼 때 서재필은 지나치게 드러난 일개인이다. 미·션에서 유진초이와 교집합이 있어도 보이지만, 둘의 시대극 배역은 출생 신분부터 달리한다.


직업도 달랐다. 서재필의 생업은 의사였다. 의사를 뜻하는 영어 닥터(doctor)가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저서가 ‘박사’로 오역하였다. 서재필전도사인 윤석일 목사는 그를 ‘박사 위의 박사’로 격상하면서도, 다만 박사학위를 딴 적은 없다고 못 박는다. 오늘 2부로 연재하는 장근세 씨도, 편집실에서 가필한 “의학박사가 되어 귀국길”이란 중간제목에 정정보도를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제15회 애국지사 송재 서재필 박사 기념식’에서 보다시피, 박사라는 호칭이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이 기념식을 후원한 논산문화원의 권선옥 원장은 전남 보성을 들고나왔다. 보성에는 송재서재필기념공원이 있고, 거대한 독립문과 서재필 동상, 서재필기념관과 사당, 생가를 잘 복원해 놓았다. 권 원장은 서재필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교육프로그램화하자면서 서재필 백일장, 말하기대회 등을 제안하였다.



서재필 현 묘역

보성 송재문화제에서는 기독교 추모기도도


보성은 하드웨어에서 끝나지 않고, 송재문화제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동시 구동하고 있다.  애국지사 송재 서재필선생 탄생 155주년 기념 및 서거 68주기 추모하는 제6회 송재문화제가 4월 8일 보성 서재필기념공원에서 열렸다. (사)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이사장 김중채) 주관으로 열린 기념식은 김경탁 전남동부보훈지청장을 비롯하여 각계인사, 회원, 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하였다.


유청 광주전남발전협의회 사무처장이 진행을 맡은 이날 행사에서 제례의 초헌관은 서대석 광주광역시 서구청장, 아헌관은 이남섭 성주이씨하은공파종회회장, 종헌관은 손동선 다실종합건설대표, 독축은 김중채 이사장, 집례는 이현호 광주향교 의전수석장의가 맡았다.


전통국악으로 김태례 김승호 김준영 유세윤 명인이 산조합주를 들려주고, 김찬미 명창이 ‘쑥대머리’를 열창하였다. 정상희 명창이  ‘제석 굿’을 선보인 다음 헌화와 분향이 이뤄졌다. 추모헌시는 최명숙 보향차인회 회장이 낭송하였다. 독경은 보성불교사암연합회 스님들이 올렸다. 이채로운 것은 광주기독교교단협의회 고문인 송정용 목사가 추모기도를 한 점이다. 미국에서 서재필은 크리스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나라와 시대를 넘나들었던 그의 파란만장 일대기를, 지난 호에 이어 은진면 토양리 주민인 장근세 씨에게서 들어본다.


[글] 이지녕

사진은, 윤석일 강경역사문화연구원장, 중도일보 장병일 국장이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 글은 『놀뫼신문』 2019-04-10일자 6면과 다음호에 연재된 기사입니다.


[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9)] 논산사람 서재필 다시 만나는 날

https://nmn.ff.or.kr/17/?idx=1770831&b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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